일본 요시노가리 유적..,
Posting|2013.04.28 09:23
일본 요시노가리 유적 吉野ヶ里遺跡 은 앞에서도 잠깐 썼지만 야요이시대 사회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일본 굴지의 유적입니다. 정확히는 일본 큐슈 사가현에 있는데 JR 에서 별도의 역을 운영하고 있을 정도로 규모도 크고 일본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막대한 유적입니다. 먼저 구글 맵에서의 위치를 보면,
제가 이 유적공원에 갔던 방식은 후쿠오카에서 기차를 타고 지도에 보이는 요시노가리 역에 내려 도보로 억세스 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요시노가리 역에서 내려 공원까지는 논길을 가로질러 가게 되어있었는데 거리가 물론 못걸어갈 정도는 아닙니다만., 짐을 가지고 이동하기에는 좀 피곤한 거리였습니다. 하지만 물론 차를 렌트하시는 분들은 다른 방법으로 가실 수 있겠죠., 아래에 공원측이 권하는 억세스 방법을 링크해 둡니다.
요시노가리 공원에 대한 이해를 도우려면 일본사에서 야요이시대, 그리고 야마타이 논쟁이라는 부분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할것으로 생각합니다만, 제 전공도 아니고 여기는 그런 글을 쓰기도 그렇고., 요즘은 세월이 좋으니 위 키워드만으로도 충분히 온라인 상으로 검색이 가능할 것입니다.
요시노가리 공원은 일본 야요이시대에 번성한 취락 유적 정도가 아니라 현존하는 당시 유적 중 "일본최대급"의 하나라는 점에 있습니다. 이 때문에 이 유적이 역사적으로 어떤 정치적 실체에 해당하는가 하는 부분을 놓고 일본 학자들 사이에 많은 논쟁이 있었습니다. 일부는 이 유적이 삼국지 위지 동이전이라는 옛날 중국문헌에 나오는 "야마타이국 邪馬台国 에 해당한다는 주장도 했습니다만, 진위 여부는 모르겠습니다. 최근에는 일본 고대국가의 원형이라고 할 이 나라의 위치가 큐슈가 아니라 오사카 부근 기나이 지역이라는 주장이 더 힘을 얻고 있는 상황이라는 점만 밝혀 둡니다.
이 유적은 제 전공과도 관련이 좀 있어 저로서는 은근히 관심이 많습니다., 그럼 아래 사진을 감상.,
정문 전경.
멀리 보이는 곳이 요시노가리. 면적은 꽤 넓습니다.
야요이시대와 요시노가리에 대한 설명. 야요이시대는 지금으로부터 2300-1700년 전, 약 6백년간 이어진 일본사상의 한 시대입니다. 야요이시대 이전은 조몽시대, 이후는 고훈시대라고 부릅니다. 고훈시대에 들어오면 전방후원분이라고 부르는 대규모 고분이 나타나는 등 고대왕국의 완성을 향해 걷게 됩니다.
요시노가리 마을에 들어가려면 가장 먼저 마을 전체를 두르고 있는 해자 (外壕)를 지나야 하는데, 이 해자를 따라 방어용 목책이 둘러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요시노가리 유적 주위의 해자. 이 해자는 저희 전공과도 관련이 깊은데 해자 바닥 토양에서 다수의 기생충란이 확인되어 요시노가리 유적 내부의 오수가 이 해자로 흘러든것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경주 월성과 같은 상황이었다고 할 수 있죠. 월성 주변 해자에서도 같은 기생충란이 많이 확인되어 고대에는 한국과 일본의 해자운영이 거의 유사한 상황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남내곽 입구문에 설치된 새 모양 조각 (鳥形)이 보이시죠? 일본 유적에서 많이 발견되는 새모양 조각을 근거로 복원한것이라고 합니다.
요시노가리 주변에 설치된 목책 행렬. 외부로부터의 침입자를 막기위한 배려.
요시노가리 유적을 낳은 야요이 문화는 한반도와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야요이문화 자체가 발달된 수도작 농경을 근거로 하고 있는데 이 문화의 성립기부터 고훈기로 넘어갈때까지 한반도로 부터 막대한 영향을 입었다고 합니다. 물론 야요이 후기로 들어오면 이러한 문화 흐름은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일방적인것은 아니었고 역류 현상도 일부 관찰된다고 합니다만.,
(주 1) 여기서 잠깐. 요시노가리 유적과 한국과의 관계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국의 고대 문화에 대한 이해가 매우 중요하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몇년 전 국립박물관에서는 요시노가리전이 한국문화와의 관련성을 주제로 열린적도 있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한국문화가 일본으로 전해지는 것은 청동기문화의 개시와 함께 전 기간 동안 때로는 강하게, 때로는 단절되기도 하며 전개되었다고 합니다., 요시노가리 문화와 관련이 있는 가장 대표적인 한국의 문화의 예를 들어 본다면. 아래 그림에서 보는것과 같은 "송국리 문화"의 예를 들수 있겠습니다. 이 문화는 일본 내 초기 수도작 (벼농사) 전개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는 문화인데., 실제로 일본 내 성립기의 벼농사 유적에는 송국리문화와 관련이 있는 유적, 유물들이 많고,, 이 때문에 일본문화의 형성에 기여한 한국 선사문화의 하나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이 문화는 금강 중, 하류 지역 (공주, 부여) 이 중심이며 위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이 주변으로 전파되어 나갔고, 그 경계는 화성-평택-청주-상주-대구-울산의 이남지역에서 발전하였다고 합니다.
송국리문화권의 유적 중 매우 유명한 유적지는 부여 송국리 입니다. 이 유적지의 연대에 관해서는 이견이 있지만 최근 발표된 논문을 참고하면 대체적으로 기원전 850-550년의 범위에 해당하는 유적이라고 하는데 이 유적에서는 "논농사의 집약화를 통하여 생산량을 증대시키고 이러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유력자 또한 유력 집단이 등장하게 되었으며 이를 차지하기 위한 빈번한 전쟁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송국리 유적은 이러한 흐름을 겪고 있던 이 지역 여러취락과 관련을 맺으면서 " 그 정점에 위치하는 중심취락으로 성장" 하였다는 것인데 (손준호, 송국리유적재고. 고문화 70집), 일부 연구자의 경우 송국리 유적의 경우 중서부 지역에서의 "최상위 취락"으로 상정 (안재호, 송국리유형의 검토. 영남고고학 11집) 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중서부 지역이라면 결국 송국리 문화의 중심지로 알려진 부여, 공주 일원일텐데 이 말은 좀더 무리하게 말해 보자면 송국리문화권 전체의 수장으로서의 위상을 부여 송국리에 줄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닐까., 감히 억측해 봅니다. (실제로 송국리 유적은 굉장히 큽니다., 요시노가리보다 더 크다던데., 나중에 한번 사진으로 소개해 볼까 합니다.)
이 사진은 김승옥 선생께서 호남고고학보 24집에 투고한 논문 "송국리문화의 지역권 설정과 확산과정"이라는 논문에 수록된 도판입니다. 송국리 문화의 발생과 전개과정을 잘 정리했다고 판단되어 여기 옮겨 실었습니다., 혹 누가 된다면 언제든 바로 삭제하겠습니다.
요시노가리에는 무덤이 많습니다. 대개 이처럼 큰 옹관묘 안에 사람이 묻혀 있는데 이 무덤 양식도 한반도와 관련이 깊다고 합니다. 이 무덤안에는 위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머리가 없는 인골도 발견되었는데, 연구자들은 이 피장자의 경우 전투에서 패하여 목을 적이 취하여 가져간 때문에 목이 없는 상태에서 묻혔다. 라고 보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이 시기에 만연하기 시작한 전쟁의 흔적이 되는 셈인데, 유사한 케이스는 우리나라에서도 자주 발견 됩니다. 저희 연구진은 강원도 지역에서 이 경우와는 반대로 머리만 달랑 묻힌 옹관묘를 조사한 적도 있다는 것을 밝혀 둡니다.
야요이 토기 각종.
요시노가리에서는 위와 같은 각종 토기와 함께 목제 농기구도 많이 발견되었습니다.
요시노가리 유적의 목제농기구에 비견될만한 것이 우리나라 광주 신창동 저습지 유적에서 많이 나왔습니다. 이 지역 역시 요시노가리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번영한 지역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양자간 매우 유사한 점이 많았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요시노가리 옹관묘 안에 남아 있는 세형동검과 옥. 사진에서 보시는 것처럼 세형동검은 한반도에서 발생하여 일본으로 건거가 초기 금속기문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합니다.
(주2) 한반도에서 발생한 세형동검에 대해서는 약간의 부연설명을 좀 합니다.. 세형동검문화는 최근에는 대릉하-심양지구에서 발전한 동검문화가 기원전 300년 경, 한반도 중서부지역 (한강 유역 및 금강 유역) 으로 들어오면서 성립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문화는 한반도로 유입된 후 서북부 (평양 지역), 동북부 (함흥 지역), 남서부 (전남 지역), 동남부 (영남지역) 등으로 빠른 속도로 전파되어 들어갔습니다. 이 과정에서 세형동검문화는 바다를 건너 일본 (북부구주지역권)에 까지 들어가게 되는데 그 문화의 흔적이 이곳, 요시노가리 유적에 남아 있는 것입니다.
조진선 저. 세형동검문화의 연구. 학연문화사. 중에서 발췌..... 저자의 요구가 있을때에는 삭제하겠습니다.
요시노가리는 목하 건설중-. 물론 이 사진은 2004년의 것으로 시간이 많이 흘렀으므로 건설중이던 저 건물들은 모두 신축 완공 (!) 했겠죠., 요시노가리 유적 내의 건물들은 모두 이처럼 새로 건립한것들입니다. 물론 과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했겠지만 조금 너무 지나친 복원이라 생각되는것도 눈에 좀 띄는 부분은 아쉽습니다.
요시노가리에는 창고로 생각되는 건물이 모여 있는 곳이 있는데 이 곳 주변에 시장이 발달했을 것이라고 보고 있는 모양입니다. 따라서 많은 수의 창고 건물과 시장거리가 배치된 지역을 볼 수 있습니다.
줄 지어 서있는 창고 복원물들. 재미있는 것은 각 창고의 용도를 일일히 나누어 전시 해 놓았습니다만., 정말 이랬는지는 모르겠네요.
이런 창고를 "고상가옥" 이라고 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보는 것처럼 각 고상가옥의 용도를 일일히 지정해서 설명-. 이 가옥은 철과 동제품 원료를 모아 둔곳이라고 하네요.
야요이시대 방패입니다. 가운데 보이는 청동장식이 이른바 "파형동기"입니다. 고대 일본에는 최고권력자 급의 무덤에는 예외 없이 저런 모양의 동기가 발견되어 이들의 정치군사적 상징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우세하다고 합니다. 한반도에서는 김해 대성동고분에서 발견되었고 광주신창동 저습지에서는 나무로 만든 거의 유사한 문양의 유물이 발견된 바 있습니다. 어쩌면 이 파형동기의 기원은 한국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나라 김해대성동 고분에서 나온 "파형동기"를 보시려면 이곳을 클릭!!
우리나라에서 나온 "파문원형칠기"를 보시려면 이곳을 클릭!!
이 동네 병사들의 초소라구요.
고상가옥아래에 전시 해 놓은 동경, 동과, 동검, 그리고 용범. 물론 레플리카 (모조품)겠죠?
- 교육·학문, Canon_DIGITAL_IXUS_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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