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로 한 번 보겠습니다.
=======================================================
◆ 전방후원분(장고분) 기원에 대한 한국, 일본의 주장
* 한국의 주장 :
ⅰ) 고대 경상도 사람들이 일본에 건너가 고향의 집자리 지형, 즉 전방과 후원으로 생긴 구릉을 골라 나무곽을 배치해서 만든 묘제라고 주장.
ⅱ) 압록강 유역의 적석총 가운데 원형의 적석부에 네모난 형태의 제단 형태 석축단이 조성된 것에서 비롯됐다”는 고구려 기원설주장.
ⅲ) “원분(둥그런 무덤)과 방분(네모난 무덤)의 결합으로, 그리고 원분과 제단의 결합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며 “그 원류는 우리나라”라고 주장.
ⅳ) 무덤의 주인공이 당시 영산강유역에서 살았던 마한 토착세력의 수장이라는 주장.
ⅴ) 영산강유역의 수장들이 왜와의 교류를 강화하면서 왜의 고분인 장고분을 썼다는 주장.
ⅵ) 마한세력이 백제의 영향권 밖에 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규슈지방도 일본의 중앙세력에서 벗어나 있어서 두 세력간의 교류를 통해 무덤 형식을 들여와 썼다는 주장.
ⅶ) 백제가 마한을 압박하는 상황에서 왜와의 교류를 통해 ‘전방후원분’ 을 본 마한세력이 백제의 남하에 어필하는 의미에서 왜의 묘제를 썼 다는 주장.
* 일본의 주장 :
ⅰ) 분구묘, 즉 네모나고 주위에 구덩이 시설을 갖춘 방형주구묘의 돌출부가 환경에 따라 변화하여 이른바 ‘전방후원분’으로 발전했다면서 일본자생설을 주장.
ⅱ) 영산강유역에 왜의 무역센터 같은 곳이 있었는데 이곳에서 종사하 는 유력한 왜의 상사 주재원이 고향의 무덤인 ‘전방후원분’을 썼다는 주장
ⅲ) 일본의 연구자들 가운데 왜계통의 사람들이 영산강유역에 살았다는 데 이들이 5세기 후반~6세기 전반에 백제의 중앙귀족으로 진출해 왜의 무덤형태를 썼다는 주장.
=======================================================
한국의 주장 중에 i)은 전혀 근거가 없습니다. 만일 주장하려면 언제, 누구, 어떻게, 왜 등등이 다 나와야 할 것입니다. 당연히 전방후원분이 낙동강유역에는 안 나오고 영산강유역에만 나오는 이유도 설명해야 할 것입니다.
ii)와 iii)은 어려운데 아직 단언하기는 어렵고 더 연구해야겠지요.
iv)는 틀렸습니다. 토착세력이 웅진천도 직후에 영산강유역의 외곽지대에 갑자기 나타납니까? 백번 양보하면 혹시 곤지세력(부여씨)이 왜국에 가기 전에 영산강유역에 살았던 토착세력이었다 하고 주장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v)도 틀렸지요. 무령왕릉처럼 교류로 다른 무덤을 쓰는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왜 웅진천도 직후에 갑자기 나타나는지, 6세기 초에 들어서면 사라지는지를 설명해야 할 것입니다.
vi)는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전방후원분은 기내에서 시작되나 5세기가 되면 큐슈에도 나타나고 영산강유역 형식은 오히려 큐슈와 비슷하다고 합니다. 청령사후 기내지역에서 완전히 몰락한 곤지세력이 혹시 큐슈로 도망간 것은 아닌가 생각됩니다.
vii)도 틀렸습니다. 당시 영산강유역은 금강유역의 중앙정부보다 훨씬 큰 고분을 축조하고, 금동관 쓰고, 금동신발 신고, 떵떵거리며 살았습니다. 이는 진왕제하에서는 지극히 당연한 것처럼 느껴졌을 것입니다. 동성왕은 북위와의 전쟁 후 이들이 이탈하려 하자 무력시위를 통해 일거에 제압했지 길게 압박하지 않았습니다.
일본의 주장을 보면 i)은 한국의 주장 ii)와 iii)처럼 아직 불확실하고 더 연구해야 하는 내용입니다.
ii)는 오해의 소지가 있는데 삼한백제 정부가 왜국으로 건너건 후에도 5세기동안 영산강유역은 기내지역의 왜국과 같은 나라였습니다. 하지만 무역센터를 여기에 만들어 묘제가 나타났다는 주장은 근거가 부족합니다. 웅진천도 직후 웅략천황의 귀국을 이야기하지 못하면 불완전하다고 생각합니다.
iii)이 그래도 가장 설득력이 있지만 왜계통이 무엇이냐는 정의의 문제가 생깁니다. 만일 동성왕을 왜계통이라고 말한다면 맞고, 백제계통이라고 말한다면 틀립니다. 하지만 만일 영국인이 미국에 건너가 20년 동안 살다가 다시 영국에 돌아와 죽었다면 그 영국인은 영국계통입니까? 아니면 미국계통입니까? 구분이 무의미하지요. 5세기의 기내왜국이 본래 백제였습니다.
제가 검토해본 것으로는 고고학자이신 조유전박사님의 견해, 즉 이곳에 살던 마한인들이 주구묘를 쓰다가 왜국에 건너갔고, 이후 어떤 이유로 다시 돌아와 장고분을 썼다는 것이 사실에 가장 근접하다고 봅니다. 즉 동일한 삼한백제계라는 것이고, 좀 더 좁히면 여기의 마한인은 부여씨인 곤지와 동성왕 세력이 된다는 가정하에서입니다. 인터넷에 올라와있는 몇분들의 견해를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복암리 3호분을 봐요. 마한 옹관묘→왜계 석실분→백제 석실분 등으로 이어지는 무덤을 조성한 사람들은 동일집단, 즉 토착세력이라는 뜻이지. 3호분 96석실분처럼 왜계의 석실분인데 그 안에는 마한의 옹관묘를 썼고, 후에 백제식 석실분으로 바뀌었는 데도 그 안에는 옹관묘 전통인 다장(多葬·무덤에 시신을 여럿 안치하는 장례풍습)이잖아.”-토지박물관 조유전
“동일집단이 400년간 옹관묘(3세기 중엽~5세기 중엽·마한계)→초기 횡혈식 석실분(5세기 후엽~6세기 초·일본 규슈의 전방후원분과 유사)→백제 석실분(6세기 중엽~7세기)으로 이어지는 일목요연한 무덤을 구축했으니 얼마나 재미있습니까.”-경주문화재연구소 윤근일
“백제의 압박을 피해 일본으로 건너간 마한인들은 같은 뿌리의 영산강 유역권의 마한세력과 지속적으로 인적·물적 교류를 유지했을 겁니다. 영산강 유역에 분포된 장고분(전방후원분)들은 바로 그런 망명 마한인들이 귀향해서 남긴 무덤이라고 봐야죠. 그러니 왜계 무덤을 썼던 거고.”-전남대 임영진
“영산강 유역 전방후원분은 형태만 전방후원분일 뿐 이른바 위세품(세력을 과시하는 물건)은 백제나 가야의 것이고, 일반유물은 토착세력의 사용품들입니다.”-동신대 이정호
“복암리 3호분에서 보듯 옹관묘를 쓰던 토착세력이 왜계 구조를 지닌 석실분(5세기 후엽)을 쓰고, 다시 백제석실분(6세기 중엽)을 씁니다. 그리고 일본식 묘제라는 전방후원분(장고분)에서도 백제의 요소가 분명히 보입니다. 나주 신촌리 9호분 단계(5세기)에도 금동관과 환두대도, 목관 같은 백제의 요소가 보이고 복암리 3호분 출토품인 금동관과, 전방후원분인 함평 신덕고분에서 보인 금동관과 금동신발의 흔적, 그리고 월계동 1호분 출토 은피관정(머리를 은판으로 감싼 관못) 등도 역시 백제계입니다.”-부여연구소 김낙중
하지만 이 모든 문제는 곤지세력의 귀국을 거론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우선 삼국지 동이전의 진왕기록이 나와야겠고, 두번째는 곤지가 왜 웅략천황이 되는가를 알아야 하며, 마지막으로 웅진천도후 곤지계열이 귀국하여 어떻게 백제의 왕권을 장악하는지에 대한 이해가 따라야 합니다.
=======================================================
◆ 전방후원분(장고분) 기원에 대한 한국, 일본의 주장
* 한국의 주장 :
ⅰ) 고대 경상도 사람들이 일본에 건너가 고향의 집자리 지형, 즉 전방과 후원으로 생긴 구릉을 골라 나무곽을 배치해서 만든 묘제라고 주장.
ⅱ) 압록강 유역의 적석총 가운데 원형의 적석부에 네모난 형태의 제단 형태 석축단이 조성된 것에서 비롯됐다”는 고구려 기원설주장.
ⅲ) “원분(둥그런 무덤)과 방분(네모난 무덤)의 결합으로, 그리고 원분과 제단의 결합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며 “그 원류는 우리나라”라고 주장.
ⅳ) 무덤의 주인공이 당시 영산강유역에서 살았던 마한 토착세력의 수장이라는 주장.
ⅴ) 영산강유역의 수장들이 왜와의 교류를 강화하면서 왜의 고분인 장고분을 썼다는 주장.
ⅵ) 마한세력이 백제의 영향권 밖에 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규슈지방도 일본의 중앙세력에서 벗어나 있어서 두 세력간의 교류를 통해 무덤 형식을 들여와 썼다는 주장.
ⅶ) 백제가 마한을 압박하는 상황에서 왜와의 교류를 통해 ‘전방후원분’ 을 본 마한세력이 백제의 남하에 어필하는 의미에서 왜의 묘제를 썼 다는 주장.
* 일본의 주장 :
ⅰ) 분구묘, 즉 네모나고 주위에 구덩이 시설을 갖춘 방형주구묘의 돌출부가 환경에 따라 변화하여 이른바 ‘전방후원분’으로 발전했다면서 일본자생설을 주장.
ⅱ) 영산강유역에 왜의 무역센터 같은 곳이 있었는데 이곳에서 종사하 는 유력한 왜의 상사 주재원이 고향의 무덤인 ‘전방후원분’을 썼다는 주장
ⅲ) 일본의 연구자들 가운데 왜계통의 사람들이 영산강유역에 살았다는 데 이들이 5세기 후반~6세기 전반에 백제의 중앙귀족으로 진출해 왜의 무덤형태를 썼다는 주장.
=======================================================
한국의 주장 중에 i)은 전혀 근거가 없습니다. 만일 주장하려면 언제, 누구, 어떻게, 왜 등등이 다 나와야 할 것입니다. 당연히 전방후원분이 낙동강유역에는 안 나오고 영산강유역에만 나오는 이유도 설명해야 할 것입니다.
ii)와 iii)은 어려운데 아직 단언하기는 어렵고 더 연구해야겠지요.
iv)는 틀렸습니다. 토착세력이 웅진천도 직후에 영산강유역의 외곽지대에 갑자기 나타납니까? 백번 양보하면 혹시 곤지세력(부여씨)이 왜국에 가기 전에 영산강유역에 살았던 토착세력이었다 하고 주장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v)도 틀렸지요. 무령왕릉처럼 교류로 다른 무덤을 쓰는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왜 웅진천도 직후에 갑자기 나타나는지, 6세기 초에 들어서면 사라지는지를 설명해야 할 것입니다.
vi)는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전방후원분은 기내에서 시작되나 5세기가 되면 큐슈에도 나타나고 영산강유역 형식은 오히려 큐슈와 비슷하다고 합니다. 청령사후 기내지역에서 완전히 몰락한 곤지세력이 혹시 큐슈로 도망간 것은 아닌가 생각됩니다.
vii)도 틀렸습니다. 당시 영산강유역은 금강유역의 중앙정부보다 훨씬 큰 고분을 축조하고, 금동관 쓰고, 금동신발 신고, 떵떵거리며 살았습니다. 이는 진왕제하에서는 지극히 당연한 것처럼 느껴졌을 것입니다. 동성왕은 북위와의 전쟁 후 이들이 이탈하려 하자 무력시위를 통해 일거에 제압했지 길게 압박하지 않았습니다.
일본의 주장을 보면 i)은 한국의 주장 ii)와 iii)처럼 아직 불확실하고 더 연구해야 하는 내용입니다.
ii)는 오해의 소지가 있는데 삼한백제 정부가 왜국으로 건너건 후에도 5세기동안 영산강유역은 기내지역의 왜국과 같은 나라였습니다. 하지만 무역센터를 여기에 만들어 묘제가 나타났다는 주장은 근거가 부족합니다. 웅진천도 직후 웅략천황의 귀국을 이야기하지 못하면 불완전하다고 생각합니다.
iii)이 그래도 가장 설득력이 있지만 왜계통이 무엇이냐는 정의의 문제가 생깁니다. 만일 동성왕을 왜계통이라고 말한다면 맞고, 백제계통이라고 말한다면 틀립니다. 하지만 만일 영국인이 미국에 건너가 20년 동안 살다가 다시 영국에 돌아와 죽었다면 그 영국인은 영국계통입니까? 아니면 미국계통입니까? 구분이 무의미하지요. 5세기의 기내왜국이 본래 백제였습니다.
제가 검토해본 것으로는 고고학자이신 조유전박사님의 견해, 즉 이곳에 살던 마한인들이 주구묘를 쓰다가 왜국에 건너갔고, 이후 어떤 이유로 다시 돌아와 장고분을 썼다는 것이 사실에 가장 근접하다고 봅니다. 즉 동일한 삼한백제계라는 것이고, 좀 더 좁히면 여기의 마한인은 부여씨인 곤지와 동성왕 세력이 된다는 가정하에서입니다. 인터넷에 올라와있는 몇분들의 견해를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복암리 3호분을 봐요. 마한 옹관묘→왜계 석실분→백제 석실분 등으로 이어지는 무덤을 조성한 사람들은 동일집단, 즉 토착세력이라는 뜻이지. 3호분 96석실분처럼 왜계의 석실분인데 그 안에는 마한의 옹관묘를 썼고, 후에 백제식 석실분으로 바뀌었는 데도 그 안에는 옹관묘 전통인 다장(多葬·무덤에 시신을 여럿 안치하는 장례풍습)이잖아.”-토지박물관 조유전
“동일집단이 400년간 옹관묘(3세기 중엽~5세기 중엽·마한계)→초기 횡혈식 석실분(5세기 후엽~6세기 초·일본 규슈의 전방후원분과 유사)→백제 석실분(6세기 중엽~7세기)으로 이어지는 일목요연한 무덤을 구축했으니 얼마나 재미있습니까.”-경주문화재연구소 윤근일
“백제의 압박을 피해 일본으로 건너간 마한인들은 같은 뿌리의 영산강 유역권의 마한세력과 지속적으로 인적·물적 교류를 유지했을 겁니다. 영산강 유역에 분포된 장고분(전방후원분)들은 바로 그런 망명 마한인들이 귀향해서 남긴 무덤이라고 봐야죠. 그러니 왜계 무덤을 썼던 거고.”-전남대 임영진
“영산강 유역 전방후원분은 형태만 전방후원분일 뿐 이른바 위세품(세력을 과시하는 물건)은 백제나 가야의 것이고, 일반유물은 토착세력의 사용품들입니다.”-동신대 이정호
“복암리 3호분에서 보듯 옹관묘를 쓰던 토착세력이 왜계 구조를 지닌 석실분(5세기 후엽)을 쓰고, 다시 백제석실분(6세기 중엽)을 씁니다. 그리고 일본식 묘제라는 전방후원분(장고분)에서도 백제의 요소가 분명히 보입니다. 나주 신촌리 9호분 단계(5세기)에도 금동관과 환두대도, 목관 같은 백제의 요소가 보이고 복암리 3호분 출토품인 금동관과, 전방후원분인 함평 신덕고분에서 보인 금동관과 금동신발의 흔적, 그리고 월계동 1호분 출토 은피관정(머리를 은판으로 감싼 관못) 등도 역시 백제계입니다.”-부여연구소 김낙중
하지만 이 모든 문제는 곤지세력의 귀국을 거론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우선 삼국지 동이전의 진왕기록이 나와야겠고, 두번째는 곤지가 왜 웅략천황이 되는가를 알아야 하며, 마지막으로 웅진천도후 곤지계열이 귀국하여 어떻게 백제의 왕권을 장악하는지에 대한 이해가 따라야 합니다.
http://www.histopia.net/zbxe/index.php?mid=neo&category=3304&sort_index=readed_count&order_type=desc&page=3&document_srl=55347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