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요시노가리를 건설했던 사람들은 조선반도의 대평등으로부터의 이주민이라는 것은 저도 인정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중심지는 조선반도가 아닌 큐슈로 옮겨간 것으로 생각이 듭니다.
이는 기원후가 되면 양유적간의 규모에서 역전이 이루어지고, 일본고유의 유물로 인정되는 청동투겁창이 조선반도의 대평에서 발견됩니다.
청동투겁창은 종교의식에 사용되던 신물이었습니다. 고대는 제정일치의 사회이므로 일본의 청동투겁창이 대평유적에서 발견된다는 점은
정치적으로, 요시노가리인들이 대평인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볼수 있는 것입니다.
http://www.pref.saga.lg.jp/web/yosinogari_ibutu.html 이곳에 들어가시면 유물들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antijap
그게 당시 실체도 없는 겨우 1000명 내외의 사람이 모여 살던 자칭 왜 최대의 촌락이 지나와 교역이 활발한게 되나?
일개 촌락도 나라와 무역하나 ㅋ 그것도 본국인 가야 허락도 없이..쯧쯧..
참고로 한국의 고대 취락지역의 인구의 예를 들면 풍납토성의 경우 연대(年代) 측정한 결과 기원전 199년까지 나왔지.
아직 일부만 측정했기 때문에 기원전 3세기 정도까지는 올라갈 것으로 여겨지는 곳이다.
주변 인프라를 조사한 결과 풍납토성은 최소한 1만명이 넘는 인구가 살 수 있는 도시이기 때문에
기원전 3세기에 그러한 도시가 존재했다는 것 자체가 고대 한국과 왜의 국력을 이야기 해주는 거란다.
물론 풍납토성조차도 한국의 중심지는 아니라는 게야 한국의 중심지는 당시 북방이었으니까
고고학적으로 더욱 인구분포나 기본 인프라가 풍납정도는 비교조차 안될 정도라는 이야기야.
고대에서 도시를 이야기하려면 인구 1만은 적어도 되어야 한다는 소리지 그런데
인구 1000명의 일개 부락정도의 요시노가리가 도시? 뻥두 작작 쳐라 쪽바라~
풍납토성 유적지는 조금 크니까 비교 대상이 안된다구? ㅎ 그럼 요시노가리정도의 유적지의 예를 들어 줄까 그런건 널려 있어 한국 남부에..
전라남도 담양의 태목리유적에선 말이다 마한(馬韓) 유적으로 고속도로를 공사할 때에 발견된 것인데
특별하게 이곳을 중요하게 생각해서 집중발굴한 것이 아니라 공사중에 일부분만 발굴했는데도 주거지의 숫자가 435개나 발견된단다.
한 집안 당 보수적으로 잡아서 4명이라구 해도 거의 2000명에 육박하지 ㅋ 그건 일부니까 나머지 다 발견하면
모 얼마가 더 늘어 날진 모르지 ㅎㅎ 그런 기본적인 촌락이 한국에는 널려있다는 거야..
니들처럼 기를 쓰고 발굴해서 고작 1000명이 아니라..이칭구야..고인돌분포도나 고인돌 숫자만 봐도
그건 거의 상식적으로 계산할 수 있는 거지 한국이 세계에서 고인돌이 제일 많은 나라라는 건 알쥐이~쪽바뤼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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