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시티즌이 잘 나가고 있다. 비록 아직 단 세 경기를 치렀을 뿐이지만 대전은 이 경기에서 지난 시즌과는 전혀 다른 경기력을 선보이고 있다. 현대오일뱅크 K리그 2011 초반 돌풍의 주인공 대전은 지금까지 언제나 순위표 맨 밑을 뒤져야 찾을 수 있는 팀이었다. 그만큼 ‘만년 꼴찌’였던 대전이기에 과거 이들이 아시아 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에 진출했던 걸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다. 오늘은 아시아 최고의 축구 무대에서 눈물겨운 투혼을 선보였던 과거 대전의 이야기를 들춰보고자 한다.
‘만년 꼴찌’ 대전의 잊을 수 없는 2001년
가 난한 시민구단 대전은 언제나 꼴찌 후보였다. 1998년 IMF 이후 계룡건설, 동아건설, 동양백화점, 충청은행 등 대전을 후원했던 기업 중 계룡건설을 제외한 세 개의 기업이 파산하면서 더더욱 상황은 악화됐다. 1998년 10개 팀 중 9위, 1999년 8위, 2000년에도 8위라는 성적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특히 1999년에는 18패를 당하며 당시까지 리그 최다패의 불명예를 안기도 했다. 대전은 언제나 약자였다. 전용 훈련장은커녕 번듯한 숙소도 없어 빌라 몇 채를 구해 선수들이 숙식을 해결할 정도였다.
2000 년 김기복 감독(현 내셔널리그 부회장) 밑에서 코치직을 맡다가 2001년을 앞두고 새롭게 지휘봉을 물려받은 이태호 감독은 두텁지 못한 선수층으로 리그에 임했고 이 시즌에서 결국 꼴찌(10위)라는 수모를 겪었다. 하지만 FA컵에서의 모습은 정반대였다. 지금과는 달리 특정 기간 동안 모여 치러진 FA컵에서 대전은 믿기지 않는 승전보를 이어갔다. 강릉시청과의 16강전에서 2-1로 승리한 대전은 8강에서는 안양LG를 2-1로 제압했고 준결승에서도 전북과 1-1 무승부 이후 치러진 승부차기에서 4-3으로 승리하며 극적으로 FA컵 결승에 올랐다.
대전의 눈물겨운 투혼이 이어지는 동안 김은중이 과거 경기 도중 한 쪽 눈을 실명한 사실이 언론을 통해 밝혀지기도 했다. 한 쪽 눈의 시력을 거의 상실한 김은중의 스승인 이태호 감독 역시 과거 선수 시절 한 쪽 눈을 잃은 불운을 겪었던 터라 이 사실은 많은 이들의 마음을 더욱 뜨겁게 했다. 김은중이 한 쪽 눈으로만 골대를 바라보고 FA컵 준결승전까지 세 경기 연속골을 기록했다는 사실은 세상을 놀라게 했다. 이태호 감독은 “(김)은중이가 이렇게 몸이 부서져라 뛰다가 나머지 한 쪽 눈까지 잃으면 어쩌나 걱정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대전 선수들이 2001년 FA컵 결승전에서 포항을 제압하고 우승을 확정지은 뒤 환호하고 있다. 특히 대전 팬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은 세네갈 출신 수비수 콜리(가운데)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사진=연합뉴스)
실명 아픔 딛고 정상에 선 김은중
FA 컵 결승 상대는 포항이었다. 김병지와 이동국 등 초호화 멤버를 자랑하는 포항은 대전의 적수가 아니었다. 경기 전부터 이미 승부는 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무도 대전이 포항을 이길 것이라 생각하는 이는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전은 믿기지 않는 투혼을 선보였다. 특히 골키퍼 최은성은 박태하의 공격을 막다 전반 18분 만에 의식을 잃고 쓰러져 곧바로 병원으로 후송되기도 했다. 경험이 일천한 이승준이 최은성 대신 골문을 지켰다.
하지만 대전에는 역시 김은중이 있었다. 김은중은 포항 골문을 가르는 통쾌한 결승골을 성공하며 팀의 기적 같은 FA컵 우승을 이끌어 냈다. 1-0. 대전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우승컵에 입을 맞추는 순간이었다. 아쉽게도 ‘대전맨’ 최은성은 병원으로 후송돼 이 모습을 함께하지 못했지만 이후 이 소식을 알고 병원에서 펑펑 눈물을 쏟기도 했다. ‘가난한 시민구단’, ‘만년 꼴찌’ 소리를 듣던 대전은 FA컵에서 이렇게 감격적인 우승을 차지했다. 김은중은 네 골로 대회 득점왕과 MVP를 거머쥐었다. 대전 선수단은 우승이 확정된 직후 눈물바다가 됐다.
이전까지 정규리그 우승팀은 아시안 클럽 챔피언십에 나갈 자격이 주어졌고 FA컵 우승팀은 아시안 컵 위너스 컵이라는 대회에 나서는 게 규정이었다. 하지만 대전이 FA컵에서 우승하고 아시안 컵 위너스 컵 참가 예정이던 2002/2003 시즌부터 새롭게 대회가 통합됐다. 지금은 아시아 축구인의 축제가 된 AFC 챔피언스리그가 신설된 것이다. 챔피언스리그는 아시안 클럽 챔피언십과 아시아 컵 위너스컵에 나설 자격이 있는 팀을 모두 모아 치르는 매머드급 대회였다.
대전, 챔피언스리그 무대에 서다
대전 은 선수층이 두텁지 못하고 지원도 부족했지만 정정당당히 겨뤄 이 자격을 얻었다. 2라운드부터 경기를 치르게 된 대전은 토너먼트로 2,3라운드를 통과할 경우 본선 라운드 A그룹에 진출하게 되는 상황이었다. 지금과는 다소 챔피언스리그 대진 방식이 다르던 시기였다. 이미 일본 가시마 앤틀러스와 태국 벡 테로가 A그룹 진출 팀으로 확정된 상황에서 대전은 A그룹에 속하기 위해 홈 앤드 어웨이로 두 차례씩 총 네 경기를 치러야 했다. 재정 상황이 여의치 않은 대전으로서는 이마저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리 그에서의 상황도 좋지 않게 돌아갔다. 유일한 후원 기업이었던 계룡건설마저 매각 위기에 처하면서 상황이 더욱 악화됐다. 27경기를 치러 딱 한 번 이겼을 뿐이다. 이 기록은 지금까지 K리그 사상 최소 승리의 불명예다. 선수들 월급은 이미 석 달치나 밀려 있었고 사기는 바닥을 쳤다. 항간에서는 대전의 해체설까지 나돌았다. 그런 와중에 대전은 2002년 10월 9일 챔피언스리그 2라운드 첫 경기를 위해 마카오로 떠났다.
상대는 마카오 최강팀 몬테 카를로였다. 경기 시작 하루 전에 도착해 채 여독이 풀리지 않은 채 몬테 카를로를 상대했지만 대전은 전반 20분 만에 무려 네 골을 몰아넣어 승기를 잡았다. 특히 공오균은 두 골을 꽂아 넣으며 5-1 대승을 이끌었다. 대전은 이주일 뒤 대전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2차전에서도 공오균, 김광선, 이관우의 릴레이골에 힘입어 3-0으로 승리를 따내고 3라운드 진출에 성공했다. 몬테 카를로는 2차전에서 단 한 차례의 유효 슈팅도 날리지 못하고 완패했다.
3라운드 상대는 인도의 모훈 바간이었다. 2002년 11월 13일 치러진 모훈 바간과의 3라운드 1차전 홈경기에서 6-0 대승을 거둔 대전은 원정 2차전에서도 주전 선수들을 총동원했다. 아니, 선수층이 두텁지 못해 주전을 기용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인도 원정을 떠난 김은중과 이관우는 날씨에 적응하지 못하고 심한 몸살에 걸려 제 컨디션이 아니었다. 대전은 인도 콜카타까지 비행기를 두 번이나 갈아타며 머나먼 원정 길에 올라 선수단 전체의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지만 이창엽과 공오균의 골을 묶어 2-1 승리를 거두고 감격적으로 본선 라운드에 합류했다. 대전이 동아시아에서 가장 축구를 잘하는 8개 클럽에 당당히 포함된 것이다.
대전역 광장에서 한밭종합운동장까지 2001년 FA컵 우승 카퍼레이드를 벌이고 있는 대전 선수단 모습. (사진=연합뉴스)
감독 사임과 최악의 대진
본 선 라운드에서는 각 조 1위 팀이 서아시아 팀과 만나 4강을 치르는 방식이었다. 조 2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오로지 1위를 해야 동아시아 두 팀과 서아시아 두 팀이 자웅을 겨루는 준결승에 진출할 수 있었다. 하지만 대전으로서는 최악의 조에 걸리고 말았다. 이미 본선 라운드 A조 진출이 확정된 가시마 앤틀러스와 벡 테로 외에도 중국의 강호 상하이 선화가 한 조에 포함됐기 때문이다. 본선 라운드에도 힘겨운 여정 끝에 올라온 대전으로서는 어느 한 팀 만만히 볼 상대가 없었다. 대전은 그렇게 또 기적을 위해 뛰었다.
하지만 상황은 더욱 꼬이고 말았다. 대전을 이 자리까지 올려놓았던 이태호 감독이 돌연 사임을 선언했기 때문이다. 당시 이태호 감독은 “대전의 경영주체가 바뀌는 등 대내외적 환경이 바뀜에 따라 팀도 새로운 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감독직에서 물러나기로 마음먹었다”고 밝혔다. 이는 곧 지방선거가 끝난 뒤 정치적인 압력이 적지 않았던 불만에 대한 표현이었다. 시민구단 대전은 지방선거 결과에 따라 경영주체가 바뀔 수밖에 없고 실제로 당시 지방선거로 인해 이러한 일은 현실이 됐었다.
이 태호 감독이 대전 사령탑에서 물러난 뒤 대전은 최윤겸 감독을 새로운 대전 감독으로 선임했다. 최윤겸 감독이 이끄는 대전은 곧바로 챔피언스리그 준비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감독 교체로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새로운 감독은 팀의 기강을 바로 세우고 선수를 파악해야 했기에 시간이 부족했다. 더군다나 대전은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전임 이태호 감독이 이룬 챔피언스리그 동부지역 8강 진출이라는 업적이 현재 진행형이었다. 2003년 3월 열리는 챔피언스리그 본선 라운드는 계란으로 바위치기였지만 대전으로서는 도전할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이때쯤 순수 시민구단으로 다시 태어난 대전은 새로운 역사에 도전해야 했다.
대전, 중국 최강팀을 꺾다
당 시 본선 라운드는 특정 지역에 모여 한꺼번에 경기를 치렀다. 지금과 같이 홈 앤드 어웨이 방식이 아니었다. 그런데 대전이 원치 않던 곳에서 경기가 치러지게 됐다. 태국 방콕이었다. 그나마 일본이나 중국 등 가까운 곳에서 경기를 치르면 적응에도 문제가 없었겠지만 기후가 다른 태국 원정은 선수층이 두텁지 못한 대전의 큰 손해였다. 가시마 앤틀러스와 상하이 선화는 두터운 선수층에 막강한 자금력을 보유했지만 그렇지 못한 대전으로서는 태국에 오랜 시간 체류하는 것 자체로도 큰 출혈이었다.
방콕으로 날아간 대전은 1차전에서 상하이를 맞았다. 상하이는 중국 FA컵에서 단 1실점하며 우승을 거둔 수비 축구의 최강자였다. 상하이는 대전을 1승 상대로 지목했다. 하지만 경기가 시작되자 놀랄만한 일이 벌어졌다. 전반 9분 김은중의 도움을 받은 한정국이 골문 오른쪽에서 강력하게 때린 슈팅이 상하이 골문을 가른 것이다. 수비 만큼은 최강이라던 상하이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전반 종료 직전 놀라운 일은 한 번 더 일어났다. 장철우가 오른쪽 측면을 뚫고 땅볼로 굴려준 공을 김은중이 문전에서 방향을 바꾸는 슈팅으로 또 한 차례 골을 기록했기 때문이다.
후반 내내 총공세에 나선 상하이는 후반 40분 뤄샤오가 프리킥으로 한 골을 만회하는 데 그치며 대전에 1-2로 무릎을 꿇었다. 챔피언스리그 동부 지역 8강에 오른 것만으로도 기적으로 평가받던 대전은 이 경기에서도 승리를 거두며 믿기지 않는 신화를 이어갔다. 대전의 승리를 예상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기에 더욱 놀라운 승리였다. 홈팀 벡 테로와 가시마 앤틀러스 경기가 2-2로 끝나는 바람에 대전은 비록 한 경기를 치렀을 뿐이지만 졸지에 조1위에 오르는 이변을 연출했다.
2002년 10월 열린 챔피언스리그 대전과 몬테 카를로의 경기에서 김은중이 슈팅을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벡 테로에 당한 통한의 패배
두 번째 경기 상대는 홈 팀 벡 테로였다. 벡 테로는 이 경기를 앞두고 파격적인 결정을 내렸다. 모기업인 벡(BEC)이 창사 33주년을 기념해 모든 관중을 무료로 입장시키기로 한 것이다. 벡 측은 “이번 대회가 무척 흥미로운 행사여서 가급적 많은 사람들이 경기를 관람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취지에서 이같은 결정을 내렸다”고 했지만 결국 홈 이점을 충분히 이용하려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 가뜩이나 구단의 열악한 경영 문제로 고민이었던 대전은 태국의 유명한 엔터테인먼트 기업으로 막강한 자금력을 앞세운 벡의 물량공세에 기가 죽어 있던 터라 만원 관중이 무척 부담됐다.
역시나 경기장은 6만 관중의 인파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대전은 부상 중인 선수들을 대거 기용하며 맞붙을 놨다. 어깨 부상 중인 공오균과 김정수, 발목 부상을 당한 강정훈 등이 고통을 참고 벡 테로에 맞섰다. 하지만 경기는 결국 벡 테로의 2-0 승리로 막을 내렸다. 엄청난 홈 관중의 응원에 힘 한 번 써보지 못하고 무너졌다. 벡 테로가 1승 1무로 선두에 나선 가운데 상하이가 가시마를 4-3으로 제압, 대전과 나란히 1승 1패로 2위권 그룹을 형성하게 됐다. 대전으로서는 마지막 경기에서 가시마가 벡 테로를 제압해야 실낱같은 조1위의 꿈을 꿀 수 있게 됐다.
당 시 대전은 성남과 함께 챔피언스리그에 참가하고 있었다. 김도훈, 샤샤, 김대의 등 걸출한 선수들을 앞세운 성남은 안정환이 속한 시미즈와 함께 B조에 속해 많은 국내 언론의 관심을 받았다. 대전에 비해 전력이 훌륭해 조1위 가능성이 높은 가운데 안정환과의 대결 역시 무척이나 흥미진진한 대결이었다. 때문에 대전은 이 대회에 나서면서도 그리 큰 조명을 받지 못했다. 언론에서 성남 소식을 전하며 짤막하게 대전 소식을 전하는 게 다반사였고 아예 대전에 관한 뉴스는 생략되는 일도 많았다.
마지막 투혼을 불태운 ‘자줏빛 전사’
마 지막 경기는 벡 테로-상하이전, 대전-가시마전 순으로 치러졌다. 벡 테로가 상하이를 꺾으면 대전은 가시마전 경기 결과에 상관없이 조1위가 좌절되는 상황이었다. 경기장에 미리 들어선 대전 선수들은 벡 테로와 상하이의 경기를 숨죽여가며 지켜봤다. 경기는 후반 40분이 흐를 때까지 1-1로 진행됐다. 이대로 경기가 끝난다면 대전으로서는 가시마를 꺾을 경우 극적으로 챔피언스리그 4강에 오를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후반 종료 5분을 남기고 믿기 싫은 장면이 연출됐다. 벡 테로 차이만이 극적인 역전골을 뽑아내며 조1위를 확정지었기 때문이다.
순간 대전 선수들은 고개를 떨궜다. 가시마전을 이겨도 조1위를 거둘 수 없었기 때문이다. 모든 걸 가시마전에서 쏟아 부으려고 칼을 갈았던 대전 선수들은 다리에 힘이 풀렸다. 한 골을 먼저 넣고도 두 골이나 내준 상하이 선수들이 원망스러웠다. 대전은 터덜터덜 경기를 준비하기 위해 라커룸으로 향했다. 경기 준비가 끝난 뒤 최은성이 선수들을 불러 모으고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비록 챔피언스리그 4강 진출은 좌절됐지만 우리가 여기까지 올라온 과정을 잘 떠올려보자. 우리는 지금까지 믿기 어려운 일을 해냈다. J리그 챔피언을 꺾는 것도 우리에겐 큰 의미 있는 일이다. 이기자.”
파 이팅을 외친 선수들은 전의를 불태우며 그라운드로 달려 나갔다. 가난한 시민구단이 J리그 최강팀을 맞아 챔피언스리그 마지막 경기를 치르는 순간이었다. 후회 없이 싸워야 했다. 그래야 대전의 해체를 막기 위해 발 벗고 나선 팬들을 볼 면목이 있었다. 가시마를 상대로 승리하는 게 FA컵에서 기적 같은 우승이 우연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는 길이었다. 열악한 생활 속에서도 “(김)은중이가 한 쪽 눈마저 다칠까봐 항상 마음 졸인다”고 걱정하며 지휘봉을 놓은 이태호 감독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승리해야 하는 경기였다.
가 시마의 파상공세를 온 몸으로 막아낸 대전은 기어이 후반 막판 일을 저질렀다. 후반 40분 대전의 유일한 외국인 선수 콜리는 공격에까지 가담해 장철우가 오른쪽 측면에서 연결한 공을 머리로 받아 넣었고 콜리를 떠난 공은 그대로 가시마 골문을 갈랐다. J리그 최고 명문팀은 이렇게 대전에 1-0으로 무릎을 꿇었다. 비록 대전은 조1위에 실패했지만 가시마와 상하이를 제압하며 진정한 투혼이 뭔지 잘 보여줬다. 또한 대전을 제압하고 4강에 오른 벡 테로는 파죽지세로 결승에 진출한 끝에 그 대회에서 준우승을 차지했다. 대전으로서는 벡 테로의 벽을 넘지 못한 게 천추의 한이었다.
대전의 한 시대를 풍미했던 최윤열과 공오균, 강정훈 등의 모습. (사진=연합뉴스)
대전의 ‘감동적인 축구’ 계속되길
대 전은 언제나 풍족하지 못한 구단이다. 팬들은 선수들이 맹활약 할 때마다 기쁜 마음도 있지만 ‘내년 시즌 다른 구단으로 팔리면 어쩌나’하는 걱정이 더 앞선다. 마음 놓고 훈련할 전용 훈련장도 없고 클럽하우스도 여전히 없다. 하지만 대전은 ‘축구특별시’라는 별명이 붙었다. 비록 성적과 재정은 만족스럽지 않지만 언제나 가진 것 이상의 축구를 보여줘 많은 팬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과거 챔피언스리그에 도전해 투혼을 선보이며 감동을 선사했던 ‘대전 신화’는 비록 많은 이들이 기억하지 못하고 있지만 충분히 되새겨 볼 만한 이야기다.
대전은 이번 시즌 초반 무서운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선수층이 두텁지 못해 이 상승세가 얼마나 더 이어질지는 잘 모르겠다. 경기가 거듭될수록 대전은 위기를 맞을 가능성이 적지 않다. 하지만 10년 전 선배들이 그랬던 것처럼 비록 맨손으로 싸우지만 더 월등한 무기를 가진 상대와 맞서 주눅 들지 않던 모습을 이번 시즌 더 오랜 시간 보여주길 바란다. ‘자줏빛 전사들’은 10년 전에도, 그리고 올 시즌 초반에도 축구의 진정한 매력을 보여주고 있다. 그건 바로 축구가 돈으로 하는 스포츠가 아니라는 점이다.
footballavenue@nate.com
http://sports.news.nate.com/view/20110322n04902?mid=s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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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esday, March 22,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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