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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urday, November 2, 2013

그리스의 군대 운용을 배워간 아랍 arabs learn from greeks


동로마의 전술 이론은 중기병의 공격을 계속해서 유지하는데 있었다.

흔히 전투 대형은 전부 기병만으로 이루어졌다고도 할 수 있다.

965년 타르수스의 장벽 앞에서 니케포루스가 아랍인들에게 승리를 거두었을 때 채택한 대형도 그러했다.

철학자 레오 황제의 글에 따르면, 원칙적으로 기병대는 선봉 전투대와 제2선 지원대로 나누어졌고, 제2선 뒤에는 적은 수의 예비대가 있었다.

외부군 파견대는 양익에 자리잡고 측면을 치거나 자군의 측면을 보호하는 역할을 주로 수행했다.

이용 가능한 병력의 절반정도까지는 선봉에 배치되었는데, 전술 상황의 변화나 양익의 상황에 따라 여러 겹으로 배치되었다.

총사령관은 매우 정상적인 경우엔 제2선에 자리잡았다.

선두 대열 사이엔 빈 공간이 없었다. 제2선엔 세 군데의 공간이 있어서 선두가 퇴각할 경우 그곳으로 빠져나갈 수 있도록 안배했고 ,각 대열은 10겹으로 심층배치되었다.

 

전술적 배치는 당연히 다양한 방법으로 이뤄졌다.

주로 보병으로만 이루어진 슬라브족이나 프랑크족을 상대할 경우 흔히 보병과 기병의 합동 작전을 펼쳤고, 대규모 아랍인들의 침략에 맞설 경우에도 그랬다. 그경우 보병은 중앙에 위치했고, 기병은 양익에 예비대로 배치됬다.

스쿠타투스는 보병의 중앙에서 싸웠고, 궁수와 투창병은 양익에 주로 포진해 중앙이나 측면에서 달려드는 적들을 먼저 맞이해 섬멸했다. 적이 기병공격을 먼저 가할 것으로 예상되면 경장 부대는 스쿠타투스 뒤로 퇴각했는데, 그건 오멘이 말한 것 처럼, 1000년후 16,17세기의 보병이 창병 뒤에서 엄호를 받는 것과 똑같은 이치라 한것과 같다.

공격시엔 보병이 두 개의 대형으로 싸운 반면, 수비시엔 그들 진지 근처에 하나의 대형으로 밀집해 싸웠다.

그러나 동로마 군대는 어떤 상황에서도 예비대가 없이 하나의 대형으로 합쳐서 싸우는 무모한 짓은 결코 하지 않았다.

구릉 지대나 산길에서, 기병이 사용될 수 없을 경우 보병은 초승달 대형으로 배치되었다. 스쿠타투스가 중앙에서 적을 저지하는 사이, 경장부대는 적 측면 높은 지대에서 빗발처럼 무기를 퍼부었다. 만약 적이 퇴각할 경우 매복된 병사들이 적의 후열과 예비대를 먼저 공략히 퇴로를 차단하거나 기병대를 이용해 적을 섬멸했다.

 

동로마 군대는 중세 유럽군 최강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나고 무장도 대단했지만 그들은 눈부신 전투를 보여준 경우가 거의 없다.

그것은 그들의 전략이 주로 대규모 공격보다는 대규모 공격에 의한 방어전술에 초점이 맞춰져있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완력보다는 두뇌로 전투하기를 좋아했다고도 말 할 수 있다.

동로마의 황제인 콘스탄티누스는 동로마의 전쟁은 외교와 스파이로써 시작한다고도 말한 바 있다.

일단 그들의 군대는 사방이 적으로 포위된 상황이었다.

그러기에 그들은 항상 효율적으로 움직이고 경계를 단단히 해야했으며, 그러기에 그들은 국경지대에서의 승리가 상당히 보장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과제가 주로 국경수비고 대규모 침략은 그리 많지 않았기에 그들의 전투에서 영웅무담을 듣기 어렵다.

 

하지만 동로마군이 예외적으로 공세적인 적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9~11세기에 이어진 약 150년 가량의 전성기였다.

 

그건 나중에 차차 말하기로 하자.(혹은 바실리우스2세나 마케도니아 르네상스라고 검색하길 바란다.)

 

동로마 군대는 당대 유럽이 전쟁한 방식과 전혀 다른 방식을 취했고, 아랍인들이 역시 그들의 전술과 규율을 배워갔다.

그들은 최소한의 희생으로 최대의 승리를 얻으려 했고, 그럼으로 기사도 정신이나 격렬한 용기는 그들에게 그렇게 좋은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정리되고 입증된 규범에 따라 움직이고 판단하고 싸웠으며, 그렇게 승리를 유도해냈지, 승리를 단번에 만들지 않았다.

동로마의 군대는 의아하게 직업군이었으며 그러기에 직업적 긍지를 가졌고 다분히 열정까지 지녔지만 힘보다 기술을 높이 평가했고 매복이나 야간공격을 선호했다.

그것이 최고의 승리를 보장해주는 가장 확율이 높은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전투를 하기전에 외교와 이간질 속임수를 통해 적들의 분열과 쇠퇴를 조장했으며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상황을 만들고 전투에 임하기에 능했다.

하지만 그들은 약속한것을 어기는 나약한 자들이 아니었으며 포로에게 관대했고 속임수는 엄격히 전략전 수단으로써 활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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