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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urday, February 1, 2014

백제성씨 스즈키는 일본의 최다 성씨


2005.09.01 통권 552 호 (p424 ~ 437)
[열도의 한국혼 ⑨]

6년 학력의 대문호 김달수 下
문학으로, 고대사로… 신음하며 써내려간 ‘뿌리’ 이야기
 

1974년 여름, 대마도에서 현해탄 너머 고향을 바라보는 김달수(왼쪽)의 모습. 이 사진을 촬영한 이진희 교수는 “짙은 안개 때문에 한국이 보일 리 없다고 만류했지만 김달수가 기어코 고향 땅을 봐야 한다고 고집했다”고 말했다.

그래서 전국을 돌기로 하고 20년간이나 답사여행과 집필에 몰두했다. 그도 그럴 것이 동포만이 아니라 일본 사람들이 더 뜨거운 반응을 보이고, 편지로 한반도 관련 지역이나 설화를 제보하고 도와줬다. 취재비용도 대고 밥과 술을 사주면서 “꼭 확인차 다녀가시라”는 초청도 많았다. 교토(京都)에 취재 갔을 때는 한 일본인 의사가 “한국에서는 일제 지배 36년을 말하지만, 고대 일본은 통째로 한국의 식민지였지 않습니까”라고 말해 감격하기도 했다.

일본의 지명이나 유적에는 한반도 도래문화의 흔적이 숱하게 남아 있다. 고려신사는 간사이(關西) 규슈(九州) 지방은 물론 도호쿠(東北) 지방에 이르기까지 없는 데가 없었다. 오사카의 백제천(川) 백제역(驛) 백제왕신사도 그대로 남아 있어 가보았다. 오사카 중심지 신사이바시(心齊橋)는 신라교(橋)가 변한 말이다. 오사카 안에도 백제군이 있었는데, 그곳이 기이하게도 일제 강점기 이래 한국인이 밀집해 사는 이쿠노구(生野區) 지역이다. 남(南)백제 소학교도 있고, 오사카에는 백제교(橋)도 있다. 규슈에도 백제천(川) 백제촌(村)이 있고, 도호쿠 지방의 아오모리(靑森)에는 신라신사가 있다.

도쿄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쯤 내려가면 닿는 야마나시(山梨)현의 80%가 나카고마군(中巨摩郡), 가미(上)고마군, 시모(下)고마군으로 되어 있는데, 여기서의 ‘거마(巨摩)’는 바로 고마(高麗)가 변한 것임을 일본 고문헌을 통해 확인했다. 야마나시현 옆의 나가노(長野)현은 야마나시와 더불어 일본에서 손꼽히는 산악지방이다. 평야가 좁고 농지가 드문 곳인데도 반도 사람들이 스며들었다. 거기에 고구려의 도래인 케루(卦婁)씨가 정착해 스즈키(須須岐·鈴木)로 성을 바꿨다.

스즈키는 일본 최대 인구의 성씨다. 괘루(卦婁) 상부(上部) 하부(下部) 후부(後部) 같은 고구려 왕족의 성을 갖고 있던 도래인들이 일본 조정에 성을 바꿔 달라고 청원해 스즈키 같은 성을 받았다는 기록도 찾아냈다. 최대의 성씨는 역시 반도계 혈통이기에 그렇게 많아진 것이다.

“김달수의 주장은 당시로서는 코페르니쿠스적인 발상의 전환이었다. 황국사관과 한반도 멸시 감정에 빠져 있던 일본인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에는 ‘한국 이름’으로 교수도 공무원도 할 수 없던 시절이다. 그런 가운데 김달수가 일본의 고대 문헌과 일본인의 저술을 근거로, 일본 사람이 고유의 것으로 여기는 것을 도래문화라고 하니 쇼크일 수밖에 없었다.”(이진희 교수)

고대 일본인의 성씨는 모두 지명에서 비롯했다. 도쿄 동남쪽의 가나가와(神奈川)현의 하타노(秦野)시는 ‘바다(하타로 전이)’를 건너온 도래인 마을이었다. 그처럼 고대 일본의 최대 성씨요, 실력자의 상징인 하타(秦)라는 성씨가 도래인 가계라고 하는 것은 일본 학자들이 정리한 문헌에 나와 있다. 김달수는, 규슈의 하타씨가 서기 702년경 도요구니(豊國·현재의 오이타 부근) 인구의 97%를 차지했다는 기록도 발굴해 글로 썼다.

“한국이 일본을 만들었다”

김달수가 답사여행을 통해 추정하는 한반도에서의 도래 루트는 첫 번째가 역시 규슈의 후쿠오카(福岡) 지방. 한반도 남서해안의 해류가 그쪽으로 흘렀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루트로 들어간 사람들이 세토나이카이 시코쿠(四國) 지방을 거쳐 오사카 교토에 터를 잡은 것이 야마토(大和) 정권이라는 것이다.

두 번째 루트가 일본 혼슈(本州)의 서쪽 해안. 한반도를 바라보는 니가타(新瀉) 쓰루가(敦賀) 방면이다. 동해안의 해류가 이곳에 닿기 때문에 고구려와 신라 사람들이 여기로 표착하고 새 삶의 터전이 됐다. 김달수는 니가타 해변에서 주어 ‘포항 제5 영정호’라는 그물 부표(浮標)가 바로 해류의 증빙이라며 보물처럼 보관하고 있었다. 이 루트로 온 고구려 신라계 사람들은 육로로 남진해서 교토 나라 같은 긴키(近畿) 기내(畿內)로 흘러갔다. 이중 일부가 나가노나 야마나시 산중까지 진출했다.

세 번째 루트가 혼슈의 북부 해안. 두만강 하구에서 배를 타고 떠나면, 아오모리 지역의 해변에 표착하게 된다. 김달수는 동북부 지방에서 한반도 관련 유적이 대거 발견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보았다. 그는 한반도 사람이 “일본을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한반도 도래인들은 일본의 고대 원주민을 남북으로 내몰고 그들만의 세상을 만들었다. 그들은 철기와 볍씨를 갖고 갔다. 그것은 미개한 열도에서, 지금 세상의 원자폭탄보다도 위력적인 것이었다.

유명한 고야마 슈조(小山修三) 교수와 도리이 류조(鳥居龍藏) 박사가 과학적으로 추출한 것이지만, 조몬(繩文·즐문토기에서 나온 말)시대의 일본 인구가 최대 26만명, 말기에 줄어들어 7만5000명 정도였다. 8000년 동안 그렇게 지속되던 인구가 벼농사기의 야요이(彌生) 시대가 되면 갑자기 59만4000여 명으로 늘어난다. 한반도에서 볍씨를 가져간 도래인들이 농사를 짓기 시작해 제대로 된 식량공급이 가능해지면서 수렵 어로채취 생활을 하던 열도가 변화하게 된 것이다.

대량으로 도래한 이주민들은 원주민을 북해도와 오키나와로 몰아내고, 규슈를 중심으로 농경문화를 꽃피우고 고대국가의 형태를 갖추게 된다. 그들이 손에 쥔 철기문화는 원주민의 어떤 대항무기도 제압할 수 있는 신형 과학병기였다.”(1991년 7월, ‘한국일보’ 문창재 특파원과의 인터뷰에서)

김달수는 휴머니스트다. 고국을 버리고 민족을 등진 ‘일본인 장혁주’에 관한 애잔한 뒷얘기가 그의 책에 담겨 있다. ‘일본 속의 조선문화’ 고려신사(高麗神社) 부분에 등장한다. 공교롭게도 일본인이 된 장혁주가 거기 살고 있었다.


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shin/2005/09/09/200509090500024/200509090500024_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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