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rch This Blog

Saturday, February 1, 2014

일본 천황은 백제왕이다


일자인대형왕(日子人大兄王 ; 562~598) ; 백제 무왕

 


[일본서기]에서 민달천황과 식장광희의 아들로 기록된 일자인태자(日子人太子; 562~598)는 오시사카히로히토대형(押坂彦人大兄)이라고도 표기하는데,서명천황(舒明天皇)의 부왕이다.

다른 이름으로는 마려고왕(麻呂古王)이라 했는데 수왕(首王), 태자라는 뜻이며 이는 구주 다리백제의 태자다. 안한천황부터 마려고왕자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일자인대형왕의 모후인 식장광희(廣姬)는 식장진수왕(息長眞手王)의 딸인 흑랑녀가 계체천황의 아들인 아두왕(阿豆王)과 낳은 딸이라고 전한다. 아두왕이 데릴사위가 된 것이다.

식장진수왕의 첫딸 마적랑녀(麻績郎女)는 계체천황의 비가 되었고 507년에 서거했다. 식장광희 역시 식장진수왕의 딸로 전해졌지만 실상은 식장진수왕의 외손녀다.

식장광희릉(息長廣姬陵)은 비파호 동쪽인 시가현 미원시(滋賀県米原市村居田)에 있고 전장 60m의 전방후원고분이다. 부근에 식장천(息長川)도 있다. 이 고분은 후대에 세워진 것이다.

 

나라현의 주성산(珠城山) 1호분에서 실제 식장광희(541~594)의 석관이 발견되었다. 백제대정과 가까운 곳이다.

광희는 [일본서기]에 기록된 민달4년, 574년에 서거하지 않고 그후에도 20년을 더 살았다.

[흠명천황기]에서 석희, 소석희의 아들, 딸들은 대개 일본 다리백제의 황자들이었다.

[민달천황기]에서 민달천황과 광희(廣姬)의 아들인 일자인태자(562~598)는 그 아들이 백제왕이라고 하였다.

 

1985년 법륭사 서쪽 등노목고분(藤ノ木古墳) 안에서 일자인대형왕 부부 이름과 서거일이 쓰여진 석곽과 유물이 발굴되었는데, 만주 조양시의 선비족 말안장 형태 금장 마구와 불교식 문양 장식이 많고, 장식대도와 금동관, 금동 신발 등이 발굴되었다.

이는 만주 요녕성 대릉하 중류 조양시 선비족과도 교류가 있었던 백제 왕실의 고분이다.

고분의 마구 장식은 무척 화려하다.http://inoues.net/ruins/ikaruga.html

 

598년 11월 26일 일자인대형왕은 37세로서, 부부였던 34세 소화전왕(小和田王, 민달천황과 추고천황의 딸로 추정)과 동시에 죽었다.

순장을 해도 같은 날에 죽지는 않는다.

태자 부부의 참사는 커다란 사건인데 [일본서기]나[추고천황기]에 아무 기록이 없고 법륭사 옆에 부부의 합장 석관만 남아 있다.

그러나 합장된 석관 안에서는 석관 기록과 다르게20대 남자의 펼쳐진 유골과 구석에서 20대 남자의 유골편이 나왔다. 석관 기록의 부부 생년 기록과 도무지 맞지 않으므로 일자인대형왕 부부가 장수축원의 의미로 허묘(虛墓), 허관을 만들어놓고 멀리 떠난 것이라고 보인다.

허묘 이외의 경우에는 암살이나 화재 등 사고라도 일자인태자 부부 나이에 걸맞는 남녀 유골 쌍이 들어있었을 것이다.

일자인태자 부부가 떠난 후에 일자인태자 후손이 빈 고분을 사용하게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일자인대형 등노목고분 금관 복원품, 그가 백제왕인 것을 유물로서 드러내고 있다.

 

 


법륭사 등노목고분 가형석관(家形石棺) 벽면에 “일자인대형왕관”, “소화전왕관”이라고 두 줄로 적히고 반대쪽에는 서거일과 서거 당시 두 사람의 나이가 적혀있다

 

 


일자인대형 등노목고분 출토품

 

[신찬성씨록]에서 대원진인(大原真人) 씨족은 민달천황(敏達天皇;538~585)의 손자인 백제왕(出自謚敏達孫 百濟王也)의 후예이라 하였다.

[일본고승전요문초(日本高僧伝要文抄)]에서는 대원씨가 바로 일자인대형왕의 후예라고 하였다.

『日本高僧伝要文抄』所引の「音石山大僧都伝」は平安時代初期の元興寺僧明詮の伝記であるが、その冒頭に「和上諱明詮。俗姓大原氏。左京人。彦人皇子(=일자인태자)之後也。祖弾正尹従四位下桜井王。天平十一年賜姓為大原氏。

위에 두 기록을 종합하면 일자인태자의 아들이 바로 백제왕이고 그 후손이 대원진인이다.

 

일자인태자의 아들 백제왕에 대하여서 [신찬성씨록]에서는 “백제친왕(百濟親王)”이란 말도 동시에 사용하였다. 이 백제왕은 일자인대형왕의 아들인 서명천황의 형제이기 때문에, 백제친왕(親王)이라는 호칭이 사용될 자격이 있다고 한다.

백제친왕의 후예는 대원진인(大原眞人)을 비롯하여 도근(島根)진인, 풍국(豊國)진인, 산어(山於)진인,길야(吉野)진인, 지상(池上)진인, 상전(桑田)진인,해상(海上)진인, 청원(淸原)진인 등으로 일본 곳곳에 퍼져있었던 것이 [신찬성씨록]에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이 백제왕의 활동 시간과 활동 범위가 매우 넓었다.

진인(眞人)은 신라의 진골(眞骨)과 같은 왕족의 의미로 고려된다.

아마노 누나하라오키노 마히토(眞人)노 스메라모미코토 (天渟中原瀛真人天皇)라고 칭호를 했던 천무천황도 진인(眞人)이라 하였다. 천황의 아들이 아니라 천황의 손자였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서명천황의 친아들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백제왕의 후예인 대원씨(大原氏)는 비파호 동쪽인 근강국(近江國) 미원시(未原市) 사카다(坂田)에 살았는데 상다라(上多良), 중다라(中多良)의 마을 이름을 보면 이들이 다다라씨(多多羅氏)와 일족인 것을 알 수 있다. 미원시 다라라는 식장광희의 고분이 새롭게 세워졌던 곳이다. 대원(大原)의 고대 발음이 지금처럼 “오하라”가 아니라 당시 “다하라”여서 다다라의 한자식 표기였을 수가 있다.

 

일자인태자는(562~)은 누가다(糠手姬; 569~664)공주와 결혼하여 서명천황(593~641)을 낳았다. 누가다황녀(糠手姬皇女;민달천황의 딸)의 고분은 서명천황 고분과 가까이 오시카(押坂, = 忍阪) 구릉에 묻혀있다. 누가다(糠手姬; 569~664)공주는 다카라왕(寶王)이라고도 불렀다.

일자인태자와 누가다황녀는 또 중진왕과 다라왕(多良王)을 낳았다.

다라왕의 후손이 대원진인인 사실은 그 후손인 대원씨의 고향 지명으로서 확인되므로 다라왕이 백제왕인 것을 알 수 있다.

日子人太子娶庶妹田村王,亦名糠代姬命.

此生之御子,日後為舒明天皇,乃坐岡本宮治天下之天皇.

次之子,中津王.

又次子,多良王.并此三王者,凡日子人太子與田村王之子也.

 

백제를 일본에서 구다라라고 읽는 것은 바로 이 다라나 다리라는 지명과 관련되는 것이다.

즉 일자인대형왕 아들로서 백제왕은 다라왕이었다.

또한 다라왕은 백제 의자왕이기도 하다.

그래서 다라왕보다는 백제왕 후손이라고 한 것이다.

 

나라현 법륭사 부근 일자인대형왕 고분 가까이에 용전신사(龍田神社)가 있다.

대화조정 성덕태자는 용전신사를 먼저 세웠고 그 다음에 법륭사(607년)를 세웠다고 알려졌다. 일자인태자 고분이 먼저이고 효덕천황비인 간인황후 고분은 나중이다.

천무천황은 대해인천황(大海人天皇)이라 하였는데 구주 해부(海部)와 관련되며 즉위해서 용전신사의 남, 녀 용신(龍神)에게 해마다 제사지냈다.

용전신사의 주제신인 남녀 용신이 바로 일자인태자 부부이며, 백제로 떠난 무왕 부부가 된다.

 

[삼국유사/왕력(王歷)]에서 무왕의 어릴 때 이름을 일기사덕(一耆篩德)이라고 했고, 백제 무왕은 지변(池邊), 즉 연못가에 살던 과부가 용(龍)을 통해 낳은 아들이라고 하였다.

일자인태자의 별명은 마려고왕(麻呂古王)인데, 안한천황이 처음으로 마려고왕이라고 했었고 이는 구주 백제왕의 호칭이었다. 마(麻)려고(고=왕)라는 발음이 백제 무왕의 아명인 서동(薯童)과도 연관된다. 고대에 서동(薯童)은 마동이라 읽었을 것이다.

 

무왕과 신라 선화공주의 황금 발견 전설은 마나장자 창황제와 가야공주 옥진희의 황금 발견 전설의 반복이기도 하다.

따라서 용의 아들이라는 백제 무왕 여장(餘璋)은 사가라용왕 장황제 여장(餘璋)왕의 손자로 추정된다.만일 아들이면 이름이 똑같지 않을 것이나 손자면 이름이 같을 수 있다.

식장광희(541~)는 백제 성왕의 어린 후비였을 수도 있다.

일찍이 경도 미원시 식장천에서 태어나 백제로 시집왔다가, 성왕을 구주 이나사산에 묻을 때 귀국해서,구주의 마나장자궁에 살다가 다리백제 장황제의 일자인태자를 낳고,

민달천황이 인질을 마치고 대화조정 천황으로 즉위할 때에, 일자인태자와 함께 대화조정에 갔다가 손자인 서명천황을 돌보며 대화조정에 남아서 여생을 마쳤을 것으로 고려된다.

 

백제 무왕은 본래 구주 중진시(中津市) 기산(耆山)나한사(羅漢寺)에서도 살았다고 보여진다.

이웃한 우좌시의 용왕산 용왕궁과 가깝다.

나한사는 645년에 세워졌는데 백제 무왕의 사후에 그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것으로 보인다. 이는 또한 645년경에는 구주의 본토 백제 직할령과 다리백제의 구주 영토가 통합되었을 가능성도 의미한다.

 

의자왕의 태자 륭(백제 본토 출생?)은 615년생이지만 의자왕의 또다른 아들인 백제왕선광(善光, 禪廣;601~687)은 601년생이다. 그러면 조부가 되는 백제 무왕은 570년 이전 생이 되는데, 바로 일자인태자(562~641)가 백제 무왕인 것이다.

백제 무왕은 임중황제 곁인 중진시 나한사에서 출가하여 수행하고, 587년부터 598년까지 대화조정에 있었고, 신라를 살피다가 선화공주를 얻어 본토 백제로 갔다가 599년 혜왕의 서거, 600년 법왕의 서거로 인해 본토 백제왕으로 즉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법왕은 살생을 금했고 신라와도 화친을 원하여 일본에서 건너올 때에 신라공주를 데려온 무왕을 후계로 정했을 법하다. 무녕왕의 후손이기에 무왕이라는 시호를 올렸을 것이다.

 

역시 민달천황과 춘일노녀랑녀(春日老女子郎女)의 아들로 기록된 난파왕(難波王)과 상전왕(桑田王),춘일왕(春日王) 형제는 난파 대별왕이었던 성덕천자의 아들들로 추정된다.

그런데 능비에서보면 난파왕이 561년생, 춘일왕이557년생으로서 형제 순서가 반대다.

이중 난파왕 고분은 전장 100m에 가까운 전방후원분이며 고시봉총(古市峯塚) 고분이다.

이들 역시 민달천황의 아들들이 아니라서 [고사기]나[일본서기]의 기록 순서가 잘못된 것이며, 실제는 서성국 성덕천자의 왕자들이거나 다리백제 장황제의 아들들로 추정된다.

난파왕의 아들 율외왕(栗隈王)이 훗날 큐슈 축자의 우두머리가 된다.

 

광릉정 백제대정 동남에 오사다궁(譯語田宮; 櫻井市 春日神社)이 있고, 그 동쪽에 일자인태자의 오시카(忍阪)가 있다. 민달천황 사후 586년 물부수옥대련과 전쟁을 치르면서 일자인대형왕이 수파궁에서 안전하게 오시카(忍阪)로 옮겨간 것으로 보인다.

일자인태자는(562~598)은 누가다(糠手姬; 569~664) 공주와 결혼하여 서명천황(593~641)을 낳았다. 누가데황녀(糠手姬皇女;민달천황의 딸)의 고분은 서명천황 고분과 가까이 오시카(押坂, = 忍阪) 구릉에 묻혀있다.

 

일자인태자의 아들 백제친왕 다라왕도 이곳 오시카에 살았을 것이다.

그런데 의자왕의 아들로서 태자 륭(615~)보다14세가 많은 백제왕선광(601~687)의 존재는 의자왕이 일본에 먼저 살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의자왕의 의자(義慈)를 일본식으로 읽으면 오시(押,忍)가 되니 역시 백제궁이 있던 오시카(押阪)를 의미한다.

따라서 일자인태자이자 백제 무왕의 아들인 의자왕이 일본에서 태어나 부왕을 대신하여 대화 조정 오시카에 살 때에 백제왕, 다라왕, 오시왕으로 불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자인태자는 또 한왕지매(漢王之妹)인 대오왕(大吳王;564~643)과 결혼하여서 지누왕(茅渟王;589~633)을 낳았다고 하였다.

대오왕이 낳은 지누왕((茅渟王;589~633)은 훗날의 세농황제(世農皇帝)다.

서명천황(593~641)은 지누(茅渟)왕과 길비도희왕(吉備島姬王)의 딸인 황극천황(594~661)과 결혼했다. 황극천황에게는 동모제(同母弟)인 효덕천황(596~654)이 있었으니, 효덕천황도 세농황제의 아들이다.

 

592년 나라현에 한국신사(漢國神社)가 생겨났다.추고 원년(592년) 2월에 대신군백제(大神君白堤)에 의해서 원신(園神)을 모시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한국신사의 옛이름이 사카오카(狭加岡-神社)신사였다고 하고, 원신은 원한신(園韓神)이라고도 하는데“소노가라”신이라 읽는다. 즉 쇠가라, 사가라와 관련된다. 사카와 소노가라가 같은 의미이니 쇠가라를 의미한다. 대신군백제가 한국신사에서 모시던 소노가라신(園韓神)은 바로 사가라용왕이었던 창황제(倉皇帝)로 고려된다.

사카오카(漢國神社) 신사를 세운 대신군백제는 백제의 대신왕이라는 뜻인데, 다리백제 승황제가 세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592년에 다리백제는 한국(漢國)이라는 칭호도 있었다.

 

597년 아좌태자가 대화조정으로 갔다.

五年夏四月,丁丑朔, 百濟王 遣王子 阿佐 朝貢.

 

600년 신라와 임나가 서로 싸웠다.

다리백제 아황제는 임나를 구하려고 원정군을 보냈다.

경부신(境部臣)을 대장군으로, 호적신(穗積臣)을 부장군으로 하였다.

호적신은 규슈에 있던 백제 임나4현의 다리국수(多利國守) 가문이다. 따라서 이는 구주다리백제 기록이다.

八年春二月,新羅與任那相攻.天皇欲救任那.

是歲,命境部臣為大將軍,以穗積臣為副將軍.並闕名.

전쟁결과는 별무소득이었다. 이듬해 본토백제와 신라간 대전이 기록되었는데 신라가 승리했다.

당시에 특기할 것은 임나의 6성 이름이다.  

다다라(多多羅, 창원 탁순 탁다라), 소나라(素奈羅,속가야 = 아나가야), 비지귀(弗知鬼, 창원), 위타(委陀, 탁국 웅천 왜성), 남가라(南迦羅, 거제도), 아라라(阿羅羅, 김해) 등이다.

 

601년 아황제는 간우다(願轉)로 개원하였다.

선광사연기(善光寺縁起)에 간우다(願轉) 연호 기록이 있다.

推古天皇御宇願轉二年壬戌四月八日 善光自奉負如夾下向信濃国

선광은 570년에 난파에서 불상을 발견하여 572년경 신주에 원선광사를 세우고 불상을 안치하였다. 그후 현재의 선광사로 옮겼는데 위는 602년 새 선광사로 옮긴 때를 가리키는 기록이다.

선광은 혼태선광(本太善光), 혹은 혼다(本田), 혼다(本多)의 성씨로 전해졌다.

혼태선광은 신농국 사람이라 하였지만 본래는 다리백제 왕자일 것으로 추정된다. 선광사도 잦은 화재로 인해서 많은 기록을 잃었을 것이다.

 

605년에 광원(光元)으로 개원하였다.

推古天皇光元二年丙寅皇 (奈良県高市郡明日香村 橘寺 / 橘寺縁起)

605년에 마나장자 장황제가 서거하였다. 광원은 장황제 서거후 지은 연호가 된.


http://m.blog.daum.net/_blog/_m/articleView.do?blogid=0aOrr&articleno=20


No comments:

Post a Comment

Blog Archi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