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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dnesday, March 20, 2013

일본인은 충청도 사람이 건너간 것이다.

선사시대의 한일문화교류 2

한국사 이야기|2006.02.26 16:27


선사시대의 한일문화교류
1. 구석기 시대
  조선반도와 일본 열도의 구석기문화에는 비슷한 점이 몇 가지 있다.
  먼 저 후기 구석기 시대의 사람들은 하천 주변에 주거를 정하고 살았다. 제천 창내 유적에서는 집터 흔적이 발견되었는데 그곳에서는 기둥구멍(주혈), 석기제작소, 화덕자리 등이 발견되었다. 이와 같은 흔적은 일본에서도 발견되고 있는데 이들 거주지에는 3-4명정도가 거주할 수 있는 원추형의 움집이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둘 째 한반도와 일본의 후기 구석기 시대 사람들은 매우 활발히 석기를 제작하였다. 한국의 대표적 유적인 단양 수양개 유적에서 출토된 석기 중 하나는 슴베찌르개인데 이것은 사슴 뿔 등을 이용해 눌러떼기의 수법으로 만든 수렵도구로 이와 비슷한 것이 일본 큐슈지방에서 다량으로 출토된 것으로 보아 두 나라의 구석기 문화의 연관성 내지 유사성을 추정할 수 있다
  이와 같이 후기 구석기 시대의 집터나 석기에서 유사성이 발견되는 것은 당시 양 지역이 얼음으로 덮여 있어 사람들의 왕래가 가능하였기 때문이다
    
2. 신석기 시대
  한 반도의 신석기 시대 유적지는 대략 400여군데이다. 그중 신석기 초기유적으로 추정되는  제주도 고산리 유적의 화산재층은 흑요석의 성격이 일본의 아까호야 화산재층과 거의 유사한 것으로 밝혀졌으며 강원도 양양 오산리에서 발견된 융기문(덧무늬)토기는 일본 후쿠이 동굴에서 발견된 융기문 토기와 연대나 모양 면에서 서로 비슷해 한일간의 교류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강원고 고성군 문암리 유적에서 다량으로 발견된 토기는 일본의 죠몽토기를 닮은 것으로 일본과의 교류가 남부지방뿐만 아니라 강원도 지역에서도 있었음을 보여준다.
  반 대로 한반도 신석기 시대의 대표적인 토기인 빗살무늬토기는 일본의 죠몽토기의 하나인 소바타식 토기의 성립에 영향을 주었고 그것이 오키나와까지 남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빗살무늬토기의 무늬는 부산쪽으로 가면서 가는 무늬(세선문)에서 태선문으로 변화하는데 이러한 무늬의 토기는 규슈지방에서도 발견되고 있으며 반대로 동삼동 패총에서는 죠몽토기 양식의 토기가 발견되고 있다. 또한 통영 상노대도 유적에서 발견된 흑요석제 미늘이나 화살촉은 일본에서도 발견되고 있으며 동삼동에서 발견된 조개가면과 비슷한 방식의 것이 일본에서 발견된다. 남해안 일대에서는 다량의 흑요석 석기가 출토되었는데 이들 가운데 일본 규슈 사가현 요악산 흑요석으로 만든 석기들이 가끔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한일간에 석기의 물물교환이나 기술교류가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석기 시대에는 어로활동도 활발하였는데 강원 양양 오산리에서 출토된 결합식(이음식) 낚시도구는 다랑어 등 먼바다나 심해에서 잡히는 물고기를 잡기 위해 사용되었으며 이러한 도구는 역시 일본 규슈지방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3. 청동기 시대
 청동기시대의 한일 문화 교류는 거의 한반도에서 일방적으로 전파된 양상을 보인다. 일본에서는 bc4세기경 신석기 문화, 즉 죠몽 문화를 대신하여 한반도에서 건너간 도래인에 의해 청동기문화, 즉 야요이 문화가 꽃피우게 된다.
  야요이 문화는 청동기와 철기의 전파, 수전 도작의 전파, 집락구조의 유사성을 통해 한반도에서의 영향을 찾아볼 수 있다.
  한 반도의 경우 BC10세기경에 청동기가 전래되고 BC4-3세기경에 철기가 전래된 것과 달리 일본은 기원전 4세기경에 청동기가 전래되고 거의 동시에 철기가 전래되었다. 그 전파지역은 한반도에서 가까운 규슈지역 특히 후쿠오카가 중심이 되었다. 이시기의 유물로는 반달돌칼 유구석부 마제석검, 마제석조 홍도 등이며 특히 세형동검은 몸체와 칼날이 분리된 조립식으로 중국이나 시베리아계가 아닌 한국계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 밖에도 동모 동과 동탁 동경 등이 발굴되어 타 지역과의 교류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벼농사는 중국 양자강쪽에서 산둥반도를 지나 한반도를 거쳐 규슈지방으로 전파되어 양 지역에서 본격적인 농경사회를 성립시킨 것으로 보인다.
  일 본에서 발견되는 마제석검이라는 농기구는 한반도에서 출토되는 석기군과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또 일본의 대표적인 초기 벼농사 유적인 후쿠오카현 이타즈케 유적은 수로, 방죽등의 관개시설이 만들어져 있어 고도의 기술을 가진 체계적인 것이었는데 이들 기술도 한반도에서 전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타즈케 유적의 발굴 결과 높은 지대의 집터에서는 청동 등 금속제 유물이 발굴되어 군장이나 제사장의 거주지로 추정되었으며 낮은 지대는 생산자층이 거주한 흔적이 드러났다. 규슈의 요시노가리 유적도 비슷한 구조를 갖추고 있으며 이들 유적은 생산 공간과 생활 공간 무덤공간이 분리되어 있을 뿐 아니라 주변에는 이중 삼중의 방어벽을 설치해놓았다. 이들 유적은 울산 검단리나 부여 송국리, 진주 대평리 유적등과 유사하다.
  송 국리형 집터는 원형으로서 중앙에 2개의 기둥이 서있는 특이한 형태를 한 움집인데 이러한 형태는 일본에서도 발견되고 있으며 또한 한반도에 계보를 둔 무문토기도 발견되어 한반도인의 도래를 보여주고 있다. 이로 미루어 송국리형 주거집단이 대규모로 일본으로 이주하여 일본의 야요이 문화를 일궈냈을 것으로 추정되며 반대로 한반도에서 야요이 토기가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일본의 야요이 사람이 한반도로 이주한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이와 같이 선사시대와 청동기 시대에는 한일간에 정치적인 교류만이 아닌 일반 사람들의 빈번한 교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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