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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rsday, January 30, 2014

도요타없인 일본도 없다



족 경영진이 그룹의 구심점… 경영권 분쟁 한차례 없이 세계 최강 경쟁력 자랑 ‘도요타 없는 일본은 없다.’ 일본 기업 역사를 새로 쓰고 있는 도요타에 대한 일본의 기대다. 도요타는 지난해 일본 기업으로는 처음으로 순이익 1조엔을 돌파했다. 일본은 최근 도요타를 앞세워 경제 르네상스를 꿈꾸고 있다. 그렇다면 왜 도요타인가. 도요타의 경쟁력은 과연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 세계가 주목하는 도요타 경영의 본질을 분석해 시리즈로 연재한다. 필자 김태진 기자는 2003년 한해 동안 도요타의 본거지인 나고야의 나고야대학 국제경영대학원에서 객원연구원으로 활동하며 도요타를 집중 취재했다.<편집자>-
도요타 일가는 도요타그룹의 구심점이다. 그들의 영향력이 막강할 뿐 아니라 종업원의 충성심이 어떤 회사보다 높다.
도요타 일가는 도요타의 주식을 불과 수 퍼센트(3∼4% 정도라고 알려짐) 소유하고 있다. 그러나 도요타에 있어 도요타 가문이 갖는 의미는 오너로서의 영향력 행사보다는 사내의 파벌 다툼을 막고, 사원의 구심력을 높이는 ‘천황가’와 같은 존재라는 점에서 찾아야 한다. 도요타 가문이라는 존재가 있음으로 해서 학연이나 지연 등으로 얽혀 파벌 싸움하는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는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닛산의 경우 1980년대 후반부터 도쿄대 출신간의 파벌 싸움이 심화하면서 경영 에너지를 낭비해 파산 위기에 몰렸다.
그룹간 결속 강화 효과
일본에서 가장 잘 나가는 두 자동차 회사인 도요타와 혼다는 모두 창업자의 이름을 회사명으로 쓰고 있다. 두 회사의 창업 일가와 경영방식을 비교해 보면 대조적인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도요타는 도요타 일가가 경영 멤버로 참가하고 있는 데 비해 혼다 일가는 일절 경영에 관여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도요타의 경우 도요타 일가 이외에 90년대 중반 이후 오쿠다·조 등이 잇따라 사장 반열에 오르고 있지만 현 도요타 쇼이치로 명예회장의 장남인 아키오(章男, 현재 중국·아시아 담당 전무)에의 ‘대정봉환’(大政奉還)이 언론이나 사내에서 공공연히 거론되고 있다(대정봉환은 1867년 당시 지배 세력이었던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 막부 정권이 싸움을 하지 않고 일본 천황에게 권력을 바친 것을 말한다).
현재 도요타 본사에는 아키오와 도요타 전 사장이었던 도요타 에이지(豊田英二)의 삼남인 도요타 슈우헤이(豊田周平)가 상무이사로 있다. 슈우헤이는 유럽 시장용으로 개발한 리터카 ‘야리스’(일본명 빗츠)의 개발 책임자다.
도요타 일가는 도요타 본사뿐만 아니라 계열사와 부품회사에도 흩어져 있다. 에이지의 장남 칸시로(幹司郞)는 도요타의 주요 부품업체인 아이신정기의 사장이다. 차남인 테츠로(鐵郞)는 현재 도요타자동직기의 부사장으로 그룹의 결속력을 다지고 있다. 창업 일가의 경영진 포진만 따져보면 국내 LG그룹과 비슷하다.
도요타는 그룹간의 결속 강화를 위해 오히려 도요타 일가를 적극적으로 등용하고 있는 셈이다. 문제는 무능한 일가 친족이 경영자가 되면 파산 등 비참한 결과를 낳는 것이 현대 경영의 교훈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도요타는 무능한 친족을 자연스럽게 도태시키는 경영시스템을 갖고 있는 모양이다.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빚었던 일부 대기업의 2세 승계와 달리 도요타 일가는 경영권을 놓고 단 한번도 싸운 적이 없다. 오히려 회사의 결속을 다지는 구심점이 되고 있다는 점은 눈여겨볼 부분이다.
도요타 일가도 족벌 승계라는 비판을 받은 적이 있다. 92년 도요타 에이지 회장이 명예회장으로 물러나고 쇼이치로 사장이 회장으로 승진하면서 그의 동생 타츠로가 후임 사장으로 취임했다. 당시 언론과 일부 도요타 임원들은 “도요타 성씨가 나란히 있는 것은 보기 좋지 않다”는 비판의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당시 에이지 명예회장은 “버블 경제 붕괴로 위기를 맞은 도요타에 강한 구심점이 필요하다”며 이 같은 인사를 강행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물론 부회장·부사장 등 전문경영인들과의 집단 지도 체제를 구축했다. 한국이라면 도요타는 ‘족벌 기업’이라는 언론의 지탄과 정부의 혹독한 감시를 받았을 것이다.
도요타 일가가 구심점을 확실히 유지하는 도요타에 대해 일본의 전문가들은 ‘고도성장기에 가장 적합했던 체제’로 평가하는 경우가 많다. 삼성과 도요타를 비교해 보면 오너의 강한 지배력과 비전 제시, 그리고 적기에 대형 투자를 통한 선순환 사업구조 등 비슷한 점이 많다. 삼성은 또 전문경영인이 오너회장을 잘 보좌하는 점도 비슷하다. 오너만큼 확신에 찬 경영을 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그러나 현재 세계 10여개국에 해외 공장을 갖고 10만명이 넘는 종업원을 거느린 도요타가 일족 지배로 다스려지기엔 무리라는 소리도 있다. 그러나 이는 도요타 일가 못지않은 전문경영인들이 훌륭히 보완해 냈던 것이다.
고도성장기 최적의 체제
이에 비해 혼다에서는 혼다 일가의 임원 취임은 아예 화제에 오르지도 않는다. 혼다 일가를 대하는 태도는 아예 냉담할 정도다. 혼다 일가를 회사 경영에 참여시키지 않는 것이 창업자 혼다 소이치로의 신념이기 때문이다. 소이치로는 이 때문에 ‘소유와 경영의 분리’라는 원칙을 만들어낸 일본 경영자의 시조로 꼽히기도 한다. 이러한 양사의 창업 일가에 대한 태도는 지극히 대조를 이루는 것이라 흥미롭다.
혼다의 경우 현재 소이치로의 장남 히로토시(博俊)는 모터스포츠와 자동차 튜닝 사업을 하는 주식회사 ‘무겐’(無限)의 대표이사다. 무겐은 혼다의 자회사였다가 90년대 후반 완전 분리했다.
지금은 혼다의 일개 거래처에 불과하다. 이 회사는 2001년 여름에 법인세법 위반, 이른바 탈세 의혹이 불거져 조사를 받다가 2003에는 히로토시가 탈세 혐의로 구속되는 시련을 겪기도 했다. 같은 창업가라 해도 도요타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는 것이다.
도요타와 혼다 창업자의 무덤은 두 회사의 사풍만큼 다르다. 도요타 일가의 무덤은 나고야 시내 카쿠오잔 닛타이지(賞王山 日泰寺)에 있다. 태국 국왕으로부터 기증받은 석가모니의 사리를 모시기 위해 메이지 37년에 건립한 일본 내 유일한 초종파의 국제적 사원이다. 필자도 이 사원에 가본 적이 있다.
절 자체의 외관과 시설은 대단히 훌륭하지만 도요타 일가의 무덤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작고 단아하다. 마치 도요타 일족의 결속을 나타내기라도 하듯, 높이 50㎝ 정도의 작은 비석이 질서 정연하게 나란히 서 있다. 주위에는 어른 키를 넘을 정도의 훌륭한 비석들이 즐비하다. 여기가 도요타 일가의 무덤이라고 누가 말해 주지 않으면 모를 정도다.
혼다 소이치로는 후지산 언저리 공원 묘지에 안장돼 있다. 바로 곁에는 도요타가 인수한 후지 스피드웨이가 있는 장소다. ‘혼다’라고만 적혀 있는 무덤은 의외로 크다. 창업자의 위대함을 그대로 무덤에 나타내고 있는 듯하다. 입구에는 내방객을 위한 돌로 만든 명함꽂이를 설치해 뒀다.
도요타 경영 상징하는 가족 무덤
두 무덤을 보면 두 회사의 차이가 그대로 나타난다. 도요타는 도요타자동직기 창업자인 도요타 사키치, 그의 장남 도요타 기이치로 등으로 이어지는 도요타 일가가 집단으로 도요타 회사를 지탱하고 있다. 도요타자동직기·아이신정기 등 그룹 계열사에 일족을 배치, 도요타 일가 집단의 위력이 그대로 무덤에서 느껴진다. 창업자 한 사람의 위력이 아니다.
앞으로 ‘도요타 출신자가 사장에 취임하느냐, 안 하느냐’가 화제에 오르는 것도 도요타 일족을 핵으로 단결력을 보여줬던 도요타의 역사와 사풍이 지속됐기 때문에 나오는 얘기일 것이다.
혼다는 창업자의 위대함만이 전면에 나와 있다. 지금의 혼다라고 하는 회사의 견실함과 혼다 일족과는 직접적인 연결이 없다. 혼다의 사장 인사에서 혼다 일가가 화제에 오르내리는 일은 단 한번도 없다.
소이치로 곁에는 후지사와 타케오라는 희대의 명보좌관(재무·경영 담당)이 있어 ‘세계의 혼다’라고 일컬을 정도로 성장했다. 하지만 여전히 혼다 소이치로 없는 혼다의 이미지란 상상할 수 없다.
2002년 혼다 소이치로의 부인이 살고 있는 도쿄 혼다 저택에서 사후 10년을 기념한 소이치로 동상 제막식이 있었다.
당시 소이치로의 미망인은 “이런 시원치 않은 사람을 존경한다고 동상을 세우냐”고 말했다고 한다. 소이치로는 혼다 일가를 경영에 참여시키지 않아 존경받고 있지만 한 가족의 가장으로선 존경받기 어렵다는 것이다. 장남은 소이치로 못지않은 뛰어난 기술자였다고 한다.
일족을 경영에 참가시키지 않겠다는 자신의 신념 때문에 가족과 지나치게 거리를 뒀다. 장남은 능력을 발휘할 기회조차 갖지 못했다고 한다. 오히려 소이치로의 아들이라 역차별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이런 점에서 도요타는 일가 집단이 효율적으로 경영에 참가해 구심점 역할을 하는 데 비해 혼다는 혼다 소이치로라는 걸출한 스타가 경영한 개인기업과 같은 성격을 띠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창업자 도요타 기이치로의 삶
대학 때부터 자동차 꿈 불태운 재벌 2세 패전 후 인원감축 책임지고 사장 물러나
“순수 일본의 두뇌와 기술로 만든 자동차를 만들겠다.” 도요타자동차의 창업자인 도요타 기이치로(豊田喜一郞·1894-1952)가 만든 창업 이념이다.
기이치로는 도요타자동직기를 창업한 도요타 사키치(豊田佐吉)의 장남이다. 사키치는 일본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나오는 유명한 발명가다. 전기를 이용한 방적기를 발명, 당시 수작업에 의존했던 방적 산업을 크게 일으켰다.
당시 도쿄대에 다니던 재벌 2세였던 기이치로는 1920년대 유럽과 미국의 자동차 업체들이 일본에 무혈 입성하는 것을 보고 자동차의 꿈을 불태운다. 자동차 산업에 대한 신념은 대학 졸업 후인 21년, 매부인 도요타 리사부로(豊田利三郞, 훗날 도요타자동차 전신 사장)와 함께 유럽과 미국의 산업시찰을 동행한 것이 계기가 됐다.
그는 자동차 시대가 올 것을 확신하고 35세 때인 29년 아버지가 발명한 자동직기 특허권을 영국 회사에 팔고 이 자금으로 본격적으로 자동차 산업을 준비했다. 다음해 도요타자동직기의 한 사업부로 자동차 연구소를 개설했다. 도요타자동차의 시발점이다. 36년 일본인의 손으로 만든 도요타의 첫 차 AA형이 나왔다. 다음해엔 자동직기의 자동차 사업부를 분리, 도요타자동차를 설립했다.
하지만 그의 인생은 수난의 연속이었다. 태평양 전쟁으로 44년 도요타자동차는 군수 공장으로 지정돼 트럭을 생산했다. 그는 “사람을 해고하지 않는 것이 경영자의 도리다”라고 입버릇처럼 말해왔다. 패전 뒤 심각한 디플레이션으로 회사가 어려워지자 노조와 “인원 감축은 절대 않겠다”는 각서도 썼다.
그러나 상황은 악화돼 49년에는 도산 지경에 몰렸다. 간신히 얻은 은행의 협조 융자 조건에는 대대적인 인원감축이 포함돼 있었다. 노조는 이에 반발해 파업에 돌입했고, 기이치로는 결국 책임을 지고 사장에서 물러났다.
그의 사임 이후 도요타직기에서 온 이시다 다이조(石田 退三)가 사장을 맡았다. 이시다는 한국전쟁 특수에 힘입어 도요타를 기사회생시켰다. 이듬해 연말 이시다의 대정봉환 권유로 사장에 다시 복귀하기로 결정됐지만 52년 3월 뇌일혈(58세)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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