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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day, January 31, 2014

일본인은 백제인의 후손이다

왜5왕(倭5王)의 정체, 그들은 과연 누구인가?

한미르  2013.12.24 19:25125.183.**.**

[흑치상지의 묘지석]

그 선조는 부여씨에서 나와 흑치(黑齒)에 봉해졌으므로 자손이 이것을 성으로 삼았다.

 

[흑치는 어디에 있는가?]

후한서 동이전 왜(倭)

여왕국(今 日本)에서 남쪽으로 4천여 리를 가면 주유국(朱儒國)에 이른다.

 이 주유국(朱儒國)은 사람들의 키가 3-4척 밖에 안 된다. 또 여왕국에서 남쪽으로 
배를 타고 1년 동안을 가면 나국(裸國)과 흑치국에 이른다. 역관들이 와서 전하는 
말에 의하면 아마도 여기가 끝인가 싶다.

 

[후왕으로 봉하여진 흑치씨와 왜씨(倭氏)]

"그 선조는 부여씨에서 나와 흑치에 봉해졌으므로 자손이 이것을 성(姓)으로 삼았다. " 
이것은 흑치상지의 묘지석에 나오는 기록이다. 이 기록에 따르면 흑치상지는 
백제인인데 그 선조는 백제 왕족으로서 그 성은 백제왕성인 부여씨였다. 그런데 
그 선조가 흑치국에 봉함을 받았기 때문에 그 성을 흑치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 
왜 5왕의 성(姓)이 왜씨(倭氏)인 것과 백제 무녕왕의 왕성이 화씨(和氏)인 것은 
비상한 관심을 끈다. 왕성이 화씨라는 것은 백제 무녕왕이 백제왕으로 등극하기 
전에 화(和=야마토)라는 지역에 왕(=侯王=擔魯)으로 봉함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그 시기는 백제 개로왕의 동생 곤지가 일본열도로 간 시기이며 또한 왜5왕의 
시기이기도 하다. 바로 여기서 무녕왕이 백제왕으로 등극하기 전 왜왕으로 있었다는 
추론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사실 왜5왕의 존재를 고사기나 일본서기에서 찾아볼 수가
없는데 바로 무녕왕이 왜5왕 중의 한 사람이거나 그와 관련이 있는 만큼 왜5왕에 대한 
연구는 백제 역사와 관련시켜서 연구를 해야 할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왜5왕 이후 
왜(倭)나 화(和=야마토)에 관련된 성씨는 일본의 고대 역사서에 따르면 무녕왕의 
직계자손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왜왕의 성씨는 왜씨(倭氏)] 왜(倭) = Yamato
중국 역사서 송서 열전 이만 동이 왜국

[원문]왜찬만리수공(倭讚萬里修貢)

[번역문]왜찬이 만 리에서 조공을 바쳐왔다.

[원문]진우구제정왜수등십삼인평서,정로,관군,보국장군호
      (珍又求除正倭隋等十三人平西、征虜、冠軍、輔國將軍號)

[번역문]진(珍)은 또 왜수(倭隋) 등 13人에게 평서, 정로, 관군,보국장군호를 제정하여 
        줄 것을구하였다.

 

[해설]송서 왜국전에 "진(珍)은 또 왜수(倭隋) 등 13인에게 평서, 정로, 관군, 보국장군호를 
제정하여 줄 것을 구하였다."는 기록을 보면 왜(倭)가 성씨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왜라는 성씨와 관련된 인물은 왜왕 무(武) 이후에는 중국 고대 역사서 왜인전(倭人傳)에서

찾아볼 수가 없다. 그런데 일본서기에서 무녕왕의 아들 사아군(斯我君)의 손(孫)으로 왜군(倭君)이

발견된다. 바로 이것은 부여씨인 무녕왕의 왕성(王姓)인 왜씨(倭氏)를 그 후손인 왜군(倭君)이

승계했다는 증거이다. 그런데 이 왜씨는 후세에 화씨(和氏)로 변개된다. 그것은 왜국이 그 국명을

부끄럽게 여겨 일본으로 바꾼 것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된다.

 

일본의 역사학자들은 왜5왕이 곧 일본서기에 나오는 천황이라고 여겨 왜5왕을 천황에 비정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매우 어려운 문제이다. 애써 왜5왕에 천황을 비정하여도 계보가 
서로 맞지를 않는다. 예들 들면 왜왕 제(濟)에 비정되는 윤공천황은 왜왕 찬(讚)에 비정되는 
인덕천황의 아들로 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는데, 중국 역사서 양서를 보면 찬의 동생이 미(彌)이고 
미의 아들이 제(濟)로 나와있다. 그러므로 일본서기의 천황과 양서의 왜5왕은 서로 계보가 다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바로 왜5왕으로 비정되는 일본서기의 인덕천황계 천황이 무열천황을 마지막으로
일본서기에서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무열천황은 포학무도한 천황으로 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다.  자, 그런데 다음 기록을 보자. 바로 일본서기의 무열천황 4년 하(夏)4월에 
실려있는 기록이다.

 

是歲,百濟末多王無道暴虐百姓.國人遂除而立島王,是為-武寧王.
시세,백제말다왕무도포학백성,국인수제이입도왕,시위 무령왕

"이 해에 백제 말다왕(末多王)이 무도(無道)하여 백성에게 포학한 짓을 하였다. 
국인이 제거하고 도왕(島王-사마왕)을 세웠다. 이를 무령왕이라고 한다."

 

일본 역사학자들이 왜5왕계로 비정하는 일본서기의 인덕천황계가 사라지는 시점에 
백제의 동성왕(=말다왕)이 포학무도한 일을 행하여 국인에게 암살되고 왜국에 있던 
사마왕(=島王)이 백제왕이 되어 백제 땅으로 건너간다. 그리고 중국 역사서 양서에서는
왜5왕의 마지막 왕인 왜왕 무(武)가 502년 이후로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런데 그와

똑같은 해 502년에 무녕왕이 백제왕으로 등극한다. 무엇인가 이상하지 않은가?

百濟에서 일어나는 일과 일본 열도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쌍둥이처럼 닮아있다. 
왜 그럴까? 곤지왕의 아들 동성왕, 사마왕(一說에는 개로왕의 아들)으로 이어지는 
계보가 원래의 왜5왕(=백제왕에 의해 일본열도에 봉하여진 후왕들)의 계보였지만, 
일본서기를 편찬하던 시기에 그들은 이미 멸망한 백제의 후왕들로서 신생국 일본의 
역사(=만세일계의 천황의 역사)에 걸림돌 밖에 되지않아 그 계보를 없애고 새로운 
천황의 계보를 올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로운 천황의 계보도 자세히 살펴보면
왜5왕(=백제왕에 의해 일본열도에 봉하여진 후왕들)의 계보의 잔영이 짙게 남아있다.

 
그런데 무열천황 7년 하(夏)4월에 백제 무령왕은  자신의 아들인 사아군(斯我君)을 
일본 열도로 보내었고, 그 후에 그 사아군이 자식을 두어 법사군(法師君)이라고
하였는데 이 사람이 곧 왜군의 선조라고 하였다. (일본서기 무열천황 7년조)
바로 여기의 왜군(倭君)에 주목하자. 왜군은 바로 왜5왕의 성 왜씨와 통한다. 
그런데 또 속일본기(續日本紀)에 보면 백제 무령왕의 왕성이 화씨(和氏)라고 나와있다. 
이로써 무령왕의 왕성이 화씨(和氏)라고 기록된 것이 역사적 사실임이 입증된다. 
즉 일본서기에서 왜5왕으로 비정되는 천황들이 사라져 버리는 (무령왕이 백제로 
가서 백제왕이 되어 다시 백제의 왕성 부여씨로 되는) 바로 그 시기에 무령왕의 
손(孫) 왜군(倭君)이 다시 등장하고, 왕성으로서 왜(倭=yamato)  즉 화(和=yamato)
성씨를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즉 이것은 무령왕의 후손 중 일부가 일본열도로 
건너와서 백제왕으로 등극하기 이전의 무령왕의 왕성 왜(倭) 곧 화(和)씨를 
이어받은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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