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 제30대 비타쓰왕이 백제 왕족임을 밝힌 일본왕실 족보 ‘신찬성씨록’. 아래는 1971년 발굴된 무령왕릉.
지난해 5월, 필자는 일본 교토에 살고 있는 우에다 마사키 박사를 찾았다. 우에다 박사는 교토대 사학과 명예교수로 일본 고대 역사학의 태두로 불린다. 30여 년 전 “백제왕이 백제의 식민지였던 왜의 후왕(侯王)에게 ‘백제 칠지도(七支刀)’를 하사했다”고 밝혀 일본 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킨 당사자이기도 하다. 우에다 박사는 당시 집으로 몰려든 일본 국수주의 청년들로부터 협박을 받았다고 털어놨다. 그러나 우에다 박사가 자택에서 필자에게 보여준 것은 훨씬 더 충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집안에서 조상 대대로 고이 간직해온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을 꺼내 보이며 이렇게 말했다. “제30대 비타쓰왕은 백제 왕족입니다.” 서기 815년 일본 왕실이 편찬한 ‘신찬성씨록’은 일본 고대의 왕도(王都)였던 ‘헤이안경’(지금의 교토시)의 왕족과 귀족 1182개 가문의 신분을 기록한, 일종의 일본 고대 왕족 및 귀족 족보다. 우에다 박사는 일본 왕족 30개 가문이 나열되어 있는 대목을 펼쳐놓고, 그중 12번째에 씌어진 ‘大原眞人’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大原眞人’이라는 일본 왕족이 누구인지는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씌어 있었다. ‘大原眞人. 出自諡敏達孫百濟王也. 續日本紀合.’ (대원진인, 그의 조상은 시호가 비타쓰(敏達)라는 백제 왕족이니라. ‘속일본기’ 기록에도 부합한다.) 풀이하면, ‘대원진인의 조상이 일본 제30대 비타쓰왕이며, 비타쓰왕은 본래 백제 왕족이다.’ 또한 이 내용이 ‘속일본기’라는 왕실 편찬 역사서(서기 797년)에도 부합한다고까지 적시하고 있다. 우에다 박사는 이 대목이 “비타쓰 천황이 백제 왕족 출신임을 말해주고 있다”고 말했다. 순간 필자는 말을 잇지 못했는데, “비타쓰 천황이 백제 왕족”이라는 사실도 놀랍지만, 우에다 박사의 학문적 양심에 가슴이 뜨거워졌기 때문이다. ‘구다라 천황(百濟天皇)’ ‘일본서기’(서기 720년, 일본왕실 편찬)에 보면, “제30대 비타쓰 천황(敏達·572~585 재위)은 나라(奈良)에 ‘구다라오이궁(百濟大井宮)’을 지었다”는 대목이 있다. 비타쓰왕이 나라의 백제인 집단 거주지 ‘구다라오이(百濟大井)’에 왕궁을 지었다는 얘기다. 이 기록 또한 비타쓰왕이 백제 왕족 출신임을 방증한다. 그뿐만 아니라 비타쓰왕의 친손자인 제34대 조메이왕(舒明·629∼641 재위)도 나라의 ‘구다라강(百濟川) 옆에 구다라궁(百濟宮)과 구다라노데라(百濟寺)라는 큰 가람을 지었다. 조메이왕이 구다라궁에서 살다가 서거했을 때 ‘구다라노오모가리(百濟大殯)’로 장례를 치렀다’는 내용도 있다. 일본 학자 마유즈미 히로미치씨는 ‘일본서기’의 조메이왕 대목인 ‘조메이기(舒明紀)’에 대한 주해(註解)에서 “여기서 말하는 빈소는 그 의식을 성대하게 거행한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백제대빈(百濟大殯)’이란 백제 왕실에서 행한 3년상(喪)을 가리킨다. 백제 제25대 무령왕(501∼523 재위)이 왕도(王都)였던 곰나루(웅진, 공주) 지역에서 ‘백제대빈’을 치렀다는 사실은 1971년 출토된 무령왕의 ‘묘지명’을 통해 입증됐다. 백제 왕실의 성대한 장례 의식을 왜에서 거행했다는 것은 당시 나라 땅을 지배한 백제 왕가의 세력이 절대적이었음을 추찰케 한다. 한편 일본 고대 사학자인 세이조대 사학과 사에키 아리키요 교수는 비타쓰왕의 친손자인 “조메이 천황은 생전에 ‘구다라 천황(百濟天皇)’이라고 불렸을 것이다”라고 발표한 바 있다. 서기 572년에 등극한 비타쓰왕이 ‘백제대정궁’을 세운 오이(大井)는 어디인가. 지금의 나라현 ‘고료초 구다라(廣陵町 百濟)’라는 게 일본 사학계의 통설이다. 이곳에는 2007년 11월 현재 ‘구다라 우편국(百濟郵便局)’도 영업 중이다. ‘고료초 구다라(百濟)’는 지금까지 일본에서 ‘백제’라는 행정 지명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두 곳 중 하나다.
| 교토시 동쪽에 ‘百濟寺’란 사찰이 있다. 일본인들은 ‘햐쿠사이지’라고 발음하지만, ‘백제’라는 행정 지명을 간직하고 있는, 몇 안 되는 곳 중 하나다.
나머지 한 곳은 교토시 동쪽의 ‘히가시 오우미시 햐쿠사이지초(東近江市百濟寺町)’다. 이 이름은 일본 최대의 비와코 호수 너머 스즈카산(鈴鹿山) 등성이에 우뚝 서 있는 유서 깊은 사찰에서 비롯됐다. 이 사찰의 이름은 ‘샤카산 햐쿠사이지(百濟寺)’, 일본에서는 ‘百濟寺’를 ‘구다라 데라’라고 하는데 유독 이 사찰만은 ‘百濟寺’의 한자어를 소리 나는 대로 읽어 ‘햐쿠사이지’로 부른다. 1910년 일제의 조선 침략 이전까지만 해도 일본 각지에 ‘구다라고우리(百濟郡)’ ‘구다라손(百濟村)’ ‘구다라강(百濟川)’ 나아가 ‘구다라대교(百濟大橋)’ ‘구다라평야(百濟平野)’ 같은 행정지명이 널리 쓰였다. 일본 고대 지도인 ‘팔랑화도(八浪華圖)’는 지금의 오사카 지역인 난바(難波·‘나니와’라고도 부름) 일대가 ‘구다라스(百濟洲)’로 불렸음을 보여준다. 이 지도는 서기 1098년(承德 二年)에 처음 그려졌다. 지금으로부터 900여 년 전 지도에 표기된 ‘구다라스’ ‘난바지(難波寺)’ ‘구다라리(久太郞里·‘백제리’의 이두식 한자 표기)’ 등은 2007년 현재까지 오사카시내의 지명으로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특히 당시 ‘구다라고우리(百濟郡)’ 지역은 지금의 오사카 중심 시가지인 히가시나리구(東成區)이다. 1937년에 편찬된 ‘일본고어대사전’은 ‘구다라고우리(くだら こうり)’의 ‘고우리’가 “한국어의 고을에서 파생된 말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오사카 중심지 일대는 한때 행정구역상 ‘기타구다라손(北百濟村)’ ‘미나미구다라손(南百濟村)’으로 분류되기도 했다. 그러나 일제가 조선을 강제 점령한 후, 백제와 관계된 대부분의 일본 지명이 다른 이름으로 바뀌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백제’가 지명으로 남아 있는 곳이 두 군데에 불과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 두 곳의 지명 또한 언제까지 이어질지 알 길이 없다. “한국과 혈연이 있습니다” 일본의 구다라(백제) 불교문화는 6세기 초엽(538), 일본 나라 아스카(飛鳥) 지역에 자리 잡고 있던 백제계 왕실에서 꽃피기 시작했다. ‘일본서기’는 “백제 제26대 성왕(聖王·523~554 재위)이 일본에 백제 불교를 전파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성왕은 제27대 위덕왕(554~598 재위)에게 왕위를 넘기고 난 다음에는 아예 아스카로 건너가 긴메이왕(欽明·539~571 재위)으로 군림했다. 성왕은 알려진 것처럼 554년 신라군과의 전투에서 사망한 것이 아니라, 장남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일본 왕실로 건너갔다. 성왕은 이미 539년 센카왕(宣化王·536∼539 재위)이 서거했을 때부터 백제와 일본을 넘나들며 왜왕을 겸임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사학자 고바야시 야스코도 “백제 성왕은 일본왕을 겸임했다”는 연구론을 펼쳤다. 성왕의 선대인 무령왕과 동성왕(479~501 재위)도 모두 백제왕으로 등극하기 전엔 왜 왕실에 살았다. ‘삼국사기’ 같은 우리 역사서엔 이 같은 기록이 없지만, ‘일본서기’에는 ‘동성왕과 무령왕이 각기 일본에서 귀국해 차례차례 백제왕으로 등극했다’는 내용이 있다. 그러니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백제계 왜 왕실에서 살다 귀국해 백제왕이 됐다는 사실만으로도 성왕이 어떻게 왜왕을 겸임할 수 있었는지 납득할 만하다. 한 가지 더 밝혀두자면 794년, 일본 왕실에서는 새 왕도가 된 교토에 성왕의 일본왕실사당인 히라노신사(平野神社)를 웅장하게 세웠으며, 현재까지 잘 보존하고 있다. 일본 고대 왕실에서 히라노신사에 제사를 드려온 사실은 10세기 초 제정된 왕실 법도 ‘연희식(延喜式)’에도 실려 있다. 히라노신사는 일본 제50대 간무왕(桓武·781~806 재위)의 칙명으로 헤이안경(지금의 교토시) 새 왕궁의 북쪽에 세워졌다. 2001년, 아키히토(明仁·1989~ 재위) 현 일왕은 간무왕이 백제인의 후손임을 인정한 바 있다. “제50대 간무 천황의 생모는 백제 무령왕의 왕자 순타태자의 직계 후손인 화신립(和新笠) 황태후입니다. 이 사실은 일본 왕실 역사책 ‘속일본기’에 실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도 한국과 혈연이 있습니다.” 68회 생일을 맞아 기자회견을 열었을 당시 한 말이다. 천황의 이 같은 발언에 황거(왕궁)를 관장하는 궁내청 고관들이 매우 당황했다는 후문이다. 그 때문인지 일본 언론은 이날 기자회견 내용을 보도하면서 일왕이 언급한 한국과의 혈연관계 대목은 쏙 빼놓았다. 유일하게 ‘아사히신문’이 일왕의 발언을 기사화했다. 성왕의 아들과 딸 | ‘팔랑화도’는 수백년 전, 일본 오사카 지역이 ‘구다라스(百濟洲)’라는 지명으로 불렸음을 보여준다.
‘신찬성씨록’이 백제왕족이라고 명기한 비타쓰왕(572~585 재위)은 백제 성왕의 제2왕자다. 성왕의 제1왕자는 백제 제27대 위덕왕이다. 비타쓰왕은 긴메이왕(백제 성왕)이 서거하자 왕위를 계승했다. 그와 동시에 최고대신으로 20세의 백제인 귀족 소가노우마코(蘇我馬子)를 등용했다. 교토부립대학 사학과 가도와키 데이지 교수는 소가노우마코 대신이 백제 제21대 개로왕(455~475 재위)의 신하였던 ‘백제조신 목만치(木滿致)의 5대손’이라고 밝혔다. 비타쓰왕은 576년 3월, 18세의 가시키야 공주를 왕후로 맞았다. 가시키야 공주는 다름 아닌 왕의 이복동생, 그러니까 성왕의 제2공주였다. 근친결혼을 한 셈이다. 가시키야 공주는 비타쓰왕과의 사이에 2남5녀를 뒀으며, 서기 592년에 일본 최초의 여왕으로 등극했다. 제33대 일본왕인 스이코 여왕(推古·592~628 재위)으로 36년간, 아버지가 포교한 백제 불교문화를 눈부시게 꽃피웠다. 이 시기는 일본 역사에서 ‘아스카 문화 시대’(592~645)로 높이 평가받는다. 14세기 초에 씌어진 일본 불교 왕조사인 ‘부상략기(扶桑略記)’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推古天皇元年正月, 蘇我大臣馬子宿. 依合戰願, 於飛鳥地建法興寺, 立刹柱日 島大臣竝百餘人 皆着百濟服, 觀者悉悅, 以佛舍利, 籠置刹柱礎中.” 588년, 백제 왕실에서 건너온 건축가 태량미태(太良未太), 문가고자(文賈古子) 등에 의해 일본 최초의 칠당 가람이 아스카에 착공됐다. 위 대목은, 스이코 여왕이 등극한 직후인 593년 1월에 소가노우마코 대신과 만조백관이 ‘백제옷’을 입고, 구경하는 사람들이 기뻐하는 가운데 백제에서 보내온 부처님 사리함을 찰주의 기초 속에 안치했다는 내용이다. ‘만조백관이 ‘백제복’을 입었다’는 것은 스이코 여왕의 아스카 왕실이 백제계 왕가임을 말해준다. 그러나 당시에 관한 ‘일본서기’ 기록에서는 ‘백제복을 입었다’는 ‘부상략기’의 대목을 발견할 수 없다. 닌토쿠 왕실로 건너온 백제신(百濟神) 그러면 이제,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백제인 왕가가 형성된 시기로 추정되는 4~5세기, ‘난바(오사카)’의 ‘구다라스(百濟洲)’ 시대를 살펴보자. 백제가 일본을 최초로 지배한 것은 오진(應神)왕 때부터라는 게 통설이다. 이 사실을 고증하는 자료 중 하나인 오진천황 전신 초상화를 보면, 도포를 입은 천황이 머리에 남바위를 쓰고 있다. 남바위는 가죽을 댄 기다란 모자로, 우리 조상들이 겨울철 방한모로 착용해왔다. 당대의 오진왕과 그의 제4왕자 닌토쿠(仁德)왕이 백제인이었음을 일본 사학자들의 연구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먼저 ‘일본서기’는 백제의 학자 왕인이 오진왕의 초청을 받고 왜 왕실로 건너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왕인은 오진왕의 제4왕자 오사사기 왕자에게 글을 가르쳤다. 오진왕이 서거한 뒤 3년째 되던 해에는 왕인이 오사사기 왕자를 닌토쿠왕 지위에 올려놓았다. 이 같은 사실은 805년에 씌어진 고대 문헌에 기록돼 있다. “왕인이 어대에 와카(和歌) ‘나니와쓰노우타(難波津歌)’를 지어 닌토쿠 천황을 왕위에 천거하였다.”(紀貫之 ‘古今集’) 오사카의 고대 나루터 이름인 ‘나니와쓰’는 왕인이 지은 와카에서 유래했다. 이 지명은 현 오사카 중심의 번화가인 ‘나니와(難波)’로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또 주목할 것은 “닌토쿠 천황이 모국 백제로부터 백제신(百濟神)의 신주를 왕실로 모셔왔다”(‘風土記’ 8~10C 편찬)는 점이다. “백제신의 신주를 모셔왔다”는 것은 조상신을 숭경하는 종묘사직 신앙행위라고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며, 이는 곧 닌토쿠왕이 백제인임을 입증한다. 닌토쿠왕과 그의 부왕 오진왕이 백제인이라고 주장한 사학자는 한둘이 아니다. 와세다대 사학과 미즈노 유 교수는 일찍이 “오진 천황과 그의 아들 닌토쿠 천황은 구다라국(백제국) 왕가로부터 건너와 일본 정복왕조를 이루었다”(1978)고 단정한 바 있다. 도쿄대 사학과 이노우에 미쓰사다 교수도 이보다 앞서 “백제 사신으로부터 칠지도(七支刀)를 전해 받은 왜왕 오진 천황은 구다라(백제) 왕족이며, 천황씨(天皇氏) 자체가 조선으로부터 건너온 일본 이주자였다”(1960)고 밝혔다. 일본 고대사학자 이시와타리 신이치로의 저서 ‘구다라에서 건너온 오진 천황’(2001) 또한 일본 사학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저자는 이 책에서 오사카부 하비키노시에 있는 “오진릉(應神陵)에 매장된 시신은 5세기 후반에 건너온 구다라의 곤지왕자(昆支王子)이다. 그는 5세기말에 일본에서 구다라계 왕조(百濟系王朝)를 수립했다”고 주장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곤지왕자는 백제 제21대 개로왕(455~475 재위)의 제2왕자다. 이처럼 한일 고대사를 성실하게 연구하고 그 결과를 양심적으로 밝힌 일본 사학자들은 반한(反韓) 세력으로부터 정신적 박해를 받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백제신 사당에 참배하는 일본인 | 일본 최초의 백제신 사당으로 유서 깊은 오사카의 ‘미시마카모신사(三島鴨神社).
백제신을 왕실로 모셔온 닌토쿠왕은 왕도에 사당을 짓기도 했다. 지난해 10월29일, 필자는 고대 일본 최초의 백제신 사당으로 유서가 깊은 오사카의 ‘미시마카모신사(三島鴨神社)’를 찾아갔다. 이곳의 마쓰이 나리후사(松井位幾) 궁사는 “이곳에서는 닌토쿠(仁德) 어대 때, 백제에서 일본 왕실로 건너오신 백제대신(百濟大神) 오야마쓰미노카미(大山積神) 신주의 제사를 모시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백제신이 일본 왕실로 건너온 것은 지금으로부터 1600년 전인 5세기다. 조상 대대로 백제신 제사를 모셔왔다는 마쓰이 나리후사 궁사는 이 고장 오사카 요도가와(淀川) 상류 동쪽에서 사당을 지켜온 백제인 후손 이구치 아키오(伊口明生) 등 열여섯 가문 대표들과 함께 5년의 노력 끝에 2006년 사당 역사에 관한 책을 펴냈다. 이 책 ‘三島鴨神社史’의 서두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닌토쿠 천황은 가와치(河內·오사카 옛 지명)에 ‘만다 큰제방’을 쌓으시는 동시에 요도가와 강변 터전을 지켜주시는 신(神)으로서 백제로부터 오야마쓰미노카미를 이 고장 미시마(御島·三島의 이두식 한자어와 같은 의미)로 모셨습니다. 왕도 난바(難波)를 지켜주시는 수호신으로서 이 신사를 계속해서 모셔왔습니다.” 마쓰이 나리후사 궁사에게 필자는 “고대 일본 최초의 백제신 사당에 한국에서도 더러 참배객이 오느냐”고 물었다. 마쓰이 나리후사 궁사는 “한국에서는 잘 모르는 것 같다”고 답했다. 마쓰이 나리후사 궁사에게 “일본인은 이곳이 일본 왕실로 건너온 백제대신의 사당이라는 것을 알고 있느냐”고 다시 물었다. “다들 잘 알고 있습니다. 열심히 참배하는 신자가 많으며, 개중엔 (2007년) 10월 충남 부여에서 열린 ‘백제문화제’에 다녀온 분들도 있습니다. 해마다 조상의 고국 백제땅 부여, 공주 등을 찾아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마쓰이 나리후사 궁사는 이 사당을 찾는 참배객에게 무료로 나눠주는 안내서 ‘미시마카모신사 유서략기’를 필자에게 건네주었다. 그 첫 줄에 “서기 400년대에 닌토쿠 천황이 창건해 백제로부터 건너오신 백제신 오야마쓰미노카미 신주 제사를 모시는 사당”이라고 씌어 있었다. 국가신도와 전쟁의 비극 좀 더 살펴보니, 닌토쿠왕 시대에 백제로부터 건너온 백제신을 ‘미시마카모신사’에서 제사지내게 된 연유를 일본 고대사 문헌 ‘風土記’는 이렇게 전하고 있었다. ‘御嶋 坐神御名 大山積神 一名和多志大神也 是神者 所顯難波高津宮御宇天皇御世 此神者百濟國渡來坐 而津國御嶋坐’ ‘미시마에 계신 신의 어명(御名)은 오야마쓰미노카미다. 일명 와다시노오카미(和多志大神)이시다. 이 신은 나니와의 다카쓰노미야(高津宮) 궁에 천황(닌토쿠왕)이 계시던 어세(御世)에 나타나셨다. 이 신께서는 구다라국(百濟國)으로부터 건너오셔서 나니와쓰의 미시마에 계시게 되었다.’ 한편 닌토쿠왕 때 일본 왕실로 건너온 백제신의 이름이 ‘和多志’인데, 무령왕의 왕성이 ‘화(和)’씨이며, 일본 제50대 간무왕의 생모가 백제 왕족 ‘화신립(和新笠)’ 황태후인 것은 백제 왕가의 성(姓)이 백제신의 성과 일맥상통하는 것을 보여준다. ‘미시마카모신사 유서략기’에는 “닌토쿠 천황 시대에 미시마에 살던 왕족들이 이 고장 다카쓰기(高槻)의 벤텐산(辯天山)에 3대에 걸친 고분을 만들었는데, 그때 모노노베 가문의 가라쿠니무라지(韓國連·한국 귀족 씨족)들이 협력했다”는 내용도 실려 있다. 이 책의 ‘국가신도(國家神道)와 전쟁의 비극’이라는 대목도 짚어볼 만하다. 일제하에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이곳 백제신 사당에 압력을 가해 백제신을 제쳐놓고 대신에 국가신도, 즉 황국신도(皇國神道)의 정점에 올려 세운 이른바 ‘천조대신’을 제사지내는 남녘의 이세신궁(伊勢神宮)을 향해 최경례(허리 굽혀 큰절)하도록 강요했다. 그뿐 아니라 천황을 살아 있는 인간신(現人神)으로 신앙화하고, 사당 경내에 일본군 전몰자들을 위령하는 ‘표충비’를 세웠다. 이 책은 “그뿐 아니라 이 신사의 뒷길로 다니는 통학생들로 하여금 반드시 이곳 사당을 향해 최경례하고 지나가도록 강요했다. 그러나 그것은 이곳 어제신(御祭神·백제대신)에 대한 숭경의 절이 아니라, 천조대신과 현인신(現人神)인 천황에 대해 숭경의 절을 올리게 하는 것이었다”고 지적했다.
백제왕이 왜왕에게 하사한 칠지도 | 백제왕이 왜 후왕(侯王)에게 하사한 것으로 알려진 칠지도(七支刀). 일본 이소노카미신궁이 소장하고 있다.
일본 왕실이 백제인에 의해 형성됐다는 문헌 기록 외에 고고학적인 고증 또한 중요하다. 대표적인 것이 백제 ‘칠지도(七支刀)’와 ‘인물화상경(人物畵像鏡)’의 금석문이다. 백제 제20대 비유왕(毗有王·427~455 재위)과 세자(훗날의 개로왕)가 왜를 다스리던 백제 왕족 후왕(侯王) 오진왕(應神·4~5C초)에게 429년에 보낸 백제 왕실 ‘칠지도’가 있다. ‘일본서기’는 왜의 제15대 ‘오진 천황’이 270~310년까지 재위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이는 ‘날조’라는 것이 통설이다. 오진왕은 5세기경의 백제인이 맞고, ‘백제 비유왕이 하사한 칠지도(74.9cm 길이)를 받은 백제의 후왕(侯王)이다’라는 것이 현존하는 칠지도(일본 나라현 덴리시 이소노카미신궁(石上神宮) 소장, 일본 국보)에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백제 왕실에서 이 칼에 새긴 글은 이렇다. ‘泰和四年五月十一日丙午 正陽造百練鐵七支刀 以?百兵 宜供供候王 □□□□作’(칼의 앞면) ‘世以來未有此刀 百慈王世子寄生聖音 故爲倭王旨造 傳示後世’(칼의 뒷면) 우리말로 옮기면, ‘태화 4년(서기 429년) 5월11일 병오날 정양 때에 무수히 담금질한 쇠로 칠지도를 만들어 모든 적병을 물리치도록 후왕에게 주노라’(앞면), ‘선대 이래로 아직 볼 수 없었던 이 칼을 백제왕 및 세자(뒷날의 개로왕 - 필자 주)는 성스러운 말씀으로 왜왕을 위해 만들었도다. 후세에까지 잘 전해서 보이도록 하라’(뒷면) 이다. 우에다 마사키 교수는 이 칼을 3번이나 조사하고 쓴 연구론에서 “그 당시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백제왕이 후왕인 왜왕에게 보내줬음을 밝힌 것이며, 칼에 새긴 글투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전하는 하행문서(下行文書) 형식의 명문이다”라고 단정했다. 백제 비유왕이 왜나라에 건너가 왜를 지배하던 백제의 후왕에게 왜나라를 잘 지켜 백제의 속령으로 번창할 것을 명한 것이다. 이노우에 미쓰사다 교수도, 그 당시 백제 사신으로부터 칠지도를 전해 받은 오진 천황은 백제 왕족이며, “천황씨(天皇氏) 자체가 조선으로부터 건너온 일본 이주자였기 때문에 조선에서 건너온 많은 사람을 간무 천황이 조정에 등용시킨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계미년 수수께끼 일본의 중요 문화재에는 고대 일본에 남긴 한국의 자취가 또렷하게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인물화상경’이라는 청동 거울이다. 일본 국보가 된 이 청동 거울은 503년에 백제 제25대 무령왕이 직접 제작을 지휘해서 완성한 다음, 왜나라 왕실의 친동생(男大迹, 오호도 왕자, 훗날의 게이타이왕(繼體王))에게 보내준 것이다. 지름 19.8cm로 둥글게 만든 이 청동거울에는 말을 탄 백제왕이며 신하들의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어 인물화상경이라고 통칭된다. 현재 일본 와카야마현 하시모토시 ‘스다하치만신사’에서 보존하고 있다. 필자는 지난해 1월, 이 신사를 방문했다. 스다하치만신사의 데라모토 요시유키 궁사는 육중한 금고 깊숙이 들어 있던 ‘인물화상경’을 꺼내 보여줬다. 필자는 귀중한 ‘인물화상경’을 직접 매만지면서 역사의 사실(史實)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인물화상경은 도쿄 우에노의 ‘도쿄국립박물관’에 있다”는 설이 있었다. 이에 대해 데라모토 궁사는 “낭설이다”라고 일축했다. 데라모토 궁사는 이어서 “이 거울은 503년에 백제 무령왕께서 일본 왕실로 보내주신 겁니다”라고 진지하게 말했다. 데라모토 궁사의 이 같은 발언은 한일 고대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증언이다. 왜냐하면 오랫동안 일부 일본 학자들이 이 거울이 백제로부터 건너온 사실을 부인하기 위해 ‘연대 조작’ 등으로 역사를 왜곡해왔기 때문이다. 그 경위는 이렇다. 인물화상경에는 둥근 거울의 바깥쪽 테두리를 따라가며 48개의 한자어로 된 명문(銘文)이 있다. ‘癸未年八月日十大王年男弟王在意柴沙加宮時斯麻念長壽遺開中費直穢人今州利二人等取白上銅二百旱作此鏡’ ‘서기 503년(癸未年) 8월10일 대왕(백제 무령왕) 시대에, 오시사카궁에 있는 오호도 왕자에게, 무령왕(斯麻는 무령왕의 휘)께서 아우의 장수를 바라시면서, 개중비직과 예인 금주리 등 2인을 파견하여 거울을 보내시는바, 이 거울은 좋은 구리쇠 200한(旱)으로 만들었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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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백제왕조 오진왕 직계 계보
동생을 향한 무령왕의 애정이 간곡하게 담겨 있다. 그러나 일본 사학자들은 이 명문에 대해 엉뚱한 해석들을 내놓았다. 일본 천황이 무령왕의 친동생이라는 사실을 부정하기 위해 60년에 한 번 돌아오는 간지(干支) 연대를 왜곡했다. 거울 제작 연대로 새겨진 ‘계미년’을 서기 263과 443년 등으로 몰고 간 것. 청동거울에 새겨진 계미년(癸未年)이 고대의 어느 시점을 가리키는 것인가가 쟁점의 시발이 됐다. 인물화상경을 스다하치만신사의 창고에서 최초로 발견한 이는 사학자 다카하시 겐지 박사다. 최초 발견자는 이 거울 명문에 나타나 있는 계미년이 서기 263년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교토교육대 사학과 와다 아쓰무 교수는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다카하시설(說)은, 명문에 보이는 사마(斯麻)를 ‘일본서기’의 ‘신공기(神功紀)’에 등장하는 시마노스쿠네(斯麻宿)와 연결 지으며 계미년에 대해 고증하는데, 여기엔 무리가 있다.” 필자의 생각도 와다 교수와 같다. 왜냐하면 ‘일본서기’에 근거해 일개 조신(朝臣)인 신하가 감히 청동거울을 만들어 왕자에게 하사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런 행적은 명문의 문맥과 도저히 조화될 수 없다. 더구나 ‘일본서기’의 ‘신공기’는 가공의 조작된 것이라는 게 통설이다. 그러니 시마노스쿠네(斯麻宿)와 인물화상경의 ‘사마’는 전혀 무관하다. 무령왕의 휘가 사마(斯麻)임에도 불구하고 다카하시 박사가 이를 제쳐두고 시마노스쿠네라는 일개 조신 쪽으로 논조를 몰고 간 것은 의도적이었던 듯하다. 다카하시 박사가 ‘계미년 263년설(說)’을 처음 내세운 때가 한일합방 직후였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당시 도쿄제실박물관(東京帝室博物館)의 감사관이며 역사부장이었다. 게이타이왕은 동성왕 아들 다카하시 박사에 의해 최초로 제기된 ‘계미년 263년설’은 일본 사학계에서 서서히 묵살되는 가운데, 443년설과 503년설이 대두되기에 이르렀다. 443년설은 미즈노 유 교수의 주장이고, 503년설은 후쿠야마 도시오 교수의 주장이다. 먼저 미즈노 교수는 ‘서기 443년 8월, 윤공 천황(允恭天皇·412~453 재위)이 남동생(男弟)과 함께 황후(皇后)의 오시사카궁(忍坂宮)에 있을 때, 사마(斯麻)가 장수를 염원해서…’라고 해석했다. 한편 후쿠야마 교수는 ‘서기 503년 8월 인현대왕(仁賢大王)의 시대, (왕자시대의) 게이타이왕(男弟王)이 오시사카궁에 있을 때, 사마가…’라고 해석했다. 후쿠야마 교수는 ‘男弟王’을 즉위 전의 게이타이왕으로 지목하고, 계미년을 503년으로 짚어내는 데까지는 정확했으나, 그 시기를 백제 무령왕이 아닌 왜의 닌켄대왕 시대라고 곡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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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오호도(게이타이왕)는 무령왕의 친동생이 맞는가. 게이타이왕은 백제 제24대 동성왕(東成王·479~500 재위)의 제3왕자였다. 동성왕은 이름이 무대(牟大)여서, 왜나라에 있을 때 무대왕(牟大王)으로도 불렸다. 동성왕은 일본의 백제 왕가에 살고 있던 곤지(昆支) 왕자의 아들이다. 그리고 곤지 왕자는 백제 개로왕(蓋鹵王·455~474 재위)의 제2왕자다. 개로왕의 제1왕자는 문주왕(文周王·475~476 재위)이며, 문주왕의 뒤를 이은 것은 문주왕의 제1왕자인 삼근왕(三斤王·477~479 재위)이다. 삼근왕이 승하하자 왜나라에 있던 문주왕의 동생 무대가 백제로 귀국해서 동성왕으로 등극했다. 여기서 잠깐 ‘일본서기’를 살펴보자. ‘왜나라의 무렬왕(武烈王·498~506 재위)이 서거했으나 후사가 없었다. 대신들이 서둘러 왕위 계승자를 찾던 중에, 오진왕의 5대손인 남대적(男大迹, 男弟, 오호도)을 왕위에 등극시켰다.’ 남대적은 우시왕(汚斯王)의 제2왕자이며, 우시왕이 바로 동성(牟大)왕이다. 동성왕의 또 다른 이름인 무대의 무(牟)가 소(牛)를 상징하며, 우시(汚斯, うし) 또한 ‘소(牛)’라는 의미가 있다. 1971년 7월8일, 마침내 충남 공주에서 백제 무령왕릉이 발굴됨에 따라 비로소 무령왕의 휘가 ‘인물화상경’에 새겨진 ‘사마(斯麻)’임이 고고학적으로도 확인됐다. 또한 무령왕과 왕비를 모신 이 고분의 2개 묘지석(墓誌石)은, 무령왕이 523년 5월3일에 승하했음을 입증했다. 인물화상경의 최초 발견자인 다카하시 박사는 일본 게이타이 천왕이 무령왕의 친동생이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60갑자를 4바퀴나 거꾸로 돌려 계미년이 263년을 가리킨다고 우겼지만, 무령왕릉이 발굴됨으로써 계미년은 503년임이 확인됐다. 그뿐만 아니라 무령왕과 왕비의 왕관 장식이며 각종 유물에서 고대 일본 왕가 분묘의 유물과 같은 것들이 발견됐다. 1450여 년의 침묵을 깬 무령왕릉은 한일 고대 관계사의 얽히고설킨 실타래를 일시에 풀어준 엄청난 고고학적 입증물이다. 히라노신사의 존재가치 일본의 고대 왕도 교토에 위치한 히라노신사는, 일본 천황이 한국의 피를 이어오고 있음을 웅변하는 뜻 깊은 장소다. 백제왕과 왕족을 모신 이곳에 역대 일본왕들이 방문해 백제 성왕의 신전 앞에 머리 숙여 제사를 지냈다. 히라노신사에서 제사를 모신 마지막 일왕은 쇼와 일왕(昭和·1926~1989 재위), 현 일본왕의 아버지다. 쇼와 일왕은 1940년에 히라노신사를 방문해 제사를 지내고 기념식수도 했다. 히라노신사의 신관인 오사키 야스히로씨는 “쇼와 천황께서 기원 2600년(서기 1940년)을 기념해서 몸소 소나무를 심었다”며 자랑스럽게 이야기한다. 소나무 앞에는 다음과 같이 씌어진 나무판이 세워져 있었다. ‘紀元二千六百年(昭和 15년) 天皇階下御手植松’ 히리노신사에서 간행한 ‘히라노신사유서략기(平野神社由緖略記)’를 보면 과거 백제왕 신전에 제사를 모신 일본 왕들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다. ‘덴겐 4년(天元·서기 981년-필자주) 3월에 엔유 천황(圓融天皇·969~984 재위)이 이곳에 직접 행행(行幸)한 이후로 계속해서 역대의 천황들이 행행했다. 또한 태황태후(太皇太后)며 황태후(皇太后), 황후(皇后)의 행계(行啓)도 그 예가 적지 않았다. 가잔 천황(花山天皇· 984~986 재위) 당대인 간나 원년(寬和元年·985년)에 천황이 이곳에 몸소 벚나무를 식수함으로써, 그로부터 벚꽃(사쿠라)의 명소로도 이름이 높아졌다. 에도 시대(江戶·1903~1867)에 접어들면서부터 히라노신사는 ‘히라노의 밤벚꽃놀이’로 일반에게 친숙하게 됐다. 그로써 방문자가 경내에 넘쳤으며, 벚꽃나무는 500여 그루를 헤아리며 특히 진종(珍種)이 많아서 유명하다. 벚꽃축제인 앵제(櫻祭)며 신행제(新幸祭)가 해마다 4월10일에 거행된다. 추수를 감사드리는 ‘햇곡식감사제’인 신상제(新嘗祭)는 11월23일에 거행된다.’ 역대 일본 천황들이 이 히라노신사를 찾아 백제왕들에게 제사를 올렸다는 히라노신사야말로 한국인들에게 감개무량한 터전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히라노신사는 한국인에게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부끄러운 일이나 오랫동안 일본 역사를 공부해온 필자조차 불과 15년 전에야 이곳을 제대로 파악했다. 고대 문헌을 통해 백제왕들을 모신 사당임을 알게 됐다. 일부 사학자들을 제외하고는 일본인들도 이런 역사적 사실을 모르고 있다. 일본 사학자들로선 히라노신사의 정체를 굳이 밝히고 싶지 않을 것이다. 일본 교토시 기타구 히라노미야모토초(京都市北歐平野宮本町) 1번지가 히라노신사 주소다. 교토역전 버스터미널(가라스마 추오구치 기타가와, 鳥丸中央口北側)에서 교토 시내버스로 205번이나 50번을 타고 ‘기누카사코우마에(衣笠校前)’ 정류장에서 내리면 100m 전방에 있다. 교토 관광안내 책자 어디에서도 히라노신사의 유서 깊은 역사를 소개한 대목은 찾아볼 수 없다. 히라노신사는 백제인 간무천황(桓武天皇·781~806 재위)에 의해 794년에 처음 세워졌고, 1598년과 1604년에 재건됐다. ‘히라노쓰쿠리(平野造り)’또는 ‘히요쿠카스가쓰쿠리(比翼春日造り)’로 불리는 신전 건축양식이 높은 평가를 받으며, 일본 신전 건축의 중요문화재로 지정됐다. 그럼에도 일본의 저명한 건축학자이며 역사가인 도쿄대 마치다코이치 교수가 공동 저술한 ‘국보 중요문화재 안내’는 히라노신사에 대한 설명이 인색하기만 하다. 히라노신사의 유래에 대해선 전혀 언급하지 않고, 아주 간략하게 건물에 대한 설명만 몇 줄 있다. 일본의 저명한 역사평론가 스기 시노부는 일인 학자들의 이런 태도를 비판한 바 있다. ‘여행 안내책자에서 고대 유적과 유물에 관해 서술할 때, 조선 문화의 영향을 당연히 써넣어야 함에도 의도적으로 설명을 빼먹거나, 일본 역사 사전의 부정확한 설명 등, 여하간에 고대 조선 문화와의 관련을 배제하거나 무시하는 현실을 지적하게 된다. 일본 문화와 조선 문화가 같은 조상에 의해 이루어진 부분이 많다는 사실을 우리 일본인은 솔직하게 받아들여서, 일본 문화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알아보는 여유를 가질 필요가 있다.’(‘學界展望’) 무령왕릉 참배한 일본 왕자 서두에 인용한 대로 2001년 12월23일 아키히토 일왕이 “간무 천황의 생모는 백제 무령왕의 후손”이라고 공언한 내용은 한국과 일본뿐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에까지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조선왕조 말기의 영친왕비(英親王妃)였던 고(故) 이방자(李方子) 여사는 생전에 “일본 왕실에서도 숭늉을 마신다”고 말했다. “지금의 천황께서도 숭늉을 마시다마다요. 그분도 조선 사람이 아닙니까.” 이 여사가 가리킨 ‘그분’은 쇼와 일왕이다. 한 일본 학자(오비린대학 神田秀一 교수)는 “전두환 대통령 방일(訪日) 때 만찬회에서 쇼와 일왕도 자신의 조상이 백제인이라고 발언했다”고 밝힌 바 있다. | 홍윤기 ● 한국외대 영어과 졸업, 일본 센슈대 박사(문학) ● 일본 센슈대 겸임교수, 단국대 초빙 교수, 한국외대 외국어연수평가원 교수 ● 現 한일국제왕인학회장, 한국외대 교양학부 ‘일본문화와 사회’ 담당교수 ● 저서 : ‘일본의 역사왜곡’ ‘일본천황은 한국인이다’ ‘일본문학백과’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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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2002년 7월10일 직접 일본 도쿄의 황거에 들어가 천황궁의 왕실 제사를 진행하는 제사 담당관 아베 스에마사씨로부터 지금의 아키히토 일본왕이 매년 11월23일 밤에 백제신(韓神)을 위한 제사 축문을 낭창(朗唱)하며 신상제(新嘗祭)를 지낸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 같은 사실은 그해 EBS 광복절 특집 방송으로 방영됐다. 우에다 마사키 박사는 그 이듬해 1월에 필자에게 보낸 서신에서 “비타쓰왕의 후손인 대원진인(大原眞人)은 백제 왕족이며 의자왕의 핏줄을 이었다”고 인정했다. 현 일본 왕실의 아사카노미야 왕자는 2004년 8월 무령왕의 제사를 모시기 위해 몸소 충남 공주를 찾은 바 있다. 왕자는 직접 가져온 1300년 전 일본 왕실에서 만든 왕실 제사용 향로(香爐)와 귀중한 향(香)을 무령왕릉(武寧王陵) 안에서 피우며 제주(祭酒)와 제사용 과자 등 제물을 진설하고 무령왕의 영전에 머리 숙여 참배했다. 그러나 일본의 어떤 매체에서도 아사카노미야 왕자의 무령왕릉 참배를 보도하지 않았다.
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shin/2008/04/05/200804050500002/200804050500002_7.htm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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