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고시대의 횡성은 '마한'의 영역이었다. 먼저 우리나라의 원시문화를 보면 한강을 중심으로 북방계열(北方系列)과 남방계열(南方系列)로 나누게 되는데, 이는 구석기시대(舊石器時代)를 지나 신석기시대(新石器時代)에서 문화를 구분하게 된다.
즉, 북방계열은 예맥족(濊貊族)의 문화로, 남방계열은 한족(韓族), 다시 말해 삼한(三韓)의 문화를 말한다. 여기에서 과연 횡성의 문화가 어느 계열에 속해서 형성되었는가를 규명 짓기는 모호한 점이 많겠으나 여기에서는 『횡성과 삼일운동(橫城과 三一運動』의 기술을 중심으로 다룬다.
예맥족 또는 한족이란 구분은 좁은 의미의 것이고, 넓은 의미로 볼 때, 이를 합쳐 우리의 선사민족(先史民族)을 예맥족이라 부르고 오늘날에는 한(韓)족이라 부르고 있으니 모두 우리민족의 지칭인 것이다. 여기서는 다만 원시시대의 예맥족이라고 구분하였다.
예맥이란 이름은 원래 맥(貊)에서 비롯되었고 그 기록은 중국의 문헌에서 처음 발견된다. 이때 우리민족의 영역은 중국 동북방과 만주에서 한반도까지로 마치 예맥이 강원도에서만 찾아 볼 수 있는 것으로 여기고 있는 것은 오류가 아닐 수 없다.
한강유역을 중심으로 남ㆍ북방계열로 나눌 때, 강원도의 경우 영서지방은 춘천 이북을 북방으로, 영동지방은 강릉 이북을 북방으로 구분한다. 그리하여 오늘날 춘천을 「맥국의 옛 땅」 강릉을 「예국의 옛 땅」으로 부르고 있는 것이다.
강릉과 다르게 삼척은 남방계열의 삼한 중의 하나인 진한의 실직국(悉直國)에 속해 있지만, 영서지방의 경우에는 분명하게 구분하기에 무리가 있다. 춘천이 북방계열에 속한다 해도 문화교류로 인해 남방적 색채가 유물에서 나타나고 있고, 홍천의 경우에도 북방계열로 한계를 짓기에는 성격상 매우 어렵다. 그러나 횡성은 원주와 더불어 남방계열로 단정 짓는 것은 무리가 없을 것 같다.
그 이유를 위의 책에서는 세가지로 들고 있는데, 첫째는 횡성이 원주지방과 함께 섬강을 통해 경기도지방과 연결된 지형상의 이유이다. 원시시대에는 강물을 따라 사람들이 옮겨다니며 살았는데, 횡성에서 발원하는 섬강은 충청도와 경기도 남부지방으로 흐르는 남한강의 상류인 만치 이 강을 중심으로 경기 남부지방의 원시부족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고 볼 수 있으며 경기 남부와 충청도지방에 부족을 이루었던 마한의 계통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둘째, 횡성에는 북방계 유적인 탁자형(卓子型) 고인돌이 없는 반면 전라ㆍ충청ㆍ경상도지방에서 많이 발견되는 남방계의 기반형(碁盤型) 고인돌이 발견된다는 점으로 이같은 고인돌은 국립박물관이 펴낸 『한국의 지석묘 연구(韓國의 支石墓硏究)』에 군내의 갑천면(甲川面)에서 발견되었다고 적고 있다.
셋째, 횡성지방에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것은 갑천과 태기산(泰岐山)이 가지고 있는 전설로서 진한(辰韓)의 마지막 왕인 태기왕(泰岐王)이 신라(新羅)의 박혁거세(朴赫居世)와 전쟁에서 패한 뒤 태기왕이 이곳까지 쫓겨와 싸웠다는 전설로 이 산에는 태기왕이 쌓았다는 「태기산성(泰岐山城)」의 일부 흔적이 남아 있으며, 진한을 정벌한 박혁거세가 갑옷을 씻었다는 하천을 갑천(甲川)이라고 불린다고 하여 모두 삼한과 관계된 전설이다.
그러나 이 산은 평창군(平昌郡)과 경계를 하는 까닭에 평창지방에서는 이와 다른 전설 즉, 태기왕이 진한의 왕이 아닌 예맥(濊貊)의 왕자로 변신해 있다.
하지만 태기왕과 박혁거세의 전설이 믿기 어렵다고 할지라도 태기산ㆍ태기산성ㆍ갑천ㆍ어답산(御踏山)으로 연결되는 전설을 분리할 수 없을 때, 이 전설이 갖는 의미는 크다고 볼 수 있다.
이 전설대로 진한의 소속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고 하더라도 역사의 기록이 아닌 전설이며 평창군의 전설과 궤를 달리하고 있어 삼한시대의 횡성을 설명하는 직접적인 근거로 삼을 수 없다. 그렇지만 횡성지방은 우리나라 선사시대(先史時代) 문화를 한강유역을 중심으로 남ㆍ북으로 나눌 때 원주와 더불어 남방계열로 볼 수 있다. 그러면 횡성에는 어느 때부터 사람이 거주하였을까?
횡성에 언제부터 사람들이 살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둔내면 현천리(屯內面 玄川里) 유적에서 구석기유적이 발견됨으로써 이 지역에 인접한 홍천군 하계리 홍천강(洪川江) 유역에서 중석기시대(中石器時代)나 청동기시대(靑銅器時代)의 유적이 발견된 것으로 볼 때 횡성에도 중석기시대에 사람이 살았을 것이라고 보는 것은 무방하다고 하겠다.
그리고 둔내면 현천리와 둔방내리(屯防內里)에서는 신석기시대나 청동기시대의 토기와 고인돌이 발견되고 갑천면 중금리(甲川面 中金里),횡성읍 묵계리(橫城邑 墨溪里) 등지에서 긴돌칼, 간돌화살촉 등이 출토되어 이 시대에도 횡성지방에 사람이 거주하였음을 알 수 있다.
삼국시대 이전의 횡성에 대해서는 전혀 기록이 없기 때문에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으나 기원전 3-2세기 경이 되면 한반도 중부지역에 진국(辰國)이 성립됨으로 당연히 횡성도 진국에 속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진국에 관한 최초의 기록인 『사기(史記)』에서도 판본에 따라 「진번방중국(辰番蒡重國)」,「진번방진국(辰番蒡辰國)」두 계통이 있어서 진국의 실체를 인정하는 학설이 있는가 하면 「진번 옆에 있는 여러나라(衆國)」라는 보통명사로 해석하여 진국(辰國)이라는 존재 자체를 부정하거나 중국(中國)중의 하나로 보는등 그 주장이 다양하다.
또한 다른 기록들도 『삼국지(三國志)』위서 동이전(魏書 東夷傳)에 「진한은 옛 진국(辰國古之辰國)」.『후한서(後漢書)』동이전(東夷傳)에 「삼한은 모두 옛 진국(三韓皆古之辰國)」이라고 하는 등 그 내용이 일치하고 있지 않다.
그후 한반도 중남부지역에 삼한이 성립하게 되었는데, 이시대에 와서도 횡성지역이 어느나라에 예속되었는지 분명하지 않다. 다만 횡성이 원주지방과 함께 섬강(蟾江)을 통해 경기도지방과 연결되고 남한강의 상류인 만큼 이 강을 중심으로 경기 남부지방의 원시부족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본다면 횡성지역은 당연히 경기 남부와 충청도지방에 정치집단을 이루고 있었던 마한(馬韓)에 속한 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을 보다 분명하게 설명하기 위해서는 각종 기록에 나오는 마한(馬韓)의 소국(小國) 명칭과 유적ㆍ유물조사를 통한 횡성지역의 연관성이 밝혀져야 할 것이다.
http://hs-culture.or.kr/site2/site_1_2.ph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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