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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day, November 29, 2010

[EXCLUSIVE] ①펠레, ‘연습 없는 축구황제는 없다’


[스포탈코리아] 이제 일흔이 된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 펠레가 이야기하는 경이로운 경력과 수많은 이야기들.

Louis Massarelia 에디터 이민선

펠레가 말했다. “무엇보다도 이렇게 친구들과 어울려 축구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돼서 너무나 기쁘다는 말을 하고 싶다”고. 그 말이 너무나 진심으로 느껴진다. 어쩌면 축구 사상 최고의 선수 펠레는 자신의 놀라운 경력에 대해 수백만 번이 넘게 이야기했을 것이고, 같은 얘기를 계속 반복하는 게 지겨울 지도 모른다. 그런 속내를 숨기는 것이라면 실력이 대단하다.

하지만 69세의 그에게도 한 가지 불만이 있었다. 실전을 치를만한 체력이 없다는 점이다. “평상시에는 산토스의 축구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지낸다. 하지만 올해는 월드컵이 열리는 바람에 인터뷰도 많았고 아프리카까지 다녀오느라 시간이 없어서 몸 상태가 조금 엉망이다. 아직도 감각은 좋은 편이다. 그런 거 없어지는 게 아니니까. 머리 속으로도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지 다 알고 있다. 다만 컨디션을 잃으면 몸 뿐 만 아니라 뇌까지 느려진다는 게 문제다.”

펠레. 본명은 에드손 아란테스 도 나시멘토. 예전 소속 팀인 뉴욕 코스모스 재창단을 돕기 위해 런던에 왔지만 레이더 망을 잘 피해서 다니고 있는 중이다. 언론 계통 사람들조차 그가 런던에 왔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을 정도였다. 말하자면 이번 인터뷰는 특종 중의 특종인 셈이다.

하이드파크가 내려다 보이는 호텔 방에서 1시간이 넘도록 능숙하지 못한 영어로 지나간 추억을 회상하던 그는 역시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이번 달에 일흔이 되는 ‘축구황제’지만, 15세 때 산토스에서 신동 소리를 들으며 프로 무대에 데뷔한 뒤, 20년 후 미국에서 축구 전도사로서 현역에서 은퇴할 때까지 폭풍 같은 득점과 영광을 누리며 그 누구보다 충만한 쳥년기를 보냈다. 우리는 우선 그 모든 것의 출발점부터 이야기를 시작했다.


The early years
펠레는 브라질 남동부 미나스제라이스주(州)의 트레스코라송이스시(市)에서 에드손 아란테스 도 나시멘토란 이름으로 태어났다. 스트라이커였던 아버지가 준 프로 생활 선수로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상파울루주(州) 바우루에서 거의 빈민에 가까운 생활을 했다. 주앙 라모스 도 나시멘토(돈디뉴)는 보잘 것 없는 선수 수당 때문에 시간제 근무를 하며 생활비를 보탰고, 부인 도나 셀레스테는 방 두 칸 짜리 판자집에 사는 오빠와 친정 어머니의 원조를 받으며 에드손과 그 밑의 두 아이(조카와 마리아 루치아)를 키웠다.

미래의 펠레는 6세 때 처음으로 축구공을 찼다. 이미 그 전에도 빈민가에서 온갖 것들을 차고 놀았던 아이는 아버지의 소속 팀이자 자신이 유소년 팀 선수로 뛰었던 바우루 애슬레틱 클럽에 정식 입단하는 게 꿈이었다. 하지만 9세였던 1950년에 국가적 재앙이 발생하면서 펠레는 조금 더 큰 꿈을 꾸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영향은 어느 정도였습니까?
굉장히 컸어요. 우리 아버지는 지역 팀 바우루 애슬레틱에서 골을 많이 넣는 대단한 스트라이커였습니다. 저는 언젠가는 아버지 같은 사람이 되겠다고 항상 말했죠. 어렸을 때부터 그런 생각을 품고 자랐어요. 지금 같은 사람이 된다거나, 아버지보다 더 많은 성과를 거두게 될 거라고는 생각한 적이 없었지만 (손을 모으고 하늘을 바라보면서) 하나님 덕분에 더 잘 됐어요! 잊을 수 없는 기억이 있습니다. 1950년 월드컵이죠. 우선 미국이 잉글랜드를 이겨서 굉장한 화제가 됐어요. 그 다음에는 브라질이 우루과이와 결승을 치렀는데, 경기가 시작되기도 전에 브라질이 우승할 거라고 온 국민이 굳게 믿었죠. 하지만 재앙이 발생했습니다. 우루과이가 마라카낭 경기장의 20만 관중 앞에서 우승을 해버린 거예요. 브라질에서는 제일 유명한 곳이라 이름도 따로 있어요. ‘마라카나조’라고요.

어쨌든 그때 아버지가 울기 시작했어요. 아홉 살이었던 제가 “아빠, 왜 우세요?”라고 했더니 “브라질이 월드컵에서 지다니 믿을 수가 없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제가 말씀드렸죠. “걱정 마세요. 아빠. 내가 아빠를 위해서 월드컵을 따올게요.” 아버지를 위해서 월드컵에서 우승하겠다고 약속해버렸습니다. 8년 뒤, 스웨덴 월드컵에서 아버지와의 약속을 지켰습니다. 하나님이 제게 선물을 주신 것이죠.

타고난 재능이 뛰어난 건 누구나 아는 사실입니다만, 속도, 힘, 제공권 같은 신체적 조건도 대답합니다. 그런 것 역시 타고 났을까요?
아버지가 헤딩 골을 많이 넣으셨습니다. 항상 제게 그런 연습을 하라고 충고하셨죠. 어렸을 때 동네에 같이 놀던 어린 친구가 있었는데, 제가 기술이 좋았기 때문에 드리블을 하면서 골탕을 먹였죠. 그 때 아버지가 그러셨습니다. “이런 것은 너에게 도움이 되는 행동이 아니란다. 하나님이 주신 재능 덕분에 네가 축구를 할 수 있어. 지금 네가 남을 존중하면서 왼발이나 헤딩 연습을 열심히 한다면 누구도 막을 수 없는 훌륭한 선수가 될 거야.” 그래서 더 열심히 연습했어요. 바닷가나 극장으로 놀러 다니는 대신 공을 차고 컨트롤 하고 점프 하는 연습을 했습니다. 연습은 제 평생 동안 가장 중요한 일이었어요.

1970년 멕시코 월드컵 결승에서 헤딩으로 골을 넣었는데, 신체조건의 도움도 받았지만 두 눈을 똑똑히 뜨고 헤딩하는 연습을 열심히 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내려주신 재능과 연습으로 아무도 막을 수 없는 선수가 됐습니다. 모두 아버지의 충고 덕에 깨닫게 됐죠.

대부분의 브라질 선수들이 그렇듯 거리에서 축구를 시작하셨습니다. 경기 내적인 면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요?
옛날 선수들은 요즘에 비해 볼 컨트롤과 개인기가 훨씬 뛰어났어요. 거리에서 축구를 하면 좁은 공간에서 4~5명, 심지어는 10명의 선수와 겨루기 때문에 빠른 판단력을 습득할 수 있죠. 그래서 바우루에서 훌륭한 선수가 많이 배출됐습니다. 지금은 다르죠. 도로에 아스팔트가 깔렸고, 아이들은 체육관에 가서 실내 축구를 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누구나 거리에서 축구에 입문했죠.

Memories
별명
“아버지는 제게 에드손이란 이름을 지어주셨습니다. 미국발명가 토머스 에디슨을 열렬히 존경했거든요. 그렇게 위대한 사람의 이름이니까 저도 굉장히 자랑스러웠습니다. 그러다가 아버지의 소속 팀이 있는 상파울루주(州)의 바우루로 이사간 뒤로 여동생 루시아가 저를 ‘디쿠’라고 부르기 시작했어요. 에드손에서 에디뉴, 에디쿠… 그러다가 디쿠가 된 거죠! 당시 바우루에 아버지 친구분인 빌레란 골키퍼가 잇었어요. 아이들이 그 비슷한 발음인 ‘펠레’란 별명으로 저를 부르기 시작했어요. 전 에드손이라는 이름이 너무나 자랑스러웠기 때문에 펠레라고 불리는 게 싫어서 그 애들과 싸우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애들은 하지 말라면 더 하죠. 그래서 아예 펠레로 굳어버렸습니다. 지금은 내 이름이 좋아요. 많은 사람들이 불러주는 이름이고, 세상에서 내 이름이 어떤 의미를 갖는 지도 알기 때문이죠. 하지만 군대 시절을 함께 보낸 친구들은 아직도 에드손이라고 부르고 가족들은 디쿠로 불러요.”

동생
“제 동생이 선수 시절에 실력이 어땠냐고요? 지금은 변호사입니다! 동생은 어렸을 때 산토스에서 뛰었지만 한 집안에 뛰어난 축구 선수가 2명이면 세상이 너무 불공평하다는 얘기를 자주 했어요. 그래서 선수를 그만두고 학업에 전념했죠. 지금은 제 변호사로 일하고 있어요.”

첫 번째 공
“처음 축구를 시작했을 때 제대로 된 축구공을 살 형편이 안 돼서 양말 속에 신문을 넣어서 만들었어요. 어머니 양말로 공을 만들었다가 엄청나게 혼났죠. 코코넛으로 축구를 했는데 발로 찰 수는 없고, 그냥 드리블만 하고 놀았어요. 우리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연습을 많이 했어요. 제가 처음 갖게 된 가죽 공은 아버지가 소속된 바우루에서 받은 거예요. 축구공이 낡으면 아이들에게 나눠주곤 했는데, 아버지가 그걸 얻어오셨지만 상태가 영 좋지 않았어요.

나의 영웅
“나중에 가서 위대한 선수들을 만날 기회가 많이 생겼지만 프로 선수가 되기 전에는 제가 16세 때 산토스에서 테스트를 받을 수 있도록 데려가 주셨던 발데마르 데 브리토가 유일해요.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에서 활동하고 대표팀 선수로도 뛰었던 훌륭한 선수였습니다. 그리고 1960년 월드컵 결승에 출전했던 실력파 지지뉴도 존경했습니다. 그리고 물론 저희 아버지도 계시죠.”

처음 관전한 경기
“정확히 몇 살이었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아버지가 바라우 선수였기 때문에 아주 어릴 때부터 공짜 표를 얻어서 축구장에 갈 때 돈을 쓴 적이 없었어요. 상파울루 주에서는 실력을 인정 받는 팀이었는데, 제게는 아버지가 뛰는 팀이라 더 대단해 보였어요. 그곳에서는 아버지도 유명하셨습니다.”

인생의 전환점
“12~14세 무렵, 사람들이 ‘돈디뉴의 아들 실력이 괜찮다’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 친구분이셨던 발데마르 데 브리토가 저를 산토스 입단 테스트에 데리고 갔는데, 첫째 주에 계약을 할 테니 이곳에 남으라는 얘기를 들었어요. 산토스란 좋은 팀에서 그런 말을 듣고 나니, 처음으로 내가 그럭저럭 잘 하는구나 싶었어요.”

The Santos years
펠레를 두고 어렸을 때부터 축구 재능이 뛰어난 선수라고 전하는 것은 그에 대한 모독이나 마찬가지다. 발데마르 데 브리토 감독이 그를 산토스에 입단 시켰을 당시 데 브리토 감독은 구단 이사들에게 펠레를 “향후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가 될 것”이라고 공언할 정도였다. 어린 선수에게 굉장히 압박감을 주는 말이었을 테지만 펠레는 전혀 개의치 않고 자신에게 쏟아지는 기대를 충족시켰다. 상파울루에서 약 50마일 정도 떨어진 산토스에 펠레가 당도했을 때, 산토스는 한창 떠오르는 클럽이었다. 펠레가 산토스로 오는 순간, 산토스는 대기권을 뚫고 올라갔다. 그는 프로 데뷔 시즌 최다 득점자에 올랐으며, 산토스 입단 두 번째 시즌 만에 상파울루 주 챔피언 자리에 올랐다. 이후 펠레는 9회의 주 챔피언 타이틀을 따냈으며 또 5회의 브라질 전국 챔피언 타이틀 그리고 2회의 남미컵을 들어올렸다. 산토스가 1962년과 1963년 두 번 연속으로 각기 벤피카와 AC밀란을 꺾으며 인터콘티넨탈컵을 들어올렸을 때, 펠레는 벤피카와의 1, 2차전 그리고 AC밀란과의 1, 2차전 4경기에서 7골을 때려 넣는 괴력을 선보였다. 펠레가 산토스라는 팀을 만든 것은 아니다. 하지만 펠레야말로 산토스의 모든 것이다. 게다가 펠레는 산토스를 정녕 사랑했다.

1956년 산토스에 입단했을 당시, 산토스는 어떤 클럽이었나요?
당시의 산토스는 성장하고 있던 클럽이었어요. 우선 구단이 탄탄한 바탕을 지녔으며 또 어린 선수들에게 기회를 주는 클럽이었죠. 어린 선수들을 믿는 클럽이었기에 나도 입단하자마자 1군 선수로 뛸 수 있었던 겁니다. 내가 입단했을 때에는 콜시뉴라고 17세의 나이로 브라질 대표팀에서 뛰는 선수도 있었어요. 내가 뛰던 때는 상파울루 그리고 리우 데 자네이루 팀들이 빅팀이었는데 그 팀들 또한 나를 원했어요. 갑작스레 많은 스타들이 산토스에 모임으로써 많은 관심이 쏟아지던 때였습니다.

프로 축구 선수 생활을 시작한 뒤, ‘프로 축구 선수가 나에게 천직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던 때는 언제였나요?
산토스 입단 이후 몇 개월이 지났을 때였어요. 당시 우리는 코린치안스와 경기를 하게 됐습니다. 아, 당신들이 아는 그 코린치안스가 아니라 산탄드레라는 도시에 있는 2부 리그의 코린치안스였어요. 그 때 하프타임이 끝나고 교체돼서 들어갔는데, 프로 무대 첫 골을 넣었습니다. 그 순간을 영원히 잊지 못해요. 내 경력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순간이었습니다.

프로 축구에 데뷔하고 나서 1년 만에 당신은 스타 선수가 되었고 월드컵 우승까지 경험해냈어요. 짧은 시간 안에 삶이 너무나 바뀌었는데 어떤 기분이었나요?
산토스 데뷔 2년 차에는 외출하는 것 조차 힘들었어요. 17세의 나이로 월드컵을 뛴 선수다 보니 사람들이 다 알아봤습니다. 국가대표팀 데뷔전을 16세의 나이로 치렀죠. 1957년 아르헨티나 대표팀과의 경기였어요. 경기에서 팀은 1-2로 졌지만 내가 골을 넣었고(당시 기준으로는 펠레는 국가대표 무대 역대 최연소 득점자가 되었다.) 어린 내가 골을 넣자 사람들 모두 정말로 기뻐해줬어요. 하지만 예전과 비교하자면 지금의 환경은 많이 변했어요. 어린 선수들 같은 경우 기회는 자주 얻지만 끊임없이 믿어주는 경향은 덜 한 것 같습니다.

월드컵 우승을 하고 산토스에 복귀했을 때, 혹시 팀 동료들이 질투하지 않았나요? 월드컵 우승 이후 팀 동료들의 반응은 어땠나요?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질투 같은 것은 없었어요. 오히려 훨씬 잘해줬습니다! 당시 월드컵에 뛰었던 산토스 선수가 나를 포함해 세 명이었어요. 미드필더 지투와 페페가 있었는데 페페는 월드컵 본선 경기에서는 뛰지 못했어요. 월드컵 이후 산토스 삼총사가 다시 뭉치게 된 셈이었죠.

1958년 월드컵이 끝나고 나서 1년간 군 복무를 했다는 소문이 있는데 사실인가요?
사실이에요. 1958년 10월에 18세가 됐는데 그 때 군복무를 하게 됐어요. 정말로 환상적인 경험이 었습니다. 내 아들 그리고 아이들 모두에게 충고 한 마디 하자면 다들 군대를 가라고 말하고 싶어요. 많은 것을 배우기 때문이죠. 내게 군대는 참으로 많은 것을 배우게 된 곳이에요. 군대에서 요리하는 법, 사람을 대하는 법, 웃 입는 법, 그리고 세탁과 다림질까지 모든 것을 배웠어요. 굉장한 경험이었죠. 정글에서 살아남는 법 같은 것들도 배웠죠.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군생활을 통해서 규율을 배웠다는 거예요. 축구에도 군대 생활을 통해 배운 규율이 도움이 됐어요.

산토스에 남기 위해 유럽 행을 여러 번 고사했던 것으로 압니다. 클럽의 어떤 면이 좋아서 팀을 떠나지 않았던 것인가요?
내 선수 생활 시절에는 선수들이 그다지 이적을 많이 하지 않았어요. 클럽은 가족 같아서 같은 선수들이 3~5년 씩 같이 뛰었어요. 돈을 조금 더 받기 위해서 팀을 바꿀 이유가 있나요? 뉴욕 코스모스에서 뛰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간 것이 나의 유일한 이적이었습니다.


2편에서 계속

http://www.sportalkorea.com/newsplus/view_sub.php?gisa_uniq=20101130111707&key=&field=&section_code=9014&search_key=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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