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2차례 귀신에 제사"
마한사회는 50여 소국으로 나뉘었다. 소국 중에는 정치 지역과는 달리 별도의 제사를 지내는 지역이 있었는데 이를 소도라 한다. 국민대 김두진 교수는 논문'마한 종교사회의 성격'에서 마한의 소도신앙은 귀신에게 제사지내는 단계의 제의로 귀신신앙이라고도 불리우는데 사실 마한사회에서 귀신을 섬긴다는 것은 조상신에 대한 제사로 이해해도 무방하다고 밝혔다.
해마다 5월이 되면 이 지역에서는 씨 뿌리기를 마치고 귀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대목을 세워 북과 방울을 매달고 귀신을 받들었다. 삼국지에 의하면 이 시기 마한지역에서는 떼를 지어 노래와 춤을 즐기로 밤낮으로 술을 마시고 즐겼다. 춤은 수십명이 모두 일어나 뒤를 따라가며 땅을 밟고 구부렸다 치켜들었다 하면서 손과 발로 서로 장단을 맞췄는데 이 모습은 중국의 탁무와 흡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의식은 10월 농사일을 마치고 나서도 반복됐다. 타 사회와는 달리 마한에서는 토템신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삼한 중의 하나인 진한의 소연맹국에서는 토템신의 흔적이 남아있는데 이는 진한의 토착민들을 중심으로 강한 씨족적 전통을 유지할 수 있었고 이러한 사회적 배경이 일찍부터 토템신을 성립시킬 수 있었다.
역으로 마한이나 변한에서 토템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은 그 지역의 토착민들의 강한 씨족적 전통이 약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중국과 교류한 마한
"한랭한 기후, 바닷길 열어"
초기 마한의 주거지는 청동기시대의 움집 형태였다. 움 깊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얕아졌고 고상 가옥 형태를 갖춰갔다.
백제사 전공인 문안식 박사는 "신석기시대에서 청도기시대까지는 사람들이 움집에서 거주했으나 삼한시대에 이르러 농경사회에 적합한 지상주거의 목조건축에서 생활하게 됐다"고 밝혔다.
마한은 해로를 통해 중국과 문화교류를 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해남 군곡리와 여수 돌산ㆍ거문도에서는 중국유물인 화천ㆍ철도자ㆍ오수전 등이 출토됐다.
목포대 최성락 교수는 "해남 군곡리 등에서는 마한과 관련된 유물과 함께 중국유물이 많이 나왔는데, 이를 통해 마한이 해로를 통해 중국과 문화교류를 이루었던 사회였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해로를 통한 교류는 당시 한반도의 기후와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
전남지역을 비롯한 한반도 일대는 100년~250년 사이에 한랭기로 접어들었는데, 냉해가 극심해 지면서 곡물생산량이 급감해 사회경제적으로 위기에 직면했다.
문 박사는 "내륙에서 농사를 짓던 사람들이 해안으로 터전을 옮기게 되면서 바다를 이용한 해양자원의 이용이 증가하게 됐다"면서 "이와더불어 해로를 이용한 중국과의 활발한 교역도 이루어졌다"고 밝혔다.
한랭기가 초래한 가혹한 생활환경 속에서도 마한 사람들은 철제 도구의 발전과 도작농경의 확대,수리시설의 확충등을 통해 사회발전을 가속했다.
박상지 기자 sjpark@j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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