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보검의 수수께끼
경주의 한 고분에서 아름다운 황금칼이 출토됐다.
미추왕릉 지구의 계림로 14호분으로 경주시내의 한 민가 아래 오랜 세월 묻혀 있던 이 무덤은, 도로공사를 하는 바람에 적석이 발견됨으로써 그 존재가 알려지게 된 것이다.
만약 도로공사가 없었다면 이 놀라운 보물은 여지껏 햇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계림로 14호분에서는 황금칼 외에 두 쌍의 귀고리와 비취 곡옥 두 개, 눈에 녹색 유리알을 박은 사자 모습 허리띠, 마구류와 무쇠 대도 등이 출토됐다.
황금칼은 길이 36㎝, 최대폭 9.3㎝의 단검으로, 진홍색 가닛(석류석) 등의 보석과 세선립금세공(細線粒金細工)으로 표면 전체가 눈부시게 장식돼 있다.
칼자루에 ‘켈트 태극’문양
칼자루 부분에는 삼태극 무늬가 새겨져 있다. 세 개의 태극 무늬 속에 꽃봉오리나 잎사귀 셋을 그려 넣는 디자인은 켈트인들이 즐겨 쓰는 문양으로, 흔히 ‘켈트 태극’이라 불린다.
이 황금칼에 상감돼 있는 진홍빛 석류석의 산지는 주로 체코·폴란드·러시아 지역이었다. 켈트인이 거주한 지역 또한 이 일대였고, 그들이 살았던 유적지에서 석류석을 상감한 장신구들이 많이 출토되고 있었다.
황금칼의 장식이 기본적으로는 그리스·로마의 전통 문양과 기법으로 돼 있으면서, 칼의 중심부를 구성하고 있는 칼자루 부분에 특별히 ‘켈트 태극’을 박아 넣은 점으로 미루어 켈트인의 강한 민족의식을 읽을 수 있다.
신라인과 켈트인은 어떤 관련이 있었던 것일까.
켈트인의 본거지는 중부 유럽이었으나 기원전 5세기에서 1세기에 걸쳐 동서남북의 사방으로 민족 대이동을 시작, 일부는 이베리아반도나 이탈리아 북부로, 바다를 건너 잉글랜드나 아일랜드로, 트라키아나 소아시아로 각각 이주했다.
그리스시대에서 로마시대에 걸쳐 트라키아 지역에 뿌리를 내린 켈트인은 로마 문화를 재빨리 흡수해 나갔다. 로마인은 켈트인을 ‘갈리아인’이라 불렀고, 키가 크며 금발에 푸른 눈, 흰 살결을 지녔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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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르가 남긴 <갈리아 전투기>는 다름 아닌 그 켈트인(갈리아인)과의 전투기록이다. 이 기록에 따르면 켈트인은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이 명확하게 구분돼 있었다. 또한 귀족은 노예를 거느렸으며, 여성은 지위가 높고 때로는 전투에 참전하기도
했다.
한편 노예는 여름철에는 바지만 입고 일을 했다고 한다. 이
기록은 경주 황남동 98호 북분에서 출토한 구갑동물인물문배(龜甲動物人物文盃) 중의 상반신을 벗은 바지 차림의 인물도와 부합한다.
바지는 로마인의 의복에는 없고, 기마민족 특유의 옷이라는 점에서 이 인물이 켈트족의 노예를 표현한 것임을 능히 짐작하게 한다.
이 은그릇의 테두리 문양이 그리스·로마의 전통 문양이라는 점에서 그것이 로마 문화가 받아들여지고 있는 고장에서 만들어진 작품임을 깨닫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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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나 기술이 다소 서툰 점으로 미루어, 로마의 숙련된 금공사가 아닌, 켈트족의 기술자에 의해 만들어진 그릇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이들 작품이 모두 신라의 유적지에서만 출토된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백제·고구려·중국의 무덤 등에서
켈트족의 작품이 발굴되지 않는 것은 켈트인이 신라인하고만 교류한 탓이다.
‘초원의 길’따라 흉노족이 중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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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북쪽 기슭의 로마 문물을 동방으로 나르는 역할을 맡고 있던 흉노는 남러시아에 정착, 스텝루트(초원의 길)를 무역로로 삼고
있었다. 따라서 실크로드를 무역로로 삼고 있던 중국이나 고구려·백제에 들를 수는 없었다. 로마의 문물이 이들 나라에 전파되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다.
한편 켈트인은 무쇠의 반제품과 금·은을 사기 위해
직접 신라를 찾았다. 신라에 올 때는 로망·글라스를 비롯한 금·은 완제품을 가지고 왔다. 기술자도 데리고 왔을 것이다. 흉노는 이
교류의 안내인이 되기도 했다. 흰자작나무 제품의 옛 고장 또한 스텝루트에 있었다.
<인재개발원 교수·작가>
http://www.posco.com/homepage/docs/kor/jsp/news/posco/s91fnews002p.jsp?idx=18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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