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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dnesday, March 20, 2013

“일본 왕실은 5C 후반부터 완벽한 백제 왕가(百濟王家)”(水野 裕 [日本古代の國家形成] 1978)

□(사단법인) 마한역사분화연구회 세미나
2007년 행사 일정

4/7 (토)
12:00~13:00
 중식(나주 소재)

13:20~14:20
 나주시 반남면 신촌리 고분군 참관

14:30~17:00
 반남 농협 대회의실 세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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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시다니(일본 규수대학 교수,동북아역사학회 회장)

-.김병모(2004년 세계박물관대회 대회장,한양대 교수)

-.지건길(전 국립중앙박물관 관장)

-.김정호(전 농업박물관 관장,진도문화원장)

-.홍윤기(외국어대 교수)

-.최성락(목포대 교수)

-.배기동(한국박물관협회 회장,한양대박물관 관장)

-.채바다(고대항해탐험연구소 소장)

-.유인학(사)마한역사문화연구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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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0~19:00
 영암군 시종면 옥야리 남해당 및 마한공원 참관
 민속공연 및 문화공연 마한공원
19:00~20:30
 석식 야외 만찬(바베큐 등)

22:00
 숙박(영암군 소재)

4/8
(일)
 07:00
 기상

07:00~08:30
 조식

08:30~10:00
 왕인박사 답사

10:00~12:00
 보림사(장흥)

12:00~13:00
 식사(장흥소재)

13:00~15:00
 대흥사 답사(해남)

15:00~16:00
 녹우당 답사(해남)

16:00~21:30
 서울 출발 및 해산















[강연문]


마한으로부터 일본에 건너간 농업및 철기문화

                                      홍윤기

                                       일본 센슈대 문학박사
                                       한국외대 교양학부[일본사회와 문화]담당교수


1.
 일 본고대의 온갖 문화가 한반도로부터 일본으로 건너가게된 중심적 시기를 일컬어 이른바 “야요이 시대”(BC3~AD3)라 일컫는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한반도로부터 발전된 벼농사와 거석과 청동기및 철기 문화 등이 주로 일본 큐슈(九州)로 전파되었다. 그와 같은 각종 한반도 문화는 “목지국”(目支國)이었던 “마한”(馬韓, BC3~4)을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그것은 마한의 선박 문화가 영산강 일대에서 발전하므로써 비로소 마한과 큐슈 간의 고대 한일해협을 건너다닐 수 있는 항로가 트였기 때문이다. 이에 이 지역 지배층과 농민들의 큐슈 지역 이주가 집단적으로 왕성하게 이루어지게 되었다고 본다.

 일 본의 동물자원 육종학자 타나베 유이치(田名部雄一) 교수(아자후대학 수의학과)가 필자에게 보내준 논문 [개로부터 찾아내는 일본인의 수수께끼]([犬から探る日本人の謎]1985)에는 다음 같은 내용이 주목된다. “지금으로부터 2000년전 무렵, 조선 반도에서 <야요이인>(彌生人)이며 <고분인>(古墳人)들이 건너 오면서 새로운 개를 데리고 왔다. 그 이후로 인간은 혼혈(混血)하여 현재의 일본인들이 성립되었고, 그와 마찬가지로 개도 혼혈하여 대다수의 일본 견종(日本犬種)도 성립되었다. 개는 도저히 저 혼자 한반도로부터 거센 물결이 파도치는 먼 바다 건너 섬 땅으로 갈 수 없다”.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이 건너 올 때 개도 함께 데리고 왔다는 것.

 일 본에서 말하는 ‘야요이인’이란 서기전 3세기(BC.3) 이전부터 한국 남부로부터 일본으로 건너 간 일본 도래 한국인을 가리킨다. 또한 ‘고분인’은 서기 3세기(AD.3) 이후 한국인의  일본 도래인들을 각기 시대적으로 일컷는 구별이다. 한국에서 일본으로 건너 간 사람들과 일본 선주민(先住民)이 혼혈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일본 열도에 한국개도 건너 가서 혼혈하였다는 타나베 유이치 교수의 연구는 자못 실감나는 내용이다. 그러나 고대 한국인들은 개만을 데리고 일본 열도로 건너 간 것은 아니다.


2.
 농 업 문화의 발전 단계는 석기시대를 원천적으로 청동기시대를 거친 철기시대에 와서 마침내 한국제 굉이며 삽과 낫, 칼 등 실용적 철제 농기구가 비로소 큐슈지역에 전파되어 그 지역 농업 경작을 발전시켰다. 물론 그 이전에는 역시 한국으로부터 목제 농기구도 거너 갔고 현지 일본 선주민들도 목제 농기구를 만들게 되었다. 그와 같은 각종 농기구의 일본 진출은 마한이 그 중심에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일본 북큐슈 사가현 동부의 [요시노가리](吉野ケ里)유적(사가현 동부)에서 확인할 수 있다. 물론 가야 지역으로부터도 부분적으로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큐슈 남부에서는 사이토바르(西都原, 지금의 미야자키현 사이토시) 유적이며 [쿠레이시바르](礫石原) 유적(나가사키현 시마바라반도), 하라야마(原山) 유적(역시 나가사키현 시마바라반도) 등등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마 한(馬韓)을 중심으로하는 고대 한국인들은 농기구와 함께 쇠로 만든 각종 생활 도구며 대장깐 시설까지도 모두 가지고 왜섬으로 잇대어 건너 갔다. 그 때문에 일본 선진 농업 문화 발생의 모체인 큐슈 지역 등으로의 철제 농기구의 일본 보급에 있어, 또한 마한(馬韓) 등이 일본에 미친 언어 문화적인 영향도 매우 컸음을 살필 수 있다. 그 단적인 예는 고대 농기구 등 명칭에 [한](韓)이라는 한자어가 붙고 있는 것이 고대 일본 역사 문헌들에 나타나고 있어 주목할만 하다. 이를테면 일본 고대 역사 기사에 보면 대장깐을 카라카누치(韓鍛冶/한단야)로 써왔던데서 마한 등으로부터 철기 생산 산업이 큐슈 지역으로 전파된 것을 실김하게 된다. 그러기에 무쇠로 만든 땅파는 삽을 고대 일인들은 카라사비(韓鉏/한조)라고 불렀다.

 카 라사비의 “사비(鉏)는 조선어의 ‘삽’(SAP)과 동계어(同系語)이다”라고 카나자와 쇼사브로(金澤庄三郞,1872~1967,國學院大學 國語科 교수) 박사가 밝혔다([廣辭林]1925). 카나자와 쇼사브로 교수는 소가 끌게되는 ‘철제 쟁기’는 ‘카라스키’(韓鋤)라고 다음처럼 상세히 설명했다. “카라스키’(韓鋤)는 넓적한 쇄로 날을 세워 만든 밭갈이 경작 기구로서 대부분이 소에게 묶어서 논밭을 가는데  사용했다. 이것의 기원(起源)은 매우 오래된 것으로서, 현재 사용하는 것은 개량을 가하여 상당히 정교하게 만들게 되었다”. 여기서 카나자와 쇼사브로 교수가 쟁기의 기원이 “매우 오래된 것”이라는 강조는 야요이시대 전후에 마한 등으로부터 건너온 것이 한국 쟁기의 발자취인 것을 강조해 밝히고 있다. 그 뿐 아니고 가을 추수로 농작물을 타작할 때의 ‘도리깨’도 역시 ‘한’(韓)자를 머리에 붙여 ‘카라사오’(韓竿)라고 불러 왔음을 카나자와 쇼사브로 박사는 언급했다. 이와 같이 철제 농기구 뿐 아니고 나무로 만든 목제 농기구 역시  ‘한’(韓)자를 붙여 농기구명을 써왔던 것을 우리는 크게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러기에 일본 고대의 각종 기구에는 마한 등에서 새롭게 건너 왔다는 ‘메이드 인 코리어’의 한(韓)자들이 잇따라 들러붙었다. 교토대학(京都大學 史學科) 카도와키 테이지(門脇禎二) 교수는 한반도로부터 철제 농기구가 건너가기 전, “일찍부터 일본 섬나라에 살던 사람들은 원시적인 생활을 했다. 논농사도 지었다고는 하지만 처음에는 골짜기의 물을 막아서 썼다. 농사는 나무로 만든 괭이나 삽으로 밭을 갈았다. 벼가 익으면 손이나 돌로 만든 칼로 벼이삭을 땄다”([古代國家と天皇]1957)고 한다. 그와 같은 목제 농기구며 돌칼 등 역시 마한 등 한반도 남부로부터 큐슈 지역으로 옮겨간 것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왜냐하면 고대 일본은 경작 농업이 없이 맨손이나 나뭇가지 따위 꼬챙이로 바닷가의 조개를 캔다, 나무 열매나 따먹는 원시적인 미개한 채집 행위로 식생활을 일관해 왔기 때문이다.

 도 쿄대학 사학과 야와타 이찌로(八幡一郞) 교수는 “벼농사는 모름지기 북큐슈로부터 시작되어 세도내해(瀨戶內海, 일본 열도 서쪽의 길고 큰 내륙 안쪽 바다)를 따라 동쪽으로 옮아 갔는데, 이것은 야요이식 문화를 낳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 무렵 북큐슈와 남조선과는 매우 밀접한 관계였다. 남조선은 최근에도 그렇드시 쌀농사의 최적지이며, 2천년 이전부터 일본과 벼농사가 서로 이어졌다”(‘日本史の黎明’ 1953)고 했다. 이것은 영산강 유역 곡창 지대의 벼농사가 이미 야요이 초기부터 일본 북큐슈 지방으로 전파된 사실을 밝힌 것이다. 여기서 더욱 구체적으로 마한 지역 농경 문화의 일본 북큐슈 지역 전파에 관하여 살펴보자.

 지 금부터 약 2300년전 이전부터 마한 등 한반도 남부 지역으로부터 일본 큐슈 등지로 건너 간 고대 한국인들이 ‘벼농사법’도 가지고  건너 간 것에 관해 카도와키 테이지(門脇禎二) 교수가 고고학적인 측면에서  다음처럼 밝힌 것은 매우 주목된다.

 “모 름지기 일본의 벼농사 문화는 직접적으로 남조선을 거쳐서 전하여 온 가능성이 가장 크다. 남조선 특유의 바둑판형 고인돌(支石墓)이 북큐슈의 조몬시대(BC3세기 이전의 고대) 후기말 경부터 야요이 시대(BC3~AD3) 전기(前期)에 만들어졌다고 하는 것과, 남조선의 지석묘에도 들어있는 특유한 마제 석기(磨製石器)가 북큐슈의 야요이시대 전기의 유적에서도 발견되었다는 것 등은 야요이 문화 형성기에 남조선과 북큐슈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고 하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나가사키현의 시마바라반도(島原半島)에 있는 하라야마(原山) 유적을 조사하였더니 조몬시대 만기(晩期)의 토기와 함께 남조선식의 고인돌 무리(群)가 발견되었다. 또한 시마바라 반도의 쿠레이시바르(礫石原) 유적에서는 벼와 직물(織物)이 짓눌린 흔적이 있는 토기가 발견되므로서 이미 조몬시대 만기에 남조선의 문화와 접촉이 있었으며, 야요이 문화의 주요 구성 요소중의 벼와 직물이 조몬 만기의 사회에 전해진 것을 알게 되었다”([體系日本歷史]1967).

 교 토대학 사학과 우에다 마사아키(上田正昭) 교수는 “야요이 문화의 물결은 조선과 중국으로부터 밀려 왔다. 벼농사는 조선반도 남부로부터 북큐슈로 전파되었다는 설이 설득력이 넘친다고 보며, 여하간에 벼문화는 도래한 것임에 변함이 없다. 일본 열도에 많은 일본형으로 불리우는 벼 품종은 중국 장강 하류 유역을 거쳐 조선 남부로부터 들어 온 것을 살필 수 있다. 벼수확에 쓰인 마제 돌칼중에서 일본 열도에서 많이 출토되는 반달형 직인(곧은 날)과 반달형  외만인(바깥 쪽 둥근 날) 형식의 것은 중국과 대만및 조선 남부로 이어지는 것”([倭國の世界],1976)이라고 중국을 경유하여 한반도 남부 지역으로부터 큐슈의 야요이 문화가 큰 영향을 받았음을 지적했다. 여하간에 한국 남부가 직접 일본 야요이 문화를 최종적으로 이끈 지역임을 강조했다.

 큐 슈대학의 니시타니 타다시(西谷 正)교수는 [요시노가리]유적 현장에서 “일본의 청동기 문화는 고스란히 마한으로부터 북큐슈로 건너 온 도래 문화이다. 벼농사를 비롯하여 금속 철기문화며 마제석기에 이르기까지 마한의 온갖 문화는 큐슈땅에 넘쳐왔다”(KBS-TV, 2004.9)고 단정한 것도 유명하다.

 “일 본 왕실은 5C 후반부터 완벽한 백제 왕가(百濟王家)”(水野 裕 [日本古代の國家形成] 1978)로서 백제인 오진왕(應神王,5C 후반)의 제4왕자인 “닌토쿠왕(仁德王, 5~6C)은 백제인 왕인(王仁)박사의 천거로 왕위에 등극했다”(홍윤기 [仁德王陵에서 도굴된 ‘백제 큰칼’][세계일보]2007.3.14. 26면). 닌토쿠왕자(仁德王子)의 스승이며 왕실의 정무장관(西文首)이었던 "왕인(王仁)이 와카(和歌, [難波津歌])를 지어 제4왕자에게 왕위에 오를 것을 권유했다”(홍윤기 [일본 최조의 和歌를 창시한 王仁博士와 韓神歌] [‘現代文學] 1997.2월호/紀貫之 [古今集] 905).  바로 박사 왕인이 뒷날인 5세기 후반 마한땅의 영산강을 떠나 대마도(王仁을 해신,海神으로서 제사모시게된 와타쓰미신사 지역/楺直幹[竟宴和歌]943)를 거쳐 북큐슈의 사가현 동부 요시노가리 터전인 히로이시 지역으로 상륙했다는 것도 우연이 아닌 것 같다. 현재 이곳에는 왕인천만궁(王仁天滿宮) 사당이 이어져오며 ‘왕인석이상’(王仁石人像)도 보존되어오고 있다. 우연이라기 보다도 전남 영암 월출산(月出山) 석굴(王仁이 공부했다는 곳) 앞의 석인상(石人像)과도 매우 흡사한 형태여서 앞으로 상호 비교 연구 과제로 본다.

 교 토시립예대 우메하라 타케시(梅原 猛) 교수는 “니니기노미코토(일본 역사 신화의 일본 開國神/필자 주)가 이끄는 천손족(天孫族)이 모름지기 조선반도로부터 건너와 큐슈 남부에 상륙하여 타카치호(高千穗峯, 북큐슈 미야자키현과 카고시마현 경계의 1574m의 고산 지대) 지방으로 밀어들었다. 벼농사 기술을 가진 이 집단은 차츰 그 세력을 사이토바르(西都原)에 까지 펼쳤다”([ニユーズウイーク]日語版, 2002.3.20.)고 밝혔다. 이는 영산강 유역 마한인 등이 북큐슈로 상륙한 일본 정복의 ‘신화 민족’(神話 民族)이라는 지적이기도 하다.

 “이 사이토바르 유적지 고분군(169호)에서는 선박 모형(길이 101cm)의 ‘하니와’(왕릉 등 큰 무덤 매장자의 사후 호위를 위해 찰흙으로 구워 만든 부장품)가 발굴되었다”고 도쿄대학 오오바야시 타료(大林太良, 민족학) 교수는 지적했다([海をこえての交流」1986). 10여명 이 상 승선 가능한 형태의 이 선박 모양은 마한 등 일찍부터 선박술이 발달된 한반도 남부 영산강 일대에서 사이토바르 등 큐슈 바다를 왕래했던 발자취라고 본다. 왜냐하면 일본에서는 4백년 이상 뒷날인 7세기 초에 조차도 선박술이 크게 뒤져 당나라로 공부하려 가는 승려 등이 뱃편을 구할 수 없어 고통 받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일본 조정에서는 7세기부터 서로 교류가 친숙해진 신라에 부탁하여 일본 사신과 학승 등의 신라와 당나라 등 해외 파견에 있어 ‘신라배’의 큰 신세를 져야만 했다. 그 사실을 큐슈대학 다무라 엔쵸(田村圓澄) 교수는 다음처럼 논술했다. “서기622년에  신라배를 얻어타고 당나라로부터 귀국한 학생이며 학문승이 야마토 조정에다 보고하기를 <지금 당나라에 체류중인 일본 학문승과  학생들은 모두 공부가 끝나서 빨리 귀국할 수 있도록 마중하여 달라고들 합니다>라고 진언했다. 그러나 야마토 조정에서는 끝내 마중할 배를 보내지 못했다. 당나라로부터 돌아오는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신라의 당나라 사신이가 타고오는 뱃편을 얻어타고 일본으로 돌아오고 있었다”([古代朝鮮と日本佛敎],1989).

 오 카자키 케이이치로(岡崎桂一郞) 교수가 지금부터 93년 전인 서기 1913년에  저술한 [일본미식사](日本米食史, 1913)라는 책이 있다. 일본 사람들이 어떻게 쌀로 밥을 지어먹게 되었는지 그 발자취를 본격적으로 규명한 중요한 문헌이다. 이 저서에서 오카자키 교수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우리 일본사람들이 쌀밥과 야채를 주식으로 삼게 된 것은 한국으로부터 불교가 건너 온 뒤부터이다. 쌀은 불교 신앙과 연관이 크다.”
 백 제 성왕(제26대 聖王,523~554재위)에 의해 불교가 처음으로 일본에 전해진 것은 서기 538년이다. 일본 불교 왕조 역사서인 [부상략기](扶桑略記,13C)에 보면, “킨메이천황 당시인 신미년(서기 551년) 3월에 백제 국왕(제26대 聖王, 필자 주)께서 보리종자 1천석을 보내주셨다” 라는 기사가 있다. 이와 같이 백제 성왕은 일본으로의 불교 전파 뿐 아니고 다시 뒷날에는 보리종자 1천석이라는 방대한 분량의 곡식도 보내주면서 일본 땅에서 보리도 쌀과 함께 경작하도록 가르쳐주게 되었다. 그러나 사실상 “킨메이왕이라는 왜왕은 백제로부터 왜나라로 건너가 왜국왕을 겸임했던 백제 제26대 성왕(523~554 재위)이었다”(홍윤기 ‘일본고대사 문제점의 새로운 규명’ [일본학] 제24집, 동국대학교 일본연구소 발행, 2005.12)는 사실을 언급해 두련다. 이 대목은 후일 상세하게 밝히련다.

3.
 이 제 결론짓는다면 야요이 문화는 마한 등 남한의 이주민들이 큐슈 지역으로 대단위 집단이 게속하여 건너가 성립시켰다고 단정하련다. 처음부터 이 야요이 문화의 총체적인 형태는 벼와 마제 석기, 지석묘며 단지와 옹기 등 야요이식 토기에다 나무로 만든 농기로서 논농사 등 농경 문화를 발전시켜 준 것이었다.

 북 큐슈 등 서(西)일본에서는 주로 마한 등 남한 도래인들이 정착하게 되었고 선주민들과 혼혈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와 같은 사실은 서일본에서 발견된 야요이 전기의 인골(사람뼈)에서 밝혀지고 있다. “서일본의 야요이 전기의 인골에는 키가 작은 죠몬인과 평균 신장 163cm의 키가 큰 남성 인골이 있다. 한국 남부로부터 건너 온 도래인의 피를 받아서 비로소 야요이인이 생겼다고 본다”(靑木美智男外 [日本史], 1993). 그러므로 키가 작고 왜소한 선주민들인 죠몬인들이 살고 있던 곳으로 벼농사와 철기문화를 가진 키가 큰 마한인 등이 건너 가서 선진국 문화로서 야요이 문화를 일으키게 되었다느 것. 결론적으로 거듭 밝히자면 “야요이 문화’라는 것은 분명히 한국으로부터 들어 온 것이다”(吉田晶 [シンポジウム 吉備の盛衰] 1974)라고 일본 고고학자들은 주저없이 단정했다.

 농 사법을 모르는 미개한 사람들을 지도하는 몸이 크고 키가 큰 선진국 한국 사람들이, 그들 키도 작고 순진한 왜국의 선주민들을 지배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취락들이 모여서 큰 부락이 되고, 마한 등지에서 건너가 부락을 이끈 수장(首長)들은 이웃 지역 수장들과 손잡고 야요이문화의 선봉이 되었다. 수장들이 죽으면 마한에서처럼 장엄한 장례식을 거행하고 시신을 항아리 속에 넣어서 고인돌에다 장사 지냈다. 항아리를 묻은 묘지를 일컬어 옹관묘(甕棺墓)라고 부른다. 관 속에는 구리거울(銅鏡)이며 구리칼(銅劍) 등을 함께 넣었다. 옹관 대신 돌로 만든 석관도 썼다. 석관은 돌로 만든 지석묘 밑에다 모셨다. 지석묘 밑에 옹관을 모시기도 했다. 북큐슈에서는 그와 같은 옹관묘며 지석묘가 많이 발견되었다. 이와 같은 것은 한국 남부의 지석묘등과 공통성을 나타내고 있다.(尾藤正英外 [日本史], 1982)

 “한 국의 지석묘 분포는 한국 남부에도 매우 많거니와, 중부지역 그리고 평안남도와 황해도 지역에도 있다. 한반도 남쪽의 영산강.금강.낙동강 하류 등에서도 많이 발견되었다. 특히 호남지방에는 아직도 수천 개가 남아 있다”(崔夢龍 ‘全南地方 支石墓의 形式과 分類’ [歷史學報. 第78輯] 1978). 이와 같이 고인돌이 영산강 일대에 집중적으로 많다는 것은 고대 마한이 다른 어떤 지역보다도 일본에 각종 죠몬문화와 야요이문화를 지배적으로 영향 끼쳤다는 것을 입증한다고 본다. 물론 “고인돌은 동남아 지역에도 몇 가지 예가 발견되고 있어서 그 분포에 관한 연구는 더 심층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또한 유라시아 등지에서 더러 볼 수 있는 거석 문화도 일종의 고인돌로서, 북유럽.영국.프랑스.시베리아 반도.북아프리카.지중해 연안.스위스 등지에서 발견된 바 있다”(Daniel, G ‘The Megalithic Builders of Western Europe. Harmonds Worth’ Penguin Books, 1963.5)는 리포트다. 그러나 마한 지역이 종주적으로 우리나라 고인돌 중심지라는 것과 일본 고대문화 성립의 실질적 모체라는 것을 거듭 살피게 해준다.

 따 질 것도 없이 이와 같은 죠몬.야요이 문화는 급속하게 일본 각지로 펴져가게 되었다는 것도 부기하련다. 즉 북큐슈로부터 시작하여 세도 내해를 거쳐 일본 서부 지역으로 널리 퍼지게 되었다. 오늘의 오사카(大阪) 지역을 비롯해서 나라(奈良)며 쿄우토(京都) 등등으로 급속하게 전개되어 갔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야요이 중기에 이르자, 야요이 문화는 오늘의 도쿄(東京) 등 동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카나가와(神奈川), 시즈오카(靜岡), 치바(千葉) 등등 태평양 연안 일대로도 전개되었다. 그뿐 아니라 야요이 후기에는 일본의 토호쿠(東北) 지방인 아오모리 (靑森), 미야기(宮城), 야마가타(山形), 후쿠시마(福島) 등등 지역으로까지 널리 전파되었다. 이것이 모두 영산강을 주축으로하는 마한 문화의 역동성이라고 해도 지나친 주장이 아닐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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