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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dnesday, July 2, 2014

로마vs이슬람 역사

중세, 시작하다 5 -새로운 세력의 등장과 구체제의 붕괴- -[역사갤러리]

 

-7세기의 두 제국 영토-

서방에서 이민족들이 구 서로마 영토를 가지고 땅따먹기가 한창일때 동방의 두 거대제국은 한판 신나게 싸웠고 결국 로마제국의 승리로 전쟁은 막을 내렸다.

2차대전의 소련과 마찬가지로 로마는 승리했지만 엄청난 인구감소와 문화피해를 입었고 그것은 페르시아도 마찬가지.

두 제국 모두 전쟁이후 국력복구에 만전을 기울이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아라비아의 사막에서 새로운 침략자들이 고대제국을 공격해왔다.

 

-이슬람교도-

"땅내놔 개년들아!!"

이슬람교였다.

최초의 예언자 마호메트가 전파한 후 이슬람교는 아라비아반도 전체로 퍼져갔고 두 제국의 세력권하에 있던 아라비아 반도는 그들이 서로 물고 뜯고 싸울때 이슬람교를 중심으로 단합했고 그 결과 기존 제국을 위협할 정도로 거대한 세력을 형성했다.

그들은 곧 자신들의 종교를 전파할곳을 향해 칼날을 들이미뤘고, 그 목표는 국력을 맘껏 소진한 고대 제국들이 었다.

 

-짤은 바실리우스2세 본문과 관계없음-

"아 저 시발새기들"

당시 이슬람은 뛰어난 명장과 강한 종교적 열정으로 무장하고 있었고 그 결과 존나 어이없게도 페르시아와 로마 두 거대제국을 상대로 연전 연승을 이어갔다.

이러한 배경에는 두 제국의 전쟁으로 인한 국력 소모도 한 몫 했지만 그들이 열정적인 신도들이었으며 지휘관이 매우 뛰어났다는 것도 중요한 이유 중 하나였다.

 

-정통 칼리프 시대에 확장된 이슬람제국의 영토. 페르시아는 이미 아작났고 로마도 영토의 절반이 털렸다.-


진짜 이슬람 장군들은 존나 사기캐였다.

페르시아는 10만의 대병력을 모았지만 단 3만의 이슬람군에게 완벽하게 털렸으며 수도 크테시폰은 함락당하고 말았다.

이후 잔존세력과 황족을 중심으로 저항을 이어가지만 결국 이슬람의 체계적인 공격을 버티지 못하고 메소포타미아 지역뿐 아니라 이란고원까지 모조리 빼앗기고 400여년의 역사를 뒤로한채 순식간에 멸망하고 만다.

로마라고 별다를건 없었다.

고대시절부터 중요한 영토였던 시리아가 넘어갔으며 시리아를 되찾기 위해 6만 이상의 대군을 파견한 헤라클리우스 였지만, 야무르크 강의 전투에서 3만의 이슬람군에게 무장된 로마군이 개털리고 시리아를 영영 상실하고 만다.

이후 이슬람 세력은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진출, 기독교의 성지 예루살렘 마저 함락하기에 이른다.

 

-예루살렘, 예루살렘은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성지였으며 팔레스타인 지방의 주요 도시 가운데 하나였다.-

예루살렘을 빼앗긴 로마는 큰 충격에 빠졌다.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헤어나지도 못했는데 다시 성지를 이민족에게 빼앗긴데 받은 충격이 얼마나 컸을까?

하지만 그건 이슬람 제국한테는 알바가 아니었다.

다마스쿠스를 수도로 삼은 이슬람 제국의 정복은 계속되었고 이미 말년에 다다른 데다가 젊었을 때와는 다르게 무척 쇠약해진 헤라클리우스는 이를 막을 능력이 없었다.

결국 그는 수도의 침실에 앓아 누웠으며 임종 직전 들은 보고는 이집트의 보고 알렉산드리아가 함락 되었다는 비극이었다.

 

-이집트의 주도 알렉산드리아. 이미 50만이 넘는 인구를 보유한 고대의 초특급 대도시였다.-

결국 제국은 이집트의 함락으로 인해 그간 시행해온 빵과 서커스의 빵마저 폐지할 수 밖에 없었다.

이집트는 제국의 최중요 곡창지대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미 여러 속주의 상실은 그 어떤것으로도 메울 수 없었고 제국의 행정과 경제 체계는 그야말로 개판이 났다.

이 기세를 몰아 이슬람 세력은 그대로 북 아프리카로 진격했으며 심지어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공격 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 첫번째 공격은 체계적이지 못한 준비와 제국군의 철저한 방어 전술로 인해 크게 실패하고 이슬람은 대군을 잃고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수도가 그대로 먹혀버린 페르시아에 비해선 그나마 훨씬 나은 상황이라고 봐야할까?

하여튼 이 사건을 우린 제 1차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이라고 부르며, 이후 서술할 제 2차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은 훨씬 대규모로 진행된다.

 

-우마이야(옴미아드)왕조 시대의 이슬람 세력.그야말로 거대제국을 형성한 최전성기라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슬람 제국의 팽창이 멈췄을까?

천만의 말씀.로마는 북쪽에서 불가리아,롬바르디아 등 이민족들의 공격에 그대로 노출되 있었고 이미 기존의 체제가 다 붕괴되어버려 곧 콘스탄티노플도 고대 로마 처럼 붕괴될거라 걱정한 이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이슬람은 당시에 그야말로 천하무적이었고 수십만에 육박하는 엄청난 병력이 그대로 물밀듯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에 감히 막을 수가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정통 칼리프 시대가 막을 내리고 우마이야 가문은 칼리프의 자리를 독점하기 시작한다.

(칼리프:이슬람 세계의 종교,행정적 최고 지도자.마호메트의 후계자)

우마이야는 매우 공격적이었다.동쪽으로도 세력을 넓혀 박트리아와 인더스강 유역을 공격했고 서쪽으로는 로마제국의 마지막 아프리카 영토인 카르타고가 함락됬고 그대로 밀고 올라가 히스파니아의 서고트 왕국을 무너뜨린다.

그 후의 공격은 프랑크 왕국의 카를 마르텔이 투르-푸아티에의 전투에서 말소시키지만 이슬람 세력에게 있어서 그런것 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들이 원한건 갈리아의 땅떵이가 아니라 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이었고, 당대 이슬람의 시에는 콘스탄티노플이 이슬람의 수도가 되길 간절히 바라는 작품도 몇 개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우마이야 세력은 서고트 정복 이후 대부분의 국력을 콘스탄티노플 공격에 집중하고 있었고 로마도 그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럼 로마는 어떻게 대응했을까?

 

-성상을 파괴하는 수도승-

당시 로마는 성상파괴를 지지하는 레오 3세의 세력이 득세해 있었다.

군인 출신인 레오3세는 성상숭배가 기존 교리와 반대되다고 생각했고 범 제국적으로 성상숭배 금지령을 내렸다.

이에 불만을 표하는 세력도 많았으나 그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레오 3세 또한 지랄맞은 사기캐였기 때문이다.

원래 우마이야왕조는 아나톨리아의 장군인 레오를 매수해 제국을 간접지배 하려고 했지만 716년 오히려 레오가 통수를 후려갈기고 그들과 쌩까고 단독 제위에 오르고 말았다.

우마이야는 단단히 화가 났고 그걸 빌미로 육해군을 모두 총동원 육군 단독 12만과 1천척이 넘는 대함대를 동원해 717년 콘스탄티노플 공격에 들어간다.

이전까지는 1차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에서 너무 심하게 당했고 우마이야 자체의 내부세력에 불만을 품은 이들의 반란을 정리하느라 세력을 모을 수 없었지만 이제는 달랐던 것이다.

훈련된 정규군이 아나톨리아의 로마군을 무력화 시키며 제국 중심부로 밀고들어갔고, 해군세력도 키프로스,크레타 등지의 동지중해 중요 섬들을 장악하며 수도로 향했다.

 

-당대의 이슬람 세력, 751년 탈라스 전투는 우마이야 이후 창궐한 아바스 왕조 시대의 전투다-

레오3세 또한 가만히 손가락 빨고있지는 않았다.

수도를 철저히 요새화하고 함대를 긁어모아 보스포루스 해협에 배치하는 한편, 제국의 패잔병을 긁어모아 훈련시키는 등 철저히 대비한다.

그리고 결국 717년 이슬람 제국의 대군을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에 당도한다.

이슬람제국의 공격은 맹렬했다.그들은 땅을 파기도하고 탑을 쌓기도, 공성기로 성벽을 파괴하려고 했으나 결국 모조리 실패했다.

제국군이 성벽위에서 쏘아대는 투척무기와 그리스의 화약이라 불리는 세계 유일의 화염방사기로 인해 수만의 사상자만 낸 채 후퇴하기를 반복했으며 큰 기대를 걸었던 해상전에서마저, 로마의 함대가 그리스의 화약이라는 치트키를 활용해 오히려 이슬람 해군을 농락했기 때문이다.

결국 이슬람측은 함대의 포기로 인해 해상공급에 큰 차질이 생겼고 육로에서의 공급도 로마의 군대가 이슬람의 보급부대를 지속적으로 가격해 위기에 봉착한다.

레오는 이러한 상황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곧바로 북쪽의 불가리아 제국에 연락을 취해 이슬람 세력을 공격해줄것을 요청한다.

불가리아는 로마와 원수지간이었지만 로마가 무너지면 바로 다음은 불가리아였기에 이를 수락하고 이슬람 제국의 뒷쪽을 지속적으로 가격한다.

하지만 그래도 이슬람제국은 물러나지 않았고 포위전은 무려 1년을 끌었다.

그러나 신은 로마의 편이었다.

 

"야 이게 뭐냐?"

"이게 눈이냐 와 예쁘다ㅎㅎ"

트라키아의 매서운 겨울날씨가 시작된 것이다.

원래 트라키아 지방은 겨울에도 그리 추운곳이 아니었으나 유독 717년의 겨울은 매서운 눈보라를 동반했고 제대로된 공급 물자를 받지못한 이슬람군은 굶주림은 물론 제대로된 방한장비도 없었을 뿐더러, 지금껏 뜨거운 사막에서 지냈기에 겨울에 대한 상식 자체가 부족했다.

그들은 결국 동상으로 엄청난 사상자를 냈고 아나톨리아의 로마군이 이슬람의 지원군을 격파했다는 소식에 결국 퇴각을 결정할 수 밖에 없었다.

 

"공격할땐 마음대로지만 퇴각할때는 아니란다."

레오3세는 이때를 놓치지 않았다.

이슬람군은 이미 많은 수가 사망한데다가 남아있던 세력도 굶주림과 동상으로 피폐해져 있었다.

레오3세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그간 끌어모은 병력을 모조리 이끌고 아나톨리아로 출격, 프리지아 전투에서 우마이야의 이슬람군을 철저히 격파한다.

이슬람군은 12만 중 1만여명도 살아남지 못했으며 1200척이 넘는 함선 중 귀환한건 10척 정도 밖에 안된다고 전해진다.

그야말로 이슬람 세력의 대패였으며 로마의 대승리였다.

결국 이 전투는 단순히 로마를 살린 전투일 뿐 아니라 투르-푸아티에 전투따위와 비견 될 수 없는, 그야말로 진정 서방 기독교세력을 이슬람세력으로부터 지켜낸 대규모 공방전이라고 평가된다.

실제로 이 전투 이후 우마이야 세력은 완전히 몰락, 아바스 왕조가 들어섰으며 로마의 공격을 두려워한 그들은 20여년 이상의 장기 평화조약을 체결한다.

하지만 로마나 이슬람이나 국력을 엄청 소진한건 메한가지 였으며 서방에서는 로마의 남은 세력이 소멸해가고 중세 봉건제가 형성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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