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문명의 시작은 크레타 섬에서 시작되었다.
미노아 문명은 고대 그리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은 미노아 문명이다.
미노아는 크레타 섬에서 기원전 2,700년경부터 기원전 1450년까지 존속하였다.
그리스 본토에서는 초기 헬라스 문화(helladic culture)가 기원전 2,800년경부터 기원전 2,100년경까지 존재하였다.
미노아 문명에 대해서는 오늘날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미노아 문명이라는 이름마저 크레타 섬의 전설적인 군주 미노스에서 딴 것이다.
이들은 고대 인도-유럽어족에 속하는 사람들이었으리라 추정된다.
이들은 선형 문자A를 남겼다. 미노아 문명은 풍부한 자원을 바탕으로 해양을 넘나들며 활발한 무역을 벌였다.
특히 미노아의 목재가 이집트, 키프로스, 에게 해 제도의 여러 섬에 수출되었다.
미노아는 기원전 1400년경 있었던 미케네의 침략과 테라 섬의 화산 폭발로 멸망하였다.
자료 출처 : http://report.dreamwiz.com/view/view.hcam?no=10961616
미노아 문명과 미케네 문명 비교
서양문명의 시작은 크레타 섬에서 시작되었다.
크레타 섬에서 발생한 문명인 에게문명은 전기 미노아 문명과 후기 미케네 문명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 글에서는 미노아 문명과 미케네 문명을 각각 살펴보고 비교해 보도록 하겠다.
먼저, 전기 미노아 문명부터 살펴보도록 하겠다.
미노아 문명은 B.C 2800 ~ B.C 1450년까지 존속했던 문명이다.
미노아 문명의 발전은 1900년 영국의 고고학자 에반스가 크레타섬의 크로노스를 발굴하면서 알려졌다.
그들의 역사에 대해서 알아보면 B.C 3000년경 크레타섬 중심의 에게해에서의 청동기문명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문명은 점점 발전하여 40여개 소국가로 분립되었고 B.C 2000년경 1인 지배가 시작되었고
B.C 1600년경에는 크노소스의 지배자가 섬 전체를 지배하였다.
이 시기 미노스왕이 강력한 해군력을 앞세워 동부지중해의 제해권을 장악하였는데
여기서 말하는 ‘왕’은 오리엔트전 전제, 제사장, 관료제와 상비군을 유지하였다.
미노아 문명은 라비린토스와 같은 궁전을 남겼으며 미술의 특징으로는 일상적이며 작고 친밀한 것에 흥미를 가졌다.
그들은 그림문자와 선상 A문자를 사용하였고
인종적, 문화적으로는 선천적으로 쾌활하고 향락적이며 감성적인 아시아적 특징을 가졌다.
그러나 미노아 문명은 B.C 1570년, B.C 1500년 궁전이 파괴당하고 B.C 1450년 선상 B문자를 사용하는
미케네인이 크레타를 정복하면서 종말을 맞이했다.
크레타 섬에서 발원한 크레타 문명은 본디 동방과의 무역을 통해서 성장한 문명권입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는 페니키아의 공주인 에우로파(Europa)가 납치를 당해서
그리스로 넘어왔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 에우로파가 유럽(Europe)의 어원이라는 것을 감안해 볼 때
초창기 그리스 문명은 동방에서 흘러들어온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크레타 문명은 에게해에 연한 도서지역에서 발전했기에 후일 일어난
미케네 문명과 통틀어 에게 문명이라고도 불립니다.
최초의 지중해 문명이라고도 할 수 있는 크레타 문명은 지중해 동방 무역을 통해서 번성했습니다.
당시 서방보다 훨씬 더 많이 발전해있던 동방의 문물을 서방으로 전달하는 역할을 맡은 이들은
페니키아 등의 문화, 예술을 그리스 지역으로 전달함과 동시에 당시의 페니키아 문자 역시 전달하여
그리스 알파벳, 더 나아가서는 로마자와 현재 영어 알파벳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크레타 문명의 전성기는 B.C.2000년 경부터 B.C.1500년 까지라고 하는데 이 때에는 크레타 인들이
그리스 본토까지 진출하였다는 고고학적 증거도 발견되고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크레타 문명은 뒤따라 부흥할 미케네(미케나이)문명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사실 고대 그리스 문명이 동방에서 지대한 영향을 받은 것을 감안하면 그 문명을 전달하는 역할을 했던
크레타 인들의 중요성은 당연히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입니다.
중요한 유적으로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미노타우르스가 태어난,
그리고 미노스 왕이 다스렸던 궁전 유적 등이 있습니다.
크레타 인들은 무역으로 얻은 방대한 부를 크노소스 궁, 워낙 크고 복잡하기에 미로로 보이기도 하며
그리스 로마 신화에는 다이달로스가 만든 미궁이라고 소개되기도 하는 궁전과 항만을 건조하는 데 썼습니다.
독특하게도 크레타 문명의 쇠퇴는 타 민족의 침략이나 정치적인 문제등으로 인했던 것은 아닙니다.
당시 크레타 섬과 가까운 지역에서 지진과 토네이도 등의 자연재해가 잇따랐고
바다로 둘러싸인 섬이라는 지리적 조건은 그들이 자연재해를 벗어나게 하는 데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지진과 토네이도로 인해 크레타 문명의 기반인 무역로가 손상되었으며
건조해 둔 배와 항구들이 피해를 입었습니다. 자연재해로 인해서 경제적 기반을 상실한 크레타 문명은
점점 쇠퇴하며 북쪽, 발칸 반도 남부에서 일어나는 미케네 문명에 지중해 무역의 패권을 넘겨주며 사라졌습니다.
오랫동안 전설과 신화로만 남아있던 크레타 문명은 하인리히 슐리만이 트로이, 미케네 문명을 발굴한 후
크레타 문명 발굴에 착수했다 사망한 뒤,
그 뒤를 이어 발굴에 착수한 영국의 고고학자 A.J.에번스에 의해 발견되었습니다.
크레타 문명의 가장 큰 역사적 의의는 역시 고대 동방과 지중해, 그
리스 연안을 잇는 문화적, 역사적, 경제적 교각의 역할을 했다는 점을 들 수 있겠습니다.
미케네 문명은 최초의 그리스 문명이라고 불립니다.
남방의 크레타 문명이 그리스 문명이라기보다는 최초의 지중해권 문명(지중해 연안이 아닌 내內 지중해 문명)으로
분류된다면 미케네 인들은 그리스 인이라고 불리는 등 그리스 문명의 직접적인 선조로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크레타 문명이 쇠퇴하기 시작할 때에 번성하여 B.C.1400년 경에 크레타를 점령했으며
B.C.1300년 경에는 트로이를 공격하는 등 크레타 문명과는 달리 보다 호전적인 문명이었던 것 같습니다.
B.C.1400년 부터 B.C.1200년까지가 그들의 전성기로 보이며 B.C.1100년에 멸망했다고 합니다.
미케네(도시)를 중심으로 번성했던 이들은 에게
문명 후기로 분류되며 아직 청동기 문명에 머물렀던 것으로 보입니다.
실질적인 크레타 문명의 멸망 원인은 되지 못했으나 미케네 문명은 허약해진 크레타 문명의 숨통을 끊는
역할을 했으며 후일 북쪽에서 내려온 도리아인(후일의 스파르타인)들에 의해 멸망했습니다.
유적지는 독일의 고고학자 하인리히 슐리만에 의해 발견되었습니다.
요약하자면, 크레타 섬의 미노아 문명은 동방 무역을 통해 페니키아,
소아시아, 이집트 지역의 고급 문물과 문화를 그리스 지역에 전달하면서 성장했습니다.
따라서 미케네 문명은 이러한 미노아 문명에 영향을 받아 문화적으로 성장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두 문명의 관계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라고도 볼 수 있는거죠.
그렇게 크레타 문명에 영향을 받던 미케네 문명은 크레타 섬에 일어난 자연재해로 몰락하기 시작한
크레타 문명을 대신하여 강성해지고 크레타 섬을 정복합니다.
따라서 미노아 문명이 그리스 반도로 넘어와 미케네 문명으로 다시 태어난 것도,
크레타 인들이 남쪽으로 내려와서 미노아 문명을 멸망시킨 것도 아닙니다.
크레타 문명 멸망의 직접적인 원인은 자연재해로 인한 경제력 쇠퇴이며 미케네 문명은 미노아 문명의 변형이나
모조품이 아니라 크레타 문명, 그리고 동방문명에 영향을 받은 것 뿐입니다.
그러나 미케네 인들이 크레타를 정복하여 확실하게 끝매듭을 지은 것은 맞습니다.
크레타문명(미노아문명 이라고도 함)
BC 2000년경에 아마도 중부 유럽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되는 민족이동의 여파를 받아
초기 청동기문명이 붕괴되고, 에게해 주변의 세계는 크레타섬을 중심으로 하는 중기 청동기시대로 들어간다.
크레타섬은 동(東)지중해의 중앙에 위치하여 일찍부터 오리엔트세계, 특히 이집트와의 교류가 있었다.
또한 다른 섬들보다 훨씬 면적이 넓은 데다 평야가 많은 점 등으로 조직적인 문명 성립에 필요한 조건을 구비하였다. 주민은 지중해인종에다 소아시아인이 혼혈된 것으로 추정된다.
처음에는 동부와 중부에 각각 독립적인 세력이 분립되어 있었는데, BC 2000년경에 크노소스를 중심으로 하여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져, 미노스라 불리는 왕이 섬 전체를 지배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정치 ·군사 ·예술 등이 급속도로 발전하게 되었으며, 또한 동부 지중해의 교역을 거의 독점하게 된 것 같다.
크노소스를 비롯하여 말리아 ·파이스토스 ·자크로스 등에 궁전이 건립되고, 도기(陶器) ·금속기의 제작이 성행하였으며, 작은 조각 ·그림도 발달하였다. BC 1700년경에 필시 대지진이라 생각되는 재난을 당하여 각지의 궁전이 도괴(倒壞)되었으나 곧 보다 큰 대규모의 새 궁전이 재건되어, 그 뒤 약 2세기 동안 크레타문화는 절정기를 이루었다.
특히 수도 크노소스는 인구 8만을 헤아렸으며,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으로서 번영하였다. 크노소스궁전은 경사진 곳에 가운데 마당을 사이에 끼고 수백의 작은 방을 배치한 복잡한 계획에 의하여 건립된 대건축으로, 소위 미궁(迷宮:라비린토스)로서 유명하다. 거기에는 제례 ·공무(公務)를 위한 방, 왕족의 사실(私室) ·공방(工房) ·창고 등이 있는데, 중요한 방은 대부분 선명한 벽화로 장식되고 채광과 배수시설도 세심하게 배려되었다. 다른 지역의 궁전도 대소의 차이는 있으나, 계획 ·장식방법 등에서 크노소스와 공통된 성격임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당시의 종교 및 언어에 대하여는 아직도 불명한 점이 많다. 크레타섬에는 독립된 신전은 없고 또 이것이 신상(神像)이라고 확인될 만한 조상(彫像)도 없다. 왕은 지배자인 동시에 최고의 신관(神官)으로서 신성시되었으나, 아마 그것에는 고대 이집트나 그리스와 같은 체계화된 신관(神觀)은 존재하지 않은 듯하다. 신앙의 기반을 이룬 것은 일종의 주물숭배(呪物崇拜) 였으며, 신과 비슷한 것으로는 원시적인 지모신(地母神)을 생각할 정도였다.
당시의 문자로는 그림문자(상형문자)와 선(線)문자 A ·B가 있었는데, 선문자 B만이 1953년 영국의 고고학자 M.G.F.벤트리스에 의해 거의 해독되었다. 크레타는 BC 1400년경에 그리스 본토의 침입으로 멸망하였다. 크노소스를 비롯한 각지의 궁전은 파괴되었으며, 주민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에게문명의 중심은 이후 그리스 본토로 옮겨가게 되었다.
미케네문명시대
그리스인은 인종적으로 에게해 지역의 선주민(先住民)과 인도유럽어족(語族)에 속하는 북방 침입자와의 융합으로 이루어진 혼합민족이었다. 이들은 그 방언에 따라 아테네인 등이 속하는 동방 방언의 그리스인과 스파르타인 등이 속하는 서방 방언의 그리스인으로 대별되는데, 이 두 파는 동시에 남하하여 정주한 것이 아니라, 먼저 전자만이 BC 2000년경부터 침입, 그리스 본토에 자리를 잡았다. 그때부터 BC 1100년경까지를 미케네 시대라고 하는데, 그것은 펠로폰네소스반도 동부의 미케네에서 강력한 왕국이 나타나 문명의 중심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미케네 문명의 선구자는 바로 아카이아계(系)의 초기 그리스인이었으며, 그들은 크레타섬의 크노소스 왕궁을 중심으로 번영을 누리고 있던 크레타 문명의 영향을 받고 BC 1500년경부터 특색 있는 청동기문화를 이룩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미케네 문명은 크레타 문명의 영향과 모방을 위주로 하여 발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외부로부터의 침략에 대비하여 전략목적의 성벽을 축조하는 등 북방적 요소가 두드러졌던 점에서 크레타 문명과는 구별된다. 즉 평화적이었던 크레타 문명과는 달리 미케네 문명은 전쟁이나 사냥 등 상무적(尙武的)인 제재(題材)와 표현이 많았던 것이 그 특색이었다.
이 시대에 대해서는 호메로스의 서사시 및 기타의 전설과 몇 가지 유적 등으로 겨우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고고학적 발견이 증대되고, 특히 당시 왕궁에서 사용하던 문서가 출토되어 해독됨으로써 오늘날에는 그 실체를 훨씬 분명하게 파악하게 되었다. 독일의 상인이며 고고학자인 H.슐리만이 1876년에 호메로스가 그의 시(詩)에서 묘사한 트로이의 폐허인 히사를리크 언덕을 발굴하여 경이적인 보물들을 출토해낸 사실이라든지(1870∼90), 1939년 필로스에서 새로이 왕궁터가 발견되고, 또 점토판(粘土板)에 씌어진 많은 문서가 발견된 사실 등이 있다.
‘선상문자(線狀文字) B’라고 불리는 이 음절문자를 50년 체코슬로바키아의 B.흐로즈니가 처음으로 해독을 시도하고, 52년 영국의 M.벤트리스는 이것이 최고(最古)의 그리스어임을 밝혔으며, 62년에는 미국의 C.H.고든이 그 해독을 크게 진전시킴으로써 오늘날에는 미케네 문명의 윤곽을 보다 자세하게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리스의 전설이 우리의 추측 이상으로 사실(史實)을 훨씬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 것도 모두 이와 같은 발견이 뒷받침해 줌으로써 비로소 가능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미케네 문명도 왕궁 중심으로 번영하였으므로, BC 1200~BC 1100년 사이에 필로스와 미케네 등의 왕궁이 완전히 파괴되자 그와 동시에 붕괴되고 말았다. 이 파괴를 자행한 자들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일반적으로 BC 1200년경부터 남하하기 시작한 제2의 그리스인의 물결, 즉 도리아인과 같은 서방 방언의 무리들이라는 것이 통설로 전해진다.
트로이 문명(Troian Culture)
트로이는 마르마라 해에 가까운 소아시아의 힛사를리크 언덕으로서, 거기에는 9층의 주거지(시:市)가 있었다. 제1시는 이미 성벽을 만들고 금속 문화를 가졌으며, 제2시(B.C. 3천년기(紀)의 후반경)는 장경(長經) 120m의 높고 견고한 성벽을 가졌으며, 성내에는 4개의 메가론이 서 있어 최초의 융성기를 보여 준다. 이 곳은 흑해와 에게 해, 유럽과 아시아의 두 대륙이 접하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교역과 부근 평야의 농산물, 배후지의 광산 등으로 부를 안겨다 줄 수 있었다.
술레이만이 발견한 「트로이의 보물」은 제2시에 속하며, 황금제의 관과 장신구와 용기·은제품 등으로 국왕의 부와 권력을 과시하였다. 도기는 조잡하지만 사람의 얼굴을 나타낸 안호나 동물호가 특색이다. 이 문화는 에게 해의 유럽 쪽, 레스보스 섬, 소아시아의 내지로 퍼져 갔으나 에게 세계의 동북부에 한정되어 있고,
크레타와의 접촉은 찾아볼 수 없다. 제2시의 붕괴 후, 제3시부터 제5시가 같은 문화를 갖고 부흥되었으며 제6시는 두 번째의 전성기로서 성벽은 최대의 영역을 둘렀는데, 그 유구(遺構)로서 남아 있는 것은 적다. 그러나 그 유구나 유물은 완전히 미케네 문명으로서 호메로스의 트로이는 이에 이어지는 제7시이다. 그러므로 참다운 트로이 문명은 제2시가 대표하게 되는데, 그 문화와 타문화와의 관계·기원은 분명치 않으며, 그 연대에도 여러 설이 있다.
트로이는 19세기에 독일인 슐레이만에 의하여 발굴되었다. 소년 시절 슐레이만은 아버지로부 터 선물 받은 "아이들을 위한 세계사" 라는 책에서 붕괴하는 트로이 성을 묘사한 그림 한 장을 보고 전 설 속에 파묻힌 트로이를 자신이 찾아 낼 것을 결심하고 생애의 절반을 발굴에 필요한 자금을 모으는데 보냈다. 마침내 그가 49세에 그 꿈은 실현되어 트로이 문명이 허구가 아닌 역사적인 사실임을 증명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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