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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November 24, 2013

일본의 아스카 문화는 백제의 문화다

백제이야기 - 사라진 (살려야 할).
동키호테, 달마 | 2009.11.13 00:39

  프롤로그
 
  젊었을 때의 호기심을 정년퇴직후에도 간직하고 발휘 할 수있을까?
   내 관심의 화두였다. 새로운 실험 정년후 10년째
   용인수지의 7년간 사업은 성공과 좌절을...
   다시 당진에서 3년째,3년만 버티면 안정되리라는 나의 호기심에의 한 예견대로
   맞아가고 있다. 
   도전의 역사를 여기에 ? 엣 백제의 문화가 찬란했던 충청도 백제의  땅  당진에 !!!
    

   난생 처음 충청도(당진)에 오다.

 IMF로 한보청강이 부도되어 당진 경제가 엉망이던 5년전  당진에 오기로 결심하고 생전 처음   당진땅에 내려오다.


   백제 이야기 들 (우리모두가  다시 공부해야 할)

 지구상 인류사에 가장 위대한 역사 "백제" (오늘날 한국과 일본을 있게한 선조  들의 이야기) :아시아의 해상 무역을 장악하고  중국 대륙일부와 한반도는 물론 일본까지  하나의 백제로 다스렸다 .

1. 백제 무령왕 Muryeong of Baekje (AD 461 - 523)

백제 무령왕(서기501 – 523까지 23년간 재위)이 된 것은 생몰연대가 가장 확실하고 그의 인생역정이 드라마틱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의 관심을 끌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본명은 사마이며 백제 21대 개로왕의 아들로 삼촌인 좌현왕 여곤 (곤지라고 삼국사기에 기록됨) 에게 입적되어 여곤을 아버지라 부르며 오오사카 가와치성에서 자랐다.
1971 년 충남 공주시 금성동에 위치한 송산리 고분을 발굴하다가 우연히 발견되었는데 도굴꾼들의 피해를 입지않고 완벽한 모습을 드러냈다. 무덤속에서 지석 이 함께 나왔는데 이름, 출생사망연대등이 기록되어있어 신분이 파악되었다. 이리하여 백제 무령왕은 생몰연대가 확실한 유일한 고대의 왕이 되었다.
이후 일본 후쿠오카 북쪽 가카라시마섬 사람들이 공주에와서 백제 무령왕릉에 참배하고 461년 그곳에서 태어 난 무령왕의 탄생기념비를 건립하기로 했다.
일본 서기 Nihon Shoki 기록에 의하면 서기 461년 백제 개로왕은 아우 곤지를 왜에 보낼 때 임신한 부인을 아내로 삼아 함께 보냈는데 일본으로 가던 중 각라도에서 무령왕을 출산했다. 이때문에 무령왕은 섬 왕 즉 사마 왕이라 불렸다.
일본에서는 곤지에 대하여 그냥 이름만 부르는 경우가 없고 반드시 뒤에 군이나 왕자를 붙여 호칭한다. 일본서기 (곤지왕), 백제신찬 (곤지군). 일본 오오사카 히비키노시에 있는 아스카베신사가 곤지왕을 모시는 신사이며 곤지왕 시대에는 이 곳이 곤지왕의 거성 가와치성이었다.
461년 7월 백제의 정로장군이자 좌현왕 곤지가 일본에 가서 그해 8월부터 왜국의 지배층을 모두 숙청한 후 11월에 왜국왕에 즉위한다.
475년 고구려 장수왕 공격으로 백제 하남 위례성이 점령되어 폐허로 변 하고 이때 개로왕 (429-475, 재위 455-475 21년간) 은 아리수(한강의 옛 이름 )를 건너 아차산성으로 끌려가 처형된다. 이 때 폐허가 된 하남 위례성은 1,500년 동안 4미터 깊이의 토사속에 묻히게 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개로왕의 아들 문주왕이 왕위를 이었다고 하나 일본서기는 아들이 아니고 동생이라고 기록되어있다. 문주왕은 개로왕의 동생으로 수도를 웅진(공주)으로 옮겼다. 개로, 문주, 곤지는 형제간이다.
477년 야마토의 곤지가 야마토를 떠나 면서 무령왕을 왜무왕으로 봉한 뒤 백제에 나왔던 기록이 있다. 어찌 된일인지 삼국사기는 이 때 곤지가 사망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어서 요즘 역사학자들의 많은 추측을 불러 일으키고 있으나 일본측 기록에는 곤지의 생몰연도가 444 – 484로 되어있다. 왜무왕은 478년 송 나라에 보낸 국서에서 475년에 있었던 개로왕과 왕자들의 죽음을 부형의 죽음으로 기록하였다. 따라서 무령왕은 백제왕이 되기 전 477년부터 왜무왕 이었고 그가 백제 무령왕이 된것은 501년 나이 40세때이다.
문주왕과 그 아들 삼근왕은 의문의 암살을 당하고 479년 곤지의 아들 동성왕이 야마토에서 돌아와 백제왕으로 즉위하여 백제의 국력을 회복하기 위해 최선을 다 한다. 중국본토에 백제분국을 설치하고 북위와의 전쟁에서 대승한다. 광양태수, 성양태수, 광릉태수등의 백제관리가 분국을 다스렸다.
동성왕 사후 501년 무령왕이 백제왕으로 즉위한다. 무령왕은 고구려 광개토대왕에게 빼앗긴 지리적 요충지인 한강유역을 회복코자 재위기간 대부분을 전쟁터에서 보냈고 그의 아들 성왕때 이 목표는 거의 이루어질 듯 보였다. 그러나 역사는 훗날 동맹국 신라의 배신으로 엉뚱한 방향으로 질주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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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야마토 타케루 日本武尊 Yamato Takeru

본래 동양의 역사기록은 사마천 (BC145 – BC86) 의 사기이래 그 분류방법을 본 따 본기, 세가, 표, 서, 열전으로 나누어 기술하였고 후대의 모든 역사기술이 이 틀을 따르는데 일본의 최초의 역사서인 고사기 古事記 Kojiki 와 일본서기日本書紀 Nihon Shoki 는 그러한 전통을 따르지 않고 일본 건국신화위주로 시작된다. 자기 조상들의 역사를 신화형식으로 기록하면서 시간을 뒤죽박죽으로 헝클어 놓아서 신화를 역사로 변환시키는 과정이 필요하게 된다. 상기 두개의 역사서는 덴무천황 天武 Emperor Tenmu (631 – 686) 재위 672 – 686 의 명에 의하여 Toneri 황자와 백제의 학자 안만려가 고사기 AD712년, 일본서기 720년에 완성하였다. 덴무천황부터 현직의 왕에게 천황이라는 호칭이 사용되기시작한다. 이제부터 야마토 타케루라는 신화속의 인물을 살펴보자.
Yamato Prince Ousu 는 전설속의 12대 천황Emperor Keiko의 둘째아들인데 총명하고 용감하였다. 나이 16세가 되어 부왕의 명으로 큐우슈 구마소 형제가 왕명에 잘 따르지 않으므로 정벌에 나선다. 상대는 너무나 용맹스럽고 용의주도하여 고심끝에 Ousu는 단신으로 여장한 모습으로 구마소 형제에게 접근한다. 가슴속에 날 선 비수를 감추고. 미모의 젊은 여인이 따라주는 술에 기분 좋아 진 형제를 처치하였을 때 그 형제가 붙여 준 이름이 야마토 제일의 무사라는 뜻의 Yamato Takeru였다. 그 후 이즈모 出雲 Izumo 를 정복하고 동쪽에 있는 나라들을 정복하고 돌아와 서 갑자기 병이 들어 Mie 현 Ise군 어딘가에서 죽는다. 죽어서 그의 혼백이 백조가 되어 날아 갔다고 전 한다. 그의 무덤이 오오사카 금탄원에 있는 백조능이다. 백조능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서기 295년 태어나 333년 39세로 죽었다.
그런데 신화속에서 Prince Ousu는 큐우슈와 동쪽의 나라를 향해 떠나기 전에 이세신궁의 숙모를 찾아가서 인사를 드리고 지혜를 구하게 되는데 숙모에게서 받은 신물이 그 임무수행에 결정적인 요소가 된다.
우연한 일인 듯 기록된 이 숙모는 야마토 천황가의 시조중의 하나로 알려져있고, 동쪽을 정벌하러 떠 날때 이세신궁의 숙모가 준 신검 Kusanagi 는 현재 천황가의 보물중의 보물로 되어있다. 이세신궁의 주인 신녀인 Ousu왕자의 숙모와 Kusanagi 청동검은 역사속에서 과연 무엇이었을까?
이상의 신화는 요즘 영화나 애니메이션으로 인기있는 소재이다. 이 신화는 시대개념을 철저히 배재하고 있어서 어느 때 이야기인지 알 수 없다. 기록상 Emperor Keiko 생몰연도를 AD 71 – AD 130이라고 하나 아예 전설상의 천황으로 치므로 믿을게 못 된다. 백제가 망해 없어진 뒤에 야마토의 역사를 백제와 전혀 관계없는 것처럼 하되 자기 조상들의 자랑스런 행적은 신화의 형식으로 남겨 둔 것이 고사기와 일본서기이다.
3세기 말, 만주에서 선비족의 세력이 강해져서 부여의 의라왕이 부여세력을 이끌고 한 반도를 거쳐 일본을 차지하여 숭신 천황이 된다. 그 와중에 백제의 책계왕이 298년 전사하고 그의 아들 분서왕이 304년 독살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백제 12대왕으로 기록된 계왕 (273 – 358)은 분서왕의 왕자였지만 당시 큐우슈와 오오사카에서 부여세력과 대치하고 있었다. 삼국사기는 이때 계왕의 나이가 어려 비류왕이 즉위했다고 적고 있으나 계왕의 실재나이는 이때 32세였다. 그런 사정으로 분서왕 사후 비류왕이 11대왕이 된다. 비류왕이 왕이 되기 전 서기 295년 쌍둥이 아들을 낳았었는데 이름이 큰방아와 작은방아였으니 오오(大)우스와 오(小)우스이다. 일본어로 우스로 읽는 한자의 뜻이 우리 말의 방앗간의 방아에 해당한다.
Yamato의 전설속의 12대 Emperor Keiko는 백제계왕의 젊은 시절이었으며 그를 도와 전쟁터를 누비고 다닌 것은 다름아닌 방아 쌍둥이 형제였다. 전쟁은 318년 Keiko측 승리로 끝 나지만 오오우스는 24세로 전사하고 그 후 오우스의 정복전쟁은 신화속의 모습 그대로이다. 이 정복전쟁중 신검 Kusanagi의 존재는 백제황계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신표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백 제 11대 비류왕이 죽고 Yamato의 Emperor Keiko가 백제에 돌아 와 12대 계왕이 된 것이 344년이며 346년 Yamato Takeru 가 백제 13대 근초고왕이 되어 나이 80이 된 375년까지 백제의 전성기를 구가하게 된다. Yamato Takeru는 백조가 되어 Yamato를 떠나 백제 근초고왕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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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칠지도 七支刀 Seven-Branched Sword

한국과 일본간 논쟁중인 한일 고대사연구에서 가장 귀중한 고고학적 유물중의 하나이다. 1870년대 나라현 덴리시 이소노가미 신궁 石上神宮 Isonokami Shrine창고에서 1500년의 세월이 흐른 뒤 발견되었다. 길이 74.9 cm이며 일곱 개의 날이 있고 양면에 60여자의 한자가 금상감되어 있다. 글자일부가 훼손되어 추측해서 해독해야 되는 탓도 있지만 기록된 연호를 둘러싸고 한일학자간에 공방이 계속되고있다. 일본은 한국이 고대에 자기들의 상국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하며 이런저런 이유를 대어 중국커넥션으로 설명하고 싶어한다. 곤란하면 신화라고 우기며 역사로 해석하는것을 거부한다.
일본서기에 신공황후 Empress Jingu 52년 백제 근초고왕이 七枝刀를 헌상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연대에 120년의 차이가 난다. 여기 나오는 Empress Jingu는 일본서기와 고사기에서 가장 심한 역사왜곡이 이루어진 인물이며 신화속의 신화와 같은 인물이다. 오죽했으면 일본학자들도 명치시대까지 그녀를 천황으로 기록했으니 일본서기와 고사기를 저작했던 사람들의 심모원려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 왜곡이 심하다는 것은 그 만큼 숨겨야 할 사연이 있기 때문이라고 보면 된다. 언젠가 그녀는 이 글의 제목으로 등장하여 역사속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일본 서기 기록

則獻七枝刀一口 七子鏡一面及種種重寶 仍啟曰 臣國以西有水 源出自谷那鐵山 其邈七日行之不及 當飲是水 便取是山鐵以永奉聖朝
칠지도에 금상감 된 글자 가운데 괄호안은 추정이며 검은 부분은 추정불가한 글자.
泰(和)四年十(一)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錬(銕)七支刀(出)辟百兵宜供供候王■■■■ (作 or 祥)
先世以來未有此刀百濟王世(子)奇生聖音故爲倭王旨造傳示後世

가장 민감한 부분이 태화4년인데 백제연호로 볼 수도 있고 중국연호로 볼 수도 있어서 한일간에 자기 쪽에 유리한 주장을 한다. 다음은 아랫 줄 왕 세자 기생성음 부분인데 백가쟁명의 해석이 나와있다. 그런데 윗 글에서 가장 중요한 글자는 奇로 표현된 사람의 이름이다.
백제 왕세자 기가 태어나 말을 하므로 왜왕으로 봉하여 후세에 전 하노라.
왜왕 奇는 위에 언급된 신공황후가 서기 363년 큐우슈 후쿠오카에서 출산한 왜기왕이다. 왜기왕을 367년 백자국 百慈國 (시가현) 의 세자로 책봉한 것은 그의 할아버지인 근초고왕이었고 그를 기념하여 칠지도를 만들어 며느리에게 보낸 것이다.

백제 태화 원년은 364년이
다. 타고 난 미모에 사나운 무사였으며 전쟁때는 전투의 선봉에 섯던 며느리를 근초고왕은 자랑스러워 했으며 거기서 태어 난 태자 奇에 대한 사랑과 기대를 표현한 것이다. 왜기왕이 훗날 백제 15대 침류왕이 된다는 것만 밝히고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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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태왕사신기

서기 2007년 21세기의 이 시점에도 역사와 신화는 많은 사람들을 브라운관 앞으로 끌어 들였다. MBC의 태왕사신기 (극본 송지나 박병수, 연출 김종학 윤상호, 주연 배용준 문소리 이지아)는 전 지구적인 스케일로 한국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드라마속에 나오는 관미성은 광개토왕이 백제를 공격하면서 함락한 성인데 확실한 위치는 아직도 모른다. 중국 동해안에 백제영토가 있어 이를 공격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는 사실에 가깝다.
광 개토대왕에 관련된 역사는 삼국사기에 의해서가 아니라 후일 발견된 광개토대왕비 Gwanggaeto Stele 때문에 신화가 아닌 역사가 되었다. 만주 지린성 지안에서 일본 정보장교 Sako Kageaki 중위가 1883년 탁본하여 일본학계에 보고하여 알려지게 되었다. 내용을 파악한 일본군은 일본의 조선합병을 합리화할 수 있는 내용이 있어 흥분하는데…
높 이 7미터 둘레 4 미터인 한 개의 화강암 석주에 1802자의 한자가 음각되어있다. 그런데 거기 기록된 내용중 한국과 일본학자간에 논쟁이 된 부분을 학계에서는 신미년조라 부른다. 우리역사에서 대왕으로 불리는 두 명의 왕이 있으니 광개토대왕과 세종대왕이다. 광개토대왕 (391 – 413)은 고국양왕의 아들로 391년 17세때 고구려 19대 왕위에 올라 39세에 병사하므로 22년간 왕위에 있었다.부왕의 위업을 기려 414년 장수왕 2년 건립하였다. 추모왕의 고구려건국과 광개토대왕시절 정복한 전쟁기록인데 등장하는 성의 이름만 백여개이다. 문제가 되는 신미년조는 다음과 같다.


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XX)新羅以爲臣民
而後以辛卯年不貢因
신묘년 (AD 391)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 (XX) 신라를 쳐부수고 신민으로 삼았다. 이 기록은 일본이 조선을 합병하는데 좋은 구실이 되었다. 한국측 학자들은 원래 두째 줄에 있는 내용을 처음 발견한 일본군이 첫 째줄의 내용처럼 비문을 변조하였다고 음모론을 제기하였다. 그렇게 되면 “ 그후 신묘년 조공을 바치지 않으므로 백제 (XX) 신라를 쳐서 신민으로 삼았다”로 되어 한국측에게 만족스런 내용이 되나 세계사학계의 견해는 음모론을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 내물왕 9년 (364년) 대대적인 왜의 공격으로 신라는 심대한 타격을 입었다. 이 공격의 지휘관은 야마토의 응신천황 應神 Emperor Ojin (320 – 394) 이었다. 지금 일본에 있는 하치만 신궁에서 받 들어 모시는 신격화된 인물이다. 일본측 역사에는 Empress Jingu 가 신라를 정복한 것으로 나와 있으나 고의적인 왜곡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 실성니사금 원년 (402년) 3월 내물왕자 미사흔을 왜에 인질로 보낸다. 백제기록에도 아신왕 6년 (397년) 왕자 전지를 왜에 인질로 보낸 것으로 되어있으나 이것은 김 부식의 의도적인 역사왜곡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전지는 인질이 아닌 왕자의 신분으로 야마토를 둘러 본 것이기 때문이다.
원래 고구려와 백제는 낭랑 대방이 가로 막아 주어서 접촉이 없었는데 313년 고구려 미천왕때 낭랑 댸방군이 소멸되고 국경을 맞 대게 되어 충돌이 시작된다. 그러나 이 무렵 백제가 군사력에서 우세했던 것 같다. 서기 369년 고구려 고국원왕이 2만의 군사로 먼저 공격하였으나 치양전투에서 백제에게 패배한다. 백제는 371년 근구수왕자가 3만의 병력을 이끌고 평양성을 공격하였고 고국원왕이 이 전투에서 전사한다. 그뒤 소수림왕이 즉위하고 중국대륙에선 전진황제 부견이 383년 비수의 전투에서 패배하자 대륙은 혼란에 빠진다.소수림왕은 불교를 받아들이고 율령을 정비하면서 백제에게 패전한 상처를 회복한다. 이후 소수림왕 – 고국양왕 – 광개토왕 순으로 이어진다. 소수림왕과 고국양왕은 형제간이므로 광개토왕은 대 백제전에서 전사한 고국원왕의 손자이다. 391년 고국양왕이 죽자 왕자 담덕이 17세의 나이로 고구려 19대 왕위에 올랐다.
그 가 왕위에 올랐을 때 고구려의 국력은 주변국에 별로 위협이 되지 못 했는데 어떻게 하여 그렇게 짧은 시간에 무적의 나라가 되었는지 알 수 없다. 그는 단숨에 백제를 유린하고 만주대륙을 종횡무진으로 공략한다. 백제공격에 대한 보복으로 왜의 인덕천황은 399년 대대적으로 신라를 공격하나 고구려군에게 궤멸된다. 광개토대왕비문에 신라와 가야전역이 왜군으로 가득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때 고구려는 군사를 보내 대마도 큐우슈 오오사카를 점령하고 광개토대왕의 왕자 고진이 백제세력을 제압한 뒤 오오사카에서 윤공천황으로 즉위한것이 서기 431년이다.
이때 형성된 고구려 세력을 야마토에서 정리하는 것이 백제 무령왕 편에서 살펴 본 곤지왕의 몫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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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일본 최초의 통일왕조 야마토(大和)

왜의 최초역사기록은 중국의 삼국지 위지 왜인전에 야마다이國 왜 여왕 히미꼬 (卑彌呼)가 서기 238년 사신을 보내왔다는 기사이다. 일본측의 고사기나 일본서기에는 히미꼬의 기록이 없다. 다만 일본서기는 왜 여왕이 239년 위나라에 사신을 보냈고 그들이 240년 돌아 왔다는 기록은 남겼다. 일본서기의 저자가 중국측 기록을 알고 있었다.
위나라와 시작된 이러한 야마타이국의 외교관계는 다음의 진(晉)으로 이어지다가 266년 사신을 보낸 것을 끝으로 이후 147년간 중국역사에 왜의 기록이 나타나지 않는다. 사가들은 서기 266년부터 413년까지의 147년간 일본열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어한다. 히미꼬의 야마다이국은 부족연맹수준의 작은 나라였는데 147년 간의 역사가 없는 신비한 세월이 흐른 뒤 (이 기간 일본은 역사는 없고 신화만 무성하다) 갑자기 강력한 중앙집권적인 일본 최초의 통일왕조가 야마토와 가와치 지방 (현재 나라현) 에 나타난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고고학상 일본역사 발전단계의 한 획을 긋는 거대한 분묘가 이 무렵 나라 – 오오사카 지역에서 생기기 시작하더니 차차 일본전역으로 퍼져나간다. 그 분묘의 규모가 너무나 거대해서 길이 420미터를 넘는 것도 있는데 이집트 피라밋 건립과 맞 먹는 인력이 필요하다고 한다. 대략 서기 250년부터 552년 불교공인이후 매장문화가 변화할 때까지의 기간을 일본에서 고분시기(古墳時期)라고 한다.
이 새로운 문화가 일본내의 자생적인 문화가 아니라는 것은 모든 일본인이 인정하는데 어디에서 누가 왜 일본에 왔나? 하는 물음에 대 해서는 아직까지 공인된 결론이 없다. 결론이 없다기보다 결론이 두려워 회피하고 있다는 표현이 적당할지도 모른다. "말 할 수 없는 대목에서 침묵할지어다 (Whereof one cannot speak, thereof one must be silent. – Wittgenstein)"라는 말이 있는데 일본황실과 일본국민은 진실이 밝혀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세계의 역사학자들이 이 무렵의 권력자라고 생각되는 천황묘의 발굴에 관심이 많은데 황실은 고인의 권위와 평안을 지켜야 한다면서 반대하고 있다.
사실 별 것 아닌 것도 국가 문제가 되면 국가라는 도그마에 매몰되어버린다. 요즘 티벳사태를 대하는 중국을 보면 된다. 성화가 지나가는서울에서 그들은 애국이란 이름으로 수치를 모르는 짓을 한다. 국가란 원래 폭력을 독점하고있는 합법적인 집단이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교육 받은 개인들 또한 비이성적인 행동을 서슴치 않는다. 우리는 중국 대륙이 불안할 때 주변의 오랑케들은 편안했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잊지않고 있다. 1951년 자기 나라를 무력으로 뺏기고 57년 동안 티벳인들은 망명생활을 하고 있다.
망해 없어진 백제의 후손이라고 하기 보다는 가미(神)의 후손이라고 하자. 시간과 공간을 자유자재로 뛰어넘을 수 있는 가미의 세계라면 지난 역사를 적당히 꾸며 댈 수 있을것이다. 만세일계로 이 곳에 군림할 권위를 신에게서 빌리자. 갈대처럼 흔들리는 사람의 마음이 감히 가미를 감당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사람의 자손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 온 천손이다. 천손강림 신화는 이렇게 해서 만들어졌고 오늘날 개명한 일본국민들 또한 믿고 있다. 믿음의 체계란 진실의 체계가 아니라 주관의 체계인 것이다. 믿음의 체계라는 이름아래 인류는 진리를 의식하지 못 하는 세계에 살고있다. 인간의 무명(無明)이 안타까울 뿐이다.
8 세기 초 성립한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저자들이 의도했던데로 일본국민은 가미를 생활화하면서 21 세기를 살고있다. 황실과 관련된 신궁, 이나리 신사, 하치만 신궁 등등 수 10만의 신궁과 국민들은 혼연일체가 되어있다. 후시미 이나리 신사에 2006년 정초 3일간 269만명의 참배객이 다녀갔다고 한다. 단 한 개의 신사에 이렇게 사람이 몰려오는데 전국에 이나리 신사만 3만개, 하치만 신궁 2만5천개, Susanoo를 모시는 야사카 신사는 8만개 이상의 지역신사가 있다고 하며 이밖에도 무수한 신궁이 있다.
역 사시대의 정교한 기록을 과시하는 중국의 전국시대( BC 8세기)와 비교하면 새발의 피도 안 되는 기원후 2 - 3세기의 역사를 일본은 이런 식의 신화로 만들어 놓았다. 우리는 차차 아러한 일본의 신화를 역사로 바꿔 백제와의 관계를 밝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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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백제 근구수왕 (320 – 394)

삼국사기에 근구수왕 은 375 – 383까지 8년간 재위한다. 일본 측 자료는 그의 생몰연도 320 – 394로 74세를 살았다. 근초고왕 (295 – 375)의 둘째 아들이며 부왕과 함께 백제의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부왕이 왕위에 오른 서기 346년 그의 나이 26세 (부왕 51 세)였고 근초고왕시대에 역사에 알려 진 가야합병, 고구려와 치양전투 그리고 평양성 공격과 고국원왕 전사, 왜의 신라침공이 실제로는 그의 기록이다.
그 런데 역사상 그가 백제왕위에 있던 것은 8년뿐 (나이 55세부터 63세까지)이다. 왕자때부터 재왕과 같은 권력을 누렸고 74세까지 살았다는 이 사람의 남은 세월은 역사의 어디에 있을까? 그는 아버지 야마토 타케루를 꼭 빼어 닮은 싸움꾼이었고 한반도, 일본열도 그리고 중국대륙까지 위세를 떨친 인물이다. 아직까지 역사는 이 분의 모습을 전혀 밝히지 못하고 있다.
Yamato 라는 나라는 이 무렵 건국되었다고 본다. 일본 천황중 15대 응신 (應神 Emperor Ojin)이 있는데 이 사람을 Yamato의 시조로 본다. 일본열도에서 Yamato의 우위를 확실히 다져 일본 최초의 통일국가가 된 것이다. 천황기록은 기원전 서기 660년부터 시작되는데 이 사람앞에 기록된 14명의 천황은 이 사람을 위하여 이 때까지의 세월을 대강 짜 맞추었다. 일본기록에 응신의 재위기간이 270 –310의 40년간으로 되어있으나 이를 믿는 역사학자는 없다. 다음은 응신왕 시절의 기록들이다.

백제의 직조기술자, 야금기술자입국. 백제 근초고왕 칠지도, 칠자경 헌상. 백제인 아직기 말 두필 가져 옴. 왕인 논어와 천자문 가져와 경서 강의하며 왕자의 스승이 됨. (한국측에는 왕인 기록이 전혀 없음). 고려인, 백제인, 임나인, 신라인들이 옮겨 옴. 이들로 하여금 큰 못을 만들게 하고 한인지(韓人池)라 함. 유쯔키기미(弓月君- 훗날의秦氏) 가 백제에서 인부 백 이십현(縣)을 데리고 귀화하였다. (이들은 쿄오토 가쓰라강에 대규모 토목공사로 저수지와 수로를 만들어 황무지를 개간하여 벼 농사를 하고 농잠업으로 비단을 생산하여 농업생산력 증진에 공헌한다). 이 무렵 아야(漢)씨, 사케노기미 (酒君)등 유력호족세력이 대거 일본에 도래한다. 이 후 광개토왕의 백제정벌시 피난민의 행렬이 가야지방을 통하여 일본으로 유입되어 오오사카의 Naniwazu(難波津)부두는 백제사람으로 넘쳤다. 이러한 인구이동 때문에 백제의 인구는 줄어들고 야마토는 비약적인 국력신장을 이룬다.

역사가들은 이 무렵 왠지 모르지만 이상할 정도로 백제와 왜의 관계가 좋았다고 본다.
오진왕의 이름은 Honda Wake 또는 Homuda Wake (譽田別) 이며 Homuda란 근초고왕의 수도 한산 (漢山 또는 漢田)을 뜻 한다고 한다. 오진왕, 근구수왕, Homuda Wake는 동일인물이다. 백제 15대 침류왕, 16대 진사왕, 17대 아신왕, 야마토의 닌토쿠왕이 그의 이들이다. 야마토라는 통일왕조의 출현은 근초고(Yamato Takeru)와 근구수(Ojin or Homuda Wake) 부자의 2대에 걸친 정복전쟁( 318년부터 390년까지)의 결과이다. Homuda Wake는 서기 390년 나이 70에 야마토(大和) 라는 나라를 오오사카에 세운다. 만주 부여족의 후예로 백제에 이어 야마토의 지배자가 된 Homuda왕은 가와치(河內)의 구다라노(百濟野)에서 제천(祭天)의 의식을 올리고 만세일계의 영원한 일본지배를 기원한다. 그로부터 1600여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 후손들이 아직도 천황으로 있으니 역사를 다룰 줄 아는 조상들의 슬기에 숙연해 질 뿐이다. 일제시대 일본군부는 구다라노(백제 벌)를 하비키노(羽曳野)로 개명하여 백제의 남은 그림자마져 없애 버린다.
근구수왕(375 – 383재위) –야마토 오진왕(362 – 367재위) – 야마토 호무다왕 (383-394재위)의 인생역정
응신천황은 전쟁의 신으로 추앙되어 하치만(Hachiman) 신궁에서 모시는데 전국에 3만의 하치만 신궁이 산재해있고 오오사카 응신천황능 앞에 하치만 신궁이 함께 세워져있다. 아버지 야마토 타케루 (倭建命 또는 日本武尊)가 20 – 30대의 대부분을 일본의 전쟁터에서 보냈으므로 그 또한 전쟁터에서 태어나고 자랐을 가능성이 크다. 아버지 야마토 타케루를 따라 하늘이 그들 부자에게 준 사명을 이루기 위하여 일생동안 일관된 목표를 가지고 살았다.
362년 (42세) 왜 성무천황 반란진압하고 성무천황비Empress Jingu (336 – 390)를 후비로 취한다.
363년 (43세) 근구수왕자와 Empress Jingu 왜기왕 출산(칠지도 편 참조).
364년 (44세) 신라 내물왕 9년 왜군을 이끌고 신라침공.
369년 (49세) 고구려 고국원왕 2만 군사로 백제침공했으나 치양전투에서 반격.
371년 (51세) 고구려 평양성 공격. 고국원왕 전사.
375년 (55세) 백제 14대 근구수왕으로 즉위.
376년 (56세) 고구려 침공.
377 년 (57세) 고구려 평양성 재탈환.
383년 (63세) 근구수왕 사망 (삼국사기). 실재로는 아들 침류에게 백제왕를 맡기고 그는 오오사카로 돌아감.
383 (63세) – 394 (74세) 왜 Homuda천황으로 재위. 그의 순행과 전쟁 행적이 일본 여러지방에 전 해 내려 오고 있다 함.
390 년 (70세) 야마토 (大和) 건국. 이 해에 신공황후(Empress Jingu아이 부인) 사망.
392년 (72세) 야마토의 장수 4명을 보내 백제 아신왕을 복위시키고 진사왕 체포하여 야마토로 압송.
394년 (74세) 사망. 묘는 大阪 譽田御墓山의 전방 후원분. 길이 420미터로 천명의 인부가 4년에 걸쳐 완성했다고 한다.지금 일본의 고분가운데 오진릉과 그 아들 닌도쿠(仁德)릉이 가장 거대하며 권력의 크기를 상징한다.
오진능 바로 남 쪽에 그의 아버지 야마토 타케루의 백조능이 있다. 7.일본최초의 통일왕조 야마토편 Google 지도에서 하비키노(羽 曳野) 지역을 확대하면 이들 묘의 위치가 확인된다. 항공사진으로도 식별가능하다. 거기서 청녕 천황능이 곤지왕능이고 서쪽으로 커서를 옮겨 사까이(堺)항으로 오면 거대한 닌도쿠천황능이 보인다. 닌도쿠 천황(337 – 419)은 근구수왕의 장자로 백제 침류왕, 진사왕, 아신왕의 친 형이 된다. 왕인 박사가 372년 일본에 가서 그 스승이 되었다는 왕자가 우치노와케이라츠꼬 (宇遲能和氣郎子)로 나이 10세였다. 이 어린 왕자가 커서 20세때 백제 15대 침류왕이 된다. 당시 백제와 일본은 백제왕실이 경영하는 한 나라였고 현대인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긴밀한 교류를 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서기 660년 한 반도의 백제는 나당 연합군에게 망했지만 나머지 한쪽이 일본열도에 고스라니 남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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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히미코(卑彌呼) Himiko

고사기나 일본서기에 일절 언급이 없으나 중국역사에 가장 먼저 등장하는 역사적 왜왕이다. 역사적 인물이기 때문에 고사기나 일본서기 저자들이 신화속에 끼울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냥 무시하고 넘어갈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 무렵 신공황후를 가공하여 히미코와 비슷한 해석이 가능하도록 신화를 기록하였다.
히미코의 역사기록은 삼국지 위지 왜인전에 나온다. 왜나라에 원래 남자왕이 있었는데 오랫동안 전쟁만 계속되고 나라가 편안하지 않아 합의에 의하여 히미코라는무당여인을 왕으로 뽑은 뒤 야마다이국에 평화가 왔다. 여왕은 결혼하지 않았고 망루와 목책으로 둘러싸인 궁에서 살았으며 무장한 경비들이 항상 삼엄한 경계를 하였다. 처음 위나라에 사신이 온 것은 서기 238년이며 히미코의 사망을 247년으로 기록했다. 사망후 지름이 백 보를 넘는 거대한 분묘를 세우고 순장자 가 백명을 넘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아달라 이사금 20년 (서기 172년) 왜왕 히미코가 사신을 보낸 기록이 있다. 그래서 히미코의 재위기간을 172 – 247로 보기도 한다. 일본학계에서도 히미코와 야마다이국의 위치에 관심이 많은데 정설이 없다. 1986년 큐우슈 사가(佐賀)현 간자끼(神綺)시 요시노가리에서 야요이시대 유적이 발굴되었다. BC 3 세기에서 AD 3세기에 걸쳐 형성된 것이며 벼를 논에서 재배하였다고 한다. 1992 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전체적인 모습이 위에 기록된 히미코의 궁과 흡사하다.

삼국유사 신라 8대 아달라 이사금 4년 (서기 157년) 동해 바닷가에 살던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가 일본에 가서 왕이 되었다. 그들이 사라진 뒤 신라에 해와 달의 광채가 사라졌다. 사람을 보내 세오녀가 짠 비단을 가져와서 영일현에서 제사를 지내자 광채가 옛날 처럼 돌아왔다.

일본에 수 많이 등장하는 神가운데 Super Star는 단연 아마테라스 오호미가미(天照大御神)라는 여신이다. 이 여신은 태양신이며 이세신궁의 주인이다. 남자 형제신이라며 스사노오 라는 바다를 다스리는 신이 함께 나오는데 성질깨나 있고 괘팍하여 누나의 마음을 많이 아프게 한다. 이때도 스사노오가 누나의 시녀를 죽이고 난폭한 행동을 하자 그에 대한 항의로 아마테라스 오호미가미는 동굴속에 들어 가 입구를 막아버리고 나가지 않았다. 태양신이 숨어버리자 세계는 암흑으로 덮히고 말았다. 곤란해진 신들이 모여 회의를 한 결과 아마테라스를 동굴속에서 끌어내기 위하여 작전을 펴기로 했다. 밖에서 춤을추고 시끄럽게 잔치를 벌렸으므로 무슨 영문인지 궁금하여 아마테라스 오호미가미가 살며시 문을 열자 눈 부신 빛속에서 찬란한 태양을 보았다. 동굴 밖에 거울을 갖다 놓았던 것이다. 자신의 얼굴을 본아마테라스 오호미가미는 그 모습을 좀 더 잘 보려고 몸을 밖으로 내밀었다. 이렇게 해서 세상은 빛을 다시찾게 되었고 스사노오는 고천원 (高天原, 다카마노하라, 신들이 사는 천상의 나라) 에서 추방되어 인간세상으로 내려 온 곳이 시마네(島根) 현의 이즈모(出雲)였다. 이런 연유로 이즈모 지역이 큐우슈 지역과 함께 일본에서 가장 빠른 청동기 문명의 유입지가 된다. 서기 160년경이다.

서 기 157년 야마토에 간 연오랑과 세오녀는 순박한 섬 사람들에게 그 신통력을 인정받아 태양신을 모시는 신적인 존재로 추앙되어 백성들이 이세신궁을 지어 왕으로 모셨다. 이 나라는 호츠마국(秀眞國) 이라 불렸으며 천조대신에게는 12 후(後)라고 하는 열두 신녀가 있었다. 12신녀 중에서 천조대신의 아들인 아메노 오시호미(天忍穗耳命)의 어모(御母)가 제 3 신녀인 세오리츠히메(細織津姬)라고 전한다. 즉 아마테라스 오호미가미가 세오리츠 히메다.
히미코는 세오녀이며 아마테라스 오호미가미(天照大御神)이다. 그녀에게 역사상 1명의 아들이 있었다.
세 오녀와 연오랑은 신라에서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기록되었으나 신라인이 아니고 가야왕실의 사람들이다. 세오녀는 자기 아들을 오오사카의 왕으로 세우려고 백제의 초고왕을 졸랐으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자 아들을 금관가야 김 수로왕에게 보낸다. 김 수로왕은 자기의 딸 타쿠하타치지히메(栲幡千千姬)와 오시호미를 결혼시킨다. 히미코와 김수로왕은 거기서 태어 난 손자, 니니기(瓊瓊杵)를 일본의 왕으로 세울 계획으로 일본으로 데려가는데(서기 174년) 그 일이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천손강림(天孫降臨)으로 기록되었다.
그러면 과연 아메노오시호미의 아버지는 누구일까? 다음은 이 신화의 정점에 서 있는 이 인물 - 八雲立(야구모 타츠)라는 노래의 저자로 알려진 인물의 차례가 된다.

8 Susanoo 須佐之男 (? – 214)

스사노오는 牛頭天王으로도 불리며 지금도 민중의 열열한 추앙을 받는다. 이분을 祭神으로 모시고 있는 야사까(八坂) 신사는 京都 굴지의 사당이다. 京都 히가시야마 산 기슭에 기온(祈園)거리를 끼고 있으며 서기 656년 사이메이 천황때 건립되어 일제이전에는 기온샤로 불렸다. 쿄오토에서 가장 오래 된 신사이며 전국에 8만여의 지역신사를 거느리고 있다. 매년 7월 열리는 기온마츠리 (祈園祭)는 일본 최대의 축제이며 Susanoo의 신주를 받드는 행사이다.
시마네(島根)현 마츠에(松江)시에 야에가키(八重垣)신사가 있는데 Susanoo와 그의 아내 쿠시나다히메를 모신다.
와카야마현 구마노혼구(熊野本宮) Shrine 또한 Susanoo를 제사지내며 3000여개의 지역신사를 거느리고있다.

스 사노오는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신대기(神代記)에 나타나는 남성신으로 일본역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이 사람 으로부터 황실의 역사가 시작된다. 본명 쇠코(소의 코라는 뜻)로서 이즈모(出雲)를 먼저 점령하고 오오사카, 와카야마 그리고 이세지역을 점령하였다. 쇠코왕, 須佐之男, 素盞鳴, 소고(素古)왕, 초고(肖古)왕, 속고(速古)왕 등으로 기록되었다. 백제 5대 초고왕 ( 재위기간 서기 166 – 214) 으로 왕자시절 현재 함경도 함흥지역 우두주(牛頭州) 또는 소시모리라는 곳에서 이즈모로 온 것으로 추측하나 소시모리(소의 머리)의 위치는 학자에 따라 다르다.
시마네(島根)현 마츠에(松江)시에 있는 야에가키 신사에 스사노오와 그의 아내 쿠시나다히메의 초상화가 남아있다. 스사노오의 아들 이름이 오호쿠니누시(大國主神)인데 백제 6대 구수(仇首)왕 또는 귀수(貴須)왕으로 불린다. 이즈모 타이샤 (出雲大社)가 그와 그의 아버지 스사노오를 모시는 사당이며 천조대어신을 모시는 이세신궁과 더불어 일본에서 가장 오래 된 신사이다.
백제 4대 개루왕의 왕자 쇠코왕은 이즈모에 들어와 토착민들을 정복하고 그 곳을 근거로 하여 영향력을 확대해나간다. 1984년 시마네 현 히카와쵸 도로공사중 358개의 청동검이 무더기로 발견된다(Kojindani 유적지). 그 때까지 일본전역에서 발견 된 청동검이 도합 300여개 뿐이었고 대부분 큐우슈에서 나왔다. 전설로만 간주되던 이즈모의 스사노오 이야기가 역사가 된 순간이었다. 1985년 그 부근에서 6개의 동탁(銅鐸)과 16개의 넓은 창날이 나왔다. 비파형 세형동검은 중국대륙에서는 나오지 않고 만주와 한반도에서만 발견되는 유물이다. 일본황실의 보물 Kusanagi 또한 세형동검이다. 1996년 3.5 킬로 쯤 떨어진 곳에서 39개의 동탁이 발견되었다(Kamoiwakura 유적지). 일본에서 당시까지 한 곳에서 가장 많은 동탁이 발견된 곳은 24개가 발견된 시가(滋賀)현 오이와야마 유적지였다.

스사노오는 오오사카 호츠마 국(秀眞國) 을 점령하고 천조대신의 12신녀 가운데 8명을 수습하여 시마네현 이즈모 야에가키 궁에 억류한 뒤 자신의 후비로 삼는다. 이들을 두고 백제 왕으로 떠나는 사나이의 감상이었을까? 스사노오가 지었다 하여 야쿠모타츠(八雲立)라는 노래 한 수가 전해온다.
“겹겹이 쌓인 구름으로 정 든 님을 두른다. 이즈모(出雲)에 구중심처의 울타리를…”
이들의 몸에서 5명의 왕자와 3명의 공주를 얻었다. 이 8명의 신녀가운데 한명이 그 유명한 천조대어신(天照大御神) 아마테라스 오호미가미이며 히미코(卑彌呼)인 세오녀(細烏女)이다. 본래 호칭은 아마테루 히메였으나 후대에 신격화가 진행될수록 수식어가 늘어난다.

서기 166년 스사노오는 장남 오오쿠니누시(大國主神) – 훗 날의 구수왕에게 오오사카 大國城을 맡기고 백제왕으로 부임한다(재위 166 – 214). 한편 천조대어신은 이즈모의 아에가키 궁을 떠나 큐우슈로 가서 김수로 왕의 도움으로 야마다이 國의 여왕이 되었다. 백제의 초고왕은 히미코 여왕에게 Endorsement의 증거로 쯔무가이대도 (都牟刈大刀=kusanagi) 를 보냈고 추모왕(고구려 동명성왕)의 신위를 모시도록 부탁하였다. 이 쯔무가이대도는 황실제일의 보물로 취급되고 야마토 타케루가 훗날 여러 부족국들을 정복 할 때 정통성의 표지로 사용된다.
천조대어신과 스사노오 사이에서 오시호미(忍穗耳)가 태어났다. 정치력도 있고 야심도 많았던 히미코는 오시호미를 오오사카의 왕으로 앉히려고 백제의 초고왕과 오오사카의 구수왕에게 로비(Lobby)를 하지만 모두 거절 당한다.
8명의 신녀들을 수습하기 전 스사노오에게는 이미 자식이 여럿 있었다. 이 자식들과 히미코의 후손간에 훗날 전쟁이 일어나는데 히미코의 증 손자가 Lobby에 의해서가 아니라 실력으로 야마토의 왕이 되니 그가 신무천황이다. 그는서기 244년 가야의 도움을 받아 구수왕 계열의 지배자들을 제압하고 奈良 가시하라 궁의 주인이 된다. 신무천황때 역사기록이 시작되었으므로 신무의 아버지가 천손강림의 주인공으로 기록되었으며 후대에 이를 바꿀 수 없어 일본서기와 고사기에서도 신무천황 부터 천황기록이 시작되고 일본의 조상으로 모시게 된다. 천조대어신의 권위가 후일 스사노오를 능가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9. 천손강림(天孫降臨)

고 사기와 일본서기의 일본건국신화 클라이맥스는 역시 高天原(Takama no Hara, 신들의 나라)에서 인간세(葦原中國, Ashihara no Nakatsu Kuni, 갈대 우거진 넓은 들)로 하늘의 아들을 왕으로 내려보내는 장면이다. 먼 나라 그리스의 신화가 아니라 바로 우리 조상들이 1500년전 만든 이야기다. 야마타이국의 여왕 천조대어신 히미코와 금관가야의 高皇産靈神(다 카미 무스히노 카미로 읽으며 모든 신이 무서워하는 신이라는 뜻의 한국어, 김해 김수로왕을 지칭, 高와靈이라는 글자가 포함된 것은 우가야가 경북 고령에 있었음에 유의할것)의 합의로 자기들의 손자 니니기(174 – 220)를 眞床追衾(마도꼬 오후후스마로 읽고, 마도께서 우시며라는 의미)이란 이름의 이불로 싸서 구름위에서 안개쌓인 높은 산 봉우리로 내려오는 장면이 연출된다.
한국 말을 모르는 사람에겐 마도꼬 오후후스마라고 이름붙은 이불로 쌌다면 단순한 기술인것 같지만 마도꼬 오후후스마란 단순한 고유명사로 쓰인게 아니고 아이의 아버지 마도 즉 오시호미가 울면서 떠나보내는 아들을 강보에 쌌다는 간곡한 의미를 이 신화의 저자는 후세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어 암호처럼 끼어넣은 것이다. 여러 곳에 이 단어는 이렇게 읽으라며 토가 달려있는데 모두 한국말이다. 따라서 한국말을 모르면 감춰진 의미를 파악할 수 없게 되어있다.
황손은 天磐座(아마 노히 하쿠라로 읽으며 아마 너희들은 할 수 있을거라는 뜻)를 떠나 天八重雲을 헤치며 조심조심 길을 찾아 日向襲(휴가소로 읽으며 해가 솟는 곳의 뜻)의 高千穗峰(다까치호노 타케로 읽고 다 같이 해 낸 산 봉우리의 뜻)에 내려왔다. 이들은 조상들과 유대관계가 끊기지 않고 새로운 땅에서 번성하도록 굿을 하고(患日, 구시히, 굿을 하다의 뜻이며 김해 김수로왕이 내려왔다는 김해 龜旨峰 또한 이런 의미라는 해석도 있음) 내려와서(제사지내고 기원을 들였다는 뜻) 나가야의 가사사노 미사끼(笠狹崎)에 도착했다.
이 신화때문에 Takachiho(高千穗)라는 단어는 高千穗宮 또는穗高千峰으로 많이 쓰인다. 큐우슈 동쪽에 남북으로 높은 산맥이 있는데 제주도 한라산과 비슷한 높이이다. 미야사키현 동해안 노베오카시에서 이까세강의 계곡을 따라 이 산을 넘으면 서쪽의 구마모토로 갈 수있는데 고개정상에 高千穗라는 마을이 있고 신화속에 나오는 성지라고 한다. 그런데 이보다 남쪽의 기리시마(霧島)시 가까운 곳, 미야사끼현과 가고시마현 사이에 또 높은 산이 있고 穗高千峰이 있어 신화속의 성지라고 한다. 하늘에서 내려 온것으로 기록되었으므로 훗날 높은 산이 있는 곳이면 거기가 다카치호 봉 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모든 위치는 Google 지도와 위성사진으로 확인된다. 일본은 이미 지도와 위성사진을 볼 수 있는 서비스를 시작했다.
마지막 부분의 가사사노 미사키는 큐우슈 최 남단 사츠마 반도 남서쪽에 현재 노마 미사키(野間岬 – Cape Noma)로 불리는 곳이다. 일년 내내 바람이 많다. 나가야(長屋)는 현재의 가고시마현 가세다(加世田)시 부근이다.
서기 174년 김해만을 떠난 배는 오시호미의 아들 천손 니니기(瓊瓊杵)와 그의 보좌역 8명을 싣고 큐우슈 최 남단 사츠마 반도의 가사사 미사키에 닿는다. 히미코가 보낸 무사들이 반가히 맞이한다. 가까운 곳에 야마타이국이 있고 여왕이며 친 할머니가 되는 히미코가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으리라.
이 손주를 야마토의 지배자로 만드는 것이 히미코 할머니, 아마테라스 오호미가미의 꿈이었다.

10. 귀수(貴首)왕 – 大穴牟遲

백제 6대 귀수왕 또는 구수왕(서기 214 – 234재위)을 일본에서 오호 아나무지로 기록했는데 아나는 貴를 무지는 머리(首)를 뜻한다. 스사노오 초고왕의 아들이다. 초고의 왕자시절 이즈모에 올 때 백제에서 출생하여 함께 이즈모에 온 것으로 짐작된다. 서기 166년 초고왕이 백제로 돌아가고 귀수왕자가 아버지 대신 일본을 다스렸다. 비록 신화라고는 하나 고사기와 일본서기 에 그의 기사는 압도적으로 많이 나온다. 신대(神代 가미요라고 읽음)에 나오는 신 가운데 가장 많은 이름을 가졌으며 자식이 181명이었다. 요즘도 아이를 원하는 젊은 여인들이 Ohokuninushi (大國主神,오호 쿠니누시)의 신사에 와서 치성을 드린다. 出雲大社, 大神(오오미와)神社, 氣多神社, 大和神社 등 수 많은 신사에서 제사지낸다. 그의 이름 가운데 가장 많이 불리는 것이 Ohokuninushi이다. 국토의 주신(主神) 이며 왕을 의미하는 신의 이름이다. 역사적 의미를 갖는 왕비와 자식들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Suseri Hime (백제 출신의 본 부인): 자손 기록이 없음.
2. Takiri Hime (후쿠오카 출신): 아지쓰키 다까히코네(180 - 244) 훗날 의덕천황, 쿄오토 가미 가모신사의 제신.
3. Kan Yate Hime (백제 출신): 사대주신(202 – 268) 훗날 백제 사반왕이며 일본의 효소천황. 쿄오토 시모 가모신사의 제신.
4. Konohana Sakuya Hime (대마도 출신): 호데이(187 – 241) 훗날의 우미사치로서 큐우슈의 야마사치 호호데미(194 – 256)와 나라 바꾸기의 장 본인. 대마도로 밀려났던 이 호호데미( 천손강림한 니니기의 아들)가 나중 신무천황이 된다.
오호쿠니누시는 이상적인 군주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난관에 처한 흰 토끼를 구 해 주는 모습에서 보듯 백성들에게 상냥하고 자애로왔다. 국토경영에도 탁월한 수완을 보여 치산치수에 힘 쓰고 농업진흥에 진력하였다. 국민건강 증진을 위하여 약초를 재배하고 연구한다. 민생과 국토경영을 위하여 자주 전국을 순행하던 중 쓰쿠나 히꼬나(少彦名命)라는 탁월한 현자(賢者)를 만나 그와 함께 태평성대를 구가하였으며 나라의 창고에는 비축된 식량이 넘쳤다.
한반도에서는 스사노오 초고왕이 부임하자마자 신라와 백제간의 80년간(서기 86 – 166)의 평화를 깨고 서기 166년 신라를 공격하기 시작한다. 신라의 아달라 이사금(154 – 184재위)과 다음의 내해 이사금(196 – 230년 재위) 재위 내내 신라는 백제에게 시달린다. 백제왕계로는 초고왕(166 –214 재위)과 구수왕(214 – 234재위)연간이다. 이 기간 마한, 진한, 변한, 가야의 대부분이 백제의 영향력아래 놓이게 되고 일본열도는 대국주신의 아들들이 장악한다. 경남 남해안 지방의 포상팔국 (浦上八國)이 백제의 담로가 되어 왜와 함께 가야를 압박해 들어오는 것이 서기 208년이며 227년경에 가야는 확실한 백제세력이 된다.
한편 만주에서는 한나라의 요동국왕 공손강이 부여왕 위구태와 협력하여 대방고지에 대방군을 세우고(204년경) 만주의 부여인을 대거 이주시켜 백제의 위협세력이 된다. 서기 239년 백제왕이 되는 고이왕은 위구태의 후계자이다(삼국사기기록 서기 234년). 온조의 후손이 나라를 이 때 고이왕에게 빼았겼다가 근초고왕 때 다시 찾는다. 야마토 타케루 근초고왕은 부조의 왕업을 회복하기위하여 20대부터 일본에서 전쟁의 피비린내 속에서 살았다. 여기 나오는 초고왕과 구수왕의 이름을 따라 왕명을 근초고와 근구수라 한 것은 150여년전의 조상에게서 정통성을 확보코자 함이다.
구수왕이 서기 234년 사망하자 그의 아들 사대주신 사반왕(202 –268)이 왕위에 올랐다. 이 부분의 역사기록은 많은 의문을 남긴다. 왕조가 바뀌는 격동의 시기였다. 온조의 백제왕조를 새로 부여에서 들어 온 위구태의 후계들이 장악해버린 것이다. 초고와 구수의 피땀어린 노력이 왕조내부에서 좌절된다. 고이왕이 백제를 빼앗아 왕이 되자 사반왕은 이즈모로 쫒겨나 효소천황이 되었으나 정치에는 관심이 없고 노는 것을 즐기는 천하태평한 사람이었다. 일본 사람들이 좋아하는 에비스 신의 넉넉한 모습을 사진으로 올린다. 결국 그는 먼 조카 뻘인 호호데미에게 일본마져 빼앗긴다.
사반은 일본에서 코토시로누시(事代主神) 또는 에비스(惠比壽)신 (七福神 가운데 하나 – 사진 참조)으로 불리며 美保神社, 今宮戎(이마미야 에비스) 神社, 長田神社등의 신사에서 모시며 쿄오토 시모 가모신사의 제신이다. 신의 계보 다음의 인간의 계보 첫째 왕 진무(神武)천황에게 최대의 저항세력이었던 오오사카의 의덕천황(180 – 244, 귀수왕의 아들)은 이 전쟁에서 전사하였고 쿄오토의 가미 가모신사의 제신이다.

일 본의 신은 교의(敎義)를 말하지 않는다. 인간을 향하여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말하는 법이 없다. 오직 인간의 이해와 해석의 지평이 있을 뿐이다. 만주벌의 부여는 한국과 일본인의 뿌리라고 할 수 있다. 언어의 뿌리도 부여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긴 세월이 흐르면서 일본은 우리보다 덜 변하여 옛 부여의 언어가 일본어에 더 많이 남아 있다고 한다. 연개소문을 일본에서 이리가수미로 기록했는데 일본기록이 7세기의 실재 발음에 더 가까울 것이다. 나라의 이름마져도 지금 우리가 발음하는 데로의 고구려, 백제, 신라가 아니라 일본기록에는 고우구리, 구다라, 시라기로 되어 있어서 어느 것이 그 시대의 실재 발음이었는지 혼란스럽다. 통일 신라이후 우리는 우리의 이름과 지명을 너무 중국식으로 바꿔 버렸다. 자기의 문자가 없어서 남의 문자를 빌리면 언젠가는 자기의 동질성은 사라지게 된다. 금 세기들어 우리들의 형제 만주족은 소멸되고 말았다. 청 태조 누루하치가 중국을 차지하여 청 나라를 세웠으나 만주의 여진족은 중화의 용광로 속에 자취도 없이 사라져 간 것이다. 역사는 물리적인 힘만으로 성취되는 것이 아니다. 문화와 철학의 뒷 받침이 있어야 역사는 생명력을 확보한다.
서기 1644년 3월 17일 명말(明末)의 유적 이자성은 명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 의종이 살고 있는 북경 자금성을 포위하고 양위를 강요한다. 황제를 지켜 줄 한 사람의 신하도 남아있지 않았다. 황제는 자금성 북쪽경산 (景山) 에서 스스로 목 메어 자결한다. 교교한 달빛만이 황제의 최후를 지켜 보고 있었다. 그로부터 45일 후인 1644년 5월 2일 도루곤의 청군은 이자성을 무찌르고 조양문으로 입성한다. 우리역사의 병자호란은 1636년의 일이다. 중국은 자기 영토내의 역사는 중국의 역사라는 주장을 넘어 중국어로 기록된 모든 역사는 중국의 역사라는 주장을 펴고있다. 동북공정의 거취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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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왜의 5왕 (The Five Kings of Wa)

3세기 이후 147년간 기록이 없다가 서기 413년 중국사서에 일본기록이 나타난다. 조공을 바치고 작위를 받고자 하는 5명의 왕의 이름이 5세기에 나온다. 근구수왕(320–394)의 야마토 건국후의 왕들의 이름인데 이들이 누구인지 일본역사 학계는 지금까지 확인하지 않고 있다. 5명(讚-珍-濟-興-武)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서기 413년 왜왕 찬(讚): 사신기록(晉書 안제기)
서기 421년 왜왕 찬(讚) : 유송(劉宋) 무제 안동장군왜국왕 제수(宋書)
서기 425년 왜왕 찬(讚): 유송 문제에게 사신과 공물(송서)
서기 430년 왜왕 찬(讚): 왜왕 공물(송서)
서기 438년 왜왕 진(珍): 왜왕 찬이 죽고 동생 진(珍)이 즉위하여 공물을 바치고 사지절도독왜백제신라임나 진한 모한6국 제군사안동대장군왜국왕을 칭하다. 왜왕에게 안동장군왜국왕을 제수(송서)
서기 443년 왜왕 제(濟): 제가 공물을 보내 안동장군왜국왕으로 임명됨(송서)
서기 451년 왜왕 제(濟): 제에게 사지절도독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6국 제군사 겸 안동장군 제수(송서)
서기 460년 왜왕 제(濟): 공물기록(송서)
서기 462년 왜왕 흥(興): 제의 왕자 흥(興)을 안동장군왜국왕으로 임명(송서)
서기 477년 왜왕 무(武): 왜왕 흥(興)이 죽고 그의 동생 무(武)가 즉위하여 사지절도독왜백제신라임나 가라 진한 모한7국 제군사안동대장군왜국왕을 자칭(송서)
서기 478년 왜왕 무(武): 왜왕 무를 사지절도독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6국제군사안동대장군왜국왕으로 임명(송서)
서기 479년 왜왕 무(武): 왜왕 무를 진동대장군으로 임명(濟書)
서기 502년 왜왕 무(武): 왜왕 무를 정동장군으로 추증. 정동대장군의 오기인 듯함(梁書)
백제가 중국 역사서에 나타나는것은 근초고왕 27년(372)에 양자강유역에 위치한 동진(東晋)에 조공하고 근초고왕이 [진동장군 낙랑태수(鎭東將軍領樂浪太守)]에 임명된 것이 최초의 기록이다. 그후 백제의 동진에 대한 조공은 몇차례나 계속되었고, 침류왕(枕流王) 원년에 동진으로부터 불교가 들어왔다.
서기 418년에 동진이 멸망하고 420년에 송(宋)이 건국되자 백제는 빈번히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관작을 받았으며 각종 서적과 기술의 전수를 요청하였다. 중국사에서 4세기초부터 6세기말까지 정치 세력이 양자강 남쪽과 북쪽지역으로 양분된 채 많은 왕조가 일어섰다 사라져 가는데 남북조(南北朝) 시대라고 부른다. 바로 이러한 시기에 백제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한동안 남조(南朝)의 국가들에게만 조공하였을 뿐, 북조(北朝)의 국가들과는 전혀 교류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백제가 북조의 북위(北魏)에 처음으로 사신을 보낸 것은 개로왕 18년(472)의 일인데, 개로왕은 고구려를 매우 비난하면서 군사적 도움을 요청하는 장문의 문서를 보낸다. 그러나 백제의 요청은 당시 고구려의 군사력에 부담을 느끼고 있던 북위의 완곡한 거절로 무위에 그쳤을 뿐 아니라, 오히려 고구려에게 발각되어 장수왕의 단호한 손 보기 보복 침입을 불러와 끝내 위례성이 함락되고 개로왕과 왕비 왕자들이 모두 처형된다.
Wikipedia에 보면 상기 5명의 왜왕과 관련하여 일본측 학자들의 견해로 보이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있다. 진상을 알고 있지만 밝히고 싶지않은 속 마음이 엿보이는 추측뿐이다. 일본 천황으로 기록된 사람들이 단일혈통이 아니며 일본이 백제의 분국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일본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불교가 되었던 역사가 되었던 일본은 아시아 삼국 가운데 가장 높은 수준의 학문적 성취를 이룬 나라이다. 자기들은 알고있지만 이제와서 새삼스레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않은 것이 백제와 관련된 고대사 부분이다. 외국의 학자들이 명백한 증거를 대지 않는 한 앞으로도 그들은 결코 이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Comparison with the Japan history book
As the name of kings recorded are very much different from the names of emperors in Nihonshoki, specifying which emperor was the one recorded in Chinese history is under longtime dispute unsolved for centuries. Most contemporary historians assign the five Japanese kings to the following emperors (two possibilities are identified for Kings San and Chin), mostly based on the individual features of their genealogies reported in the Chinese sources. On the other hand, archeological evidence, such as the inscriptions on the Inariyama and Eta Funayama Sword also supports the idea that Bu is an equivalent of Emperor Yūryaku who was called Wakatakeru Okimi at his age.
San 讃 : Emperor Nintoku or Emperor Richū
Chin 珍: Emperor Hanzei or Emperor Nintoku
Sai or Sei 濟: Emperor Ingyō
Kō 興: Emperor Ankō
Bu 武: Emperor Yūryaku
Since Bu is most likely to be Yūryaku, Kō, who is said to be Bu's older brother, is likely to be an equivalent of Ankō who also noted in Nihonshoki as an elder brother to Yūryaku. However, Book of Song records Kō as "Crown Prince Kō", there is a possibility that he is not Ankō, but is Kinashi Karu no Miko, who was a crown prince of Ingyō.
Some suspect that they were rulers of a non-Yamato court which in the 5th century ruled most of what is currently Japan, and who were eventually ruined by the ancestors of current imperial dynasty. [citation needed] However, such an idea is not widely accepted among scholars.
지금까지 우리는 상기 5명 가운데 3명의 이름을 이미 거론하였다. 무(武)는 백제 무령왕이 일본에서 왜무왕이었고, 곤지왕이 왜흥왕, 개로왕이 일본에서 왜제왕으로 군림하였다. 중국에서 받은 왜왕의 작위가 왜백제신라임나가라 진한 모한6국 제군사왜국왕으로 왜가 맨 앞에 나온다. 이것을 보고 일본이 백제신라에 대하여 지배적 위치에 있었다고 주장하면서도 백제의 왕자들이 일본을 통치하다가 백제왕으로 부임했던 것은 모르쇄로 일관한다.
찬(讚)과 진(珍)은 좀 설명이 필요하지만 진은 광개토왕의 왕자 고진이며 5세기의 한 때 잠시 일본을 정복하여 고구려의 지배하에 두었다. 닌토쿠 천황은 전사했고 고진이 잉교(允恭)천황이 된다. 중국사서에는 찬이 죽자 동생 진이 왕위에 올랐다고 기록되었지만 동생이 아니라 적국 고구려에게 나라가 점령된 것이다.
그런데 왜 이러한 조공과 작위요구가 유송(劉宋)에 집중되어 있느냐 하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창시자의 성씨를 따라 유송으로 불리우는 이 나라는 서기 420 년에서 479년까지 단 기간 존재했던 남조 첫번째 왕조이다. 이 나라가 창건되자 마자 기다렸다는 듯 백제와 왜의 외교력이 집중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12. Uji-no-Waki- Iratsuko (菟道稚郞子)

우 지노 와끼 이라쓰꼬로 읽히는 이 이름은 우지마을의 어린 도련님 정도의 의미이다. 백제의 왕인 박사가 가르쳤다는 왕자님의 어릴 때 이름이다. 서기 363년생으로 근구수(오진왕)의 5 남이며 근초고왕의 손자다. 칠지도 편에 나온 왜왕 기(奇)가 이 사람이다. 우리나라 학자들이 이 이름을 토도치랑자라고 쓰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무의미한 기록이라고 본다. 국제적으로 공인되지 않은 언어는 통용될 수 없기 때문이다. Internet 검색 이 가능하도록 영문표기를 하고 본래의 발음데로 고유명사를 사용한다. 우리 말로 쓸 때 우지노 와끼 이라쓰꼬 는 가능하지만 토도치랑자는 무의미한 언어이다. 혼다, Honda, 本田는 가능하지만 본전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권력자인 오진왕은 다섯 째 왕자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서기383년 백제의 15대 침류왕으로 즉위시킨다. 그러나 침류는 그 해에 12살의 동생 아신에게 왕위를 맡기고 중국 동해안의 백제분국군을 이끌고 전진황제 부견의 중국통일 전쟁에 참전한다. 누가 보아도 100% 승리가 보장된 전쟁이었다. 383년의 비수대전이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한 패배였고 중국대륙은 통일 일보 직전에서 무주공산의 혼란속에 빠져든다. 이 혼란의 틈 바구니에서 어떤 가능성을 보았을까? 침류는 귀국하지않고 대륙에서 근거를 마련하고자 악전고투한다. 삼국사기나 일본서기는 왕이 바뀌면 무조건 죽었다고 기록했다.

이 틈에 나이많은 왕자 오호야마모리(大山守命)가 오오사카에 있는 부왕 오진왕의 허락없이 12세의 동생 아신을 몰아내고 백제왕이 되니 진사왕이다. 역사의 장난이라고나 할까 광개토왕의 사나운 발톱에 맨 처음 당한 것이 정통성 없는 진사왕이었다. 고구려에게 패 한 뒤 진사왕은 야마토의 아버지 오진왕에게 도움을 청 한다. 392년 오진은 야마토의 장군들을 백제에 보내 아신을 복위시키고 진사를 일본으로 압송한다. 이렇게 되어 아신은 두 번 왕위에 오른다. 아신과 진사의 묘는 지금도 일본에 남아있다.

대 고구려전이 한창인 394년 근구수 (오진왕)가 사망하자 중국의 침류가 야마토에 돌아온다. 배 다른 왕자들 11명 가운데서 후계자로 부왕의 낙점을 받았던 침류는 아직 중국에서 일가를 이루지 못 한 시점이었으나 백제나 야마토의 왕권을 거부한다. 왕좌를 차지하려고 피 나는 싸움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침류는 바로 손 위의 형 오호사자끼를 밀었고 오호사자끼는 침류에게 양보하기를 3년, 397년 침류는 3년상을 마치고 중국으로 다시 돌아가고 오호사자끼가 닌토쿠(仁德)천황이 되어 대 고구려 전을 이끈다.
그러나 이때 북경의 건절장군 여암의 백제군, 유주자사 부여진의 요서 백제병력, 그리고 벽려혼의 산동 백제병력을 잃고 침류는 맨 주먹으로 동진(東晉)에서 문자 그대로 백의종군으로 새로 인생을 시작한다. 405년 이름을 중국식으로 유유(劉裕)라고 바꾸고 손은과 환현의 난을 평정한 뒤 동진의 황제 안제를 복위시킨다. 유유는 후연의 침공을 격퇴하고 북벌을 감행해 후진의 요홍을 멸망시킨 뒤, 그 명성과 북부군의 병권을 배경으로 공제(恭帝)로 부터 선양을 받아 420년 송나라를 개국하여 고조무황제가 된다. 그러나 3년후인 422년 나이 60세로 이국의 하늘 아래서 붕어한다.
송 나라의 역사에 백제나 야마토 커넼션과 관련된 기록은 없다. 다만 당시의 적국이었던 북위에서 송 나라를 일러 섬 오랑케의 나라로 기록하였다. 조광윤이 세운 송나라와 구별하기위해 이 나라를 유송이라 부른다.

이 나라가 420년에서 479년까지 존속했는데 백제와 야마토에서 백제-왜 그룹 총수격인 침류의 인증을 받고자하는 왕 들의 기록이 5세기의 왜 5왕으로 나타난 것이다.

한 가지 덧 붙일 것은 일본서기에 아지노오미(阿知使主)라는 사람이 이때 침류의 휘하로서 백제-왜-중국을 빈번히 왕래하며 정책을 조율하였다. 나중 이 사람은 408년경 많은 식솔을 이끌고 일본에 이주하여 야마토노 아야노 아타히(倭漢直)의 조상이 되었다. 이 사람의 도움을 받으며 410년 침류의 아들 미토모 와께(御友別), 가모와께(鴨別)가 일본에 들어 와 고구려 침공으로 부터 일본을 지키려고 동분서주한다. 중국에 있던 침류는 닌토쿠 천황의 힘 만으로 일본을 방어하기 힘 들다고 판단하고 아들 둘을 일본에 내 보낸 것이다. 미토모 와께는 오오사까 를 공격하려면 꼭 통과해야 되는 요충 기비(吉備, 현 오까야마 현)와 사누끼(讚岐, 현 가가와 현)를 먼저 장악한다. 세도나이까이를 통해 오오사카를 침략하자면 반드시 기비와 사누끼사이의 병 목처럼 좁은 해협을 지나야한다. 그 후 411년 토오쿄오지역까지 장악 하고 왜찬왕(倭讚王)이라 칭했다. 그가 18대 천황으로 기록된 한제이(反正) 천황이며 413년 아버지가 시중(侍中)으로 있던 동진에 왜의 사자를 보냈다.
중 국에서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자란 그가 아버지의 밀명을 받아 일본을 장악하고 그 결과를 보고한 것이다. 왜찬왕은 훗날의 왜제왕 개로 – 왜흥왕 곤지의 사촌 할아버지이며 왜무왕 무령의 증조 할아버지이다. 유송이라는 나라는 결국 백제왕실의 또 하나의 분국이었다.

13. 장보고 (? – 841)

京都市 북동방 표고 848미터의 Hiei(比叡)산은 예로부터 일본 3대 靈山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나라시대말기 788년 Saicho (767 – 822) 가 일본 천태종의 총본산 Enryakuji(延曆寺)의 중핵 根本中堂을 히에이산 산정에 건립한다. 861년 10월 根本中堂을 내려다보는 고지대에 천태종 3대좌주 자각대사 Ennin (圓仁, 794 – 864)이 文殊樓를 세우고 문수상을 안치하였다. Ennin사후 그의 제자들이 스승의 뜻을 받들어 엔랴쿠지의 별원으로 적산선원을 건립하고 적산명신을 모셨다. 적산명신이란 장보고를 신격화한 이름이다. 2001년 12월 문수루앞에 높이 4.2미터의 청해진대사장보고비가 건립된다. 根本中堂을 내려다보는 高臺에 세워진 신라해상왕 현창비(顯彰碑)는 완도군에서 11년에 걸친 노력끝에 제작되어 일본으로 가져 온 것이다. 곁에 세워진 설명문에 “두 사람이 쌓아올린 깊은 우정이 금후 한일양국의 국민들에게 알려져 양국의 우호증진에 기여하도록 이 비를 세운다”라고 적혀있다.


중 국 산동반도 榮成市 石島鎭에 赤山 法華院이라는 사찰이 있다. 820년 서주(徐州)의 무령군소장 장보고가 건립한 사찰로 요즘 미국에 있는 한국교회처럼 당 나라때 신라교민들의 구심점이 되었던 것 같다. 산동성은 1989년 유적지를 고증하여 옛 모습데로 복원하였는데 복원과정에서 일본측 협력이 많았던지 일본인들은 9 세기의 일본의 승려 Ennin(圓仁)이 지은 절이라 하여 기념비까지 세웠던 모양이다. 법화사 본전 건너편 장보고 기념관은 중국의 한 기업체의 후원으로 2003년 건립되고 4 미터 높이의 화강석 좌대위에 약 8미터 높이의 청동제 장보고장군 동상도 세웠다. 한국해양경영사연구회가 한국선주협회 후원을 얻어 1990년 4월 적산 법화원장보고기념비를 건립하였다.

중국 양자강 하구 현재의 Ningbo(寧波)항은 당 나라때 명주(明州)항으로 처음 설치되어 국제적인 무역항으로 성장했다. 산동반도, 신라, 일본은 물론 대만, 광주, 월남, 인도, 아라비아의 특산품들이 이곳을 통하여 당의 수도 장안으로 수송되었다. 닝보항 동해바다에 舟山群島(Zhoushan Archipelago)가 있다. 이곳은 백제의 해외영토로 장보고의 시대 당나라의 관할권이 미치지 않은 특수지역이었다. 중국 동해안에 장기간 유지되었던 백제분국 사람들이 백제 멸망후 요즘 미국의 영주권자처럼 중국 동해안지역에 흩어져 살았다. 이들은 백제가 없어진 뒤에 모두 신라인으로 불렸지만 알고 보면 원래 백제인들이었다.

이들이 舟山群島를 기반으로 아시아의 해상 무역로를 장악하고 있었다. 이 시대 일본에서 당에 보낸 조공사를 견당사 (遣唐使)라 하는데 동지나해를 횡단하며 많은 견당사선이 해난사고로 침몰하여 고통을 겪었다. 838년 기록을 보면 600여명이 출발하여 391명이 살아 돌아온다. 이 때 일본기록에 명주에 근거를 두고 해상무역에 종사하는 신라상인들의 이름이 나온다. 일본의 견당사는 장지신(張支信), 이연효(李延孝), 이인덕(李隣德)등 많은 신라상인들의 도움으로 귀국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일본 견당사가 타고 온 배는 손상이 너무 심하여 일본까지 항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신라상인들 가운데 장지신은 닝보 – 일본간 을 3일만에 주파한 적도 있는 항해의 귀재로 소문 나 있다. 장지신은 장보고와 동시대 사람이며 장보고가 죽은 후에도 그의 활동기록이 전한다. 이 두 사람은 필시 서로 아는 사이였을 수 있으며 어쩌면 같은 집안 사람 들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북한 공작원 김현희사건을 모델로“배후”를 쓴 작가 서현후의 바다이야기에 나오는 시나리오이다.
이 섬들 가운데 면적 12.5평방킬로미터의 조그만 섬, Putuoshan(普陀山)이 있다. 이름은 산이지만 실재는 조그만 섬이다. 한국에서 보통 보타도라고 부른다. 이 섬은 인구 3천명에 그 3분의 1이 불교승려이다. 온 섬이 불교유적이며 중국의 4대 불교성지 가운데 하나이다. 이 섬에 조음동(潮音洞)이라 불리는 자연동굴이 있는데 완도의 원래이름이 청해진 조음도(助音島)였다. 완도의 가장 높은 산봉우리는 상황봉이며 보타도는 상왕봉이다. 완도에 법화사가 있고(석도진의 법화원에 주목할것) 보타도에 법화동이 있다. 완도에 관음암이 있었고 보타도에 관음사가 있다. 해상무역에 종사하던 백제계 교포상인들이 수호신으로 관음보살을 모시고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였다. 지금 보타도에는 높이 33미터의 관음보살 입상이 동지나해를 내려다보고 있다. 장보고는 이 지역에서 태어났고 이 지역에서 자랐으며 바다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이곳을 모델로 청해진 조음도를 설치 운영했다고 보는 것이다. 물론 청해진 대사라는 관직은 당 나라의 것이다.

서기 828년 청해진 설치 그리고 841년 장보고의 암살까지 청해진의 역사는 13년에 불과하다.(삼국사기에는 장보고 사망 846년으로 되어있다. 당의 대리인을 신라조정에서 암살하였으므로 당과 외교갈등이 생기고 신라사신의 당 입조거부가 5년간이나 이어졌다). 막연하게 그가 청해진에서 시작하여 모든 성취를 이루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가 청해진을 설치하기 전 이미 해상무역, 항해기술, 조선기술 및 아시아-중국-일본-신라간의 넷트웤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아야한다. 신라에서 제공받았다는 만명의 인원은 병사가 아니라 일종의 수출선원과 자체경호병력으로 생각된다. 배 한척당 75명정도의 인원이 필요하다고 보면 100척을 운항하는데 7500명의 해상인원이 필요하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기록만으로는 그는 신화속의 인물이나 다름없다. 그가 어느 나라에서 태어났고 어디서 성장했는지 전해진 바 없고 청해진의 성격과 그의 대사라는 직함이 당의 것인지 신라의 것인지도 모른다. 신라는 원래 해양세력이 아니었다.
삼 국이 정립하고 있을 때부터 대양을 휘젓고 다닌 것은 백제였다. 따라서 삼국이 통일된 뒤 중국 신라 일본과 아시아를 휘젓고 다닌 것은 당연히 백제계의 유민들이었다. 장보고는 우리역사속에 몇줄 기록되어 있지만 그것마저도 천민출신에 신라조정의 반역자로 기록되어있다.

우리역사는 결코 그를 영웅으로 기록하지 않았다. 그의 힘을 빌어 쿠데타에 성공하여 권력을 잡고서도 그의 출신 때문에 그의 딸을 왕비로 택할수 없다는 논리로 신라조정은 약조를 어긴다. 그의 이름을 기록하기를 弓福(삼국사기), 弓巴(삼국유사), 張保皐(중국기록), 張寶高(일본기록)로 기록자의 평가가 다르다. 장보고 이름에 사용된 글자를 보면 일본이 가장 존경심을 표현한 듯하다.
현재 완도의 장도(將島)가 그의 본거지였음이 확인된 것도 40여년 밖에 되지않는다. 장보고는 중국 산동성 적산촌에 법화원이라는 사찰을 건립하였고 신라와 일본에서 온 스님들 뒷바라지를 많이 해 준 것 같다.
그 런 인연으로 1200년의 세월이 지나 한 일본스님의 입당구법순례행기가 세상에 나오고 그 일기를 통해서 장보고에 관한 많은 정보가 알려지게 되었다. 일본 천태종 3대 좌주가 된 圓仁이 쓴 이 일기는 하바드 대학의 라이샤워 교수가 영역하여 전 세계학계에 장보고의 이름이 알려졌다. 圓仁은 장보고의 도움으로 9년간의 순례생활을 마치고 살아서 일본에 돌아 가 평생 그 고마움을 잊지않았고 엔랴쿠지에 적산선원을 세우고 장보고를 적산명신으로 신격화하여 지금도 모시고있다. 어찌된 일인지 우리의 조상들은 한반도가 아닌 일본에서 기억되고 신으로 모셔지고 있다.


14. 慈覺大師 圓仁 (794 – 864)

9세기 동지나해의 항해와 관련된 기록이 圓仁의 여행기 入唐求法巡禮行記에 나온다. 그의 여행기 가운데 항해관련기록과 그가 중국여행중 동행하거나 만난 신라인들의 기록을 중심으로 그의 행적을 더듬어본다.
8세기이후 일본의 견당사선은 척당 135 – 150명의 인원이 승선하고 4척 총 550 - 600여명으로 구성되었다.
그중 반 정도가 선원이고 나머지는 외교사절단, 의사, 통역, 사수(경비원), 유학생, 유학승, 세공사등이다. 백제가 멸망하기 전에는 하까다를 출발하여 잇끼, 쓰시마를 경유 한반도 남해안, 서해안을 따라 북상하다가 고구려령을 피하여 황해를 횡단, 산동반도에 상륙했다. 백제가 없어진 뒤에는 한반도 항로를 택할 수 없어 일본에서 바로 동지나해를 횡단할 수 밖에 없었고 그 후로 견당사선의 난파사고가 급증한다.

Ennin의 견당사선은 4척으로 구성되었는데 837년 출발하다가 4척중 제3선이 파선되고 제2선은 책임외교관이 꾀병을 부려 도망하는 바람에 1선과 4선의 두척의 배가 838년 6월 13일 하까다에서 승선, 3일간 바람을 기다리다 18일 志賀島까지 가서 또 5일간 바람을 기다린다. 22일 五島列島의 宇久島에 닿고 다음 날 오후 6시 중국으로 출항한다. 두 배는 모닥불을 피워 신호를 하면서 첫 밤을 보내고 6월 24일 항행안전을 기원하는 제사를 올렸다. 밤 사이에 두 배는 서로 떨어져 보이지 않았다. 27일 선체의 목제를 잇는 철재이음매들이 선체요동을 견디지 못하고 모두 탈락된다. 28일 출항 5일 만에 대륙연안에 도달한듯 바닷물이 황톳빛이다. 사람을 육지에 보내 알아보니 장강하구의 양주 해능현이라 한다.

이때 단기유학승으로 당에 온 Ennin의 나이 45세였다. 7월 2일 상륙허가가 나오고 함께 일본을 출항했던 4선은 산동반도 북방의 발해에 표착했다고 들었다.
839년 2월 12일 Ennin일행의 천태산유학이 거부되고 일본에 귀환하라는 조칙이 내린다. 견당사가 일본에 돌아갈 신라선 9척을 사들이고 해로에 익숙한 신라인 60여명을 고용하여 각선에 나누었다.
이때부터 Ennin은 불법체류를 무릅쓰고 중국에 남을 궁리를 한다. Ennin과 두명의 승려가 신라인 통역 김정남과 짜고 출항하는 견당사선에서 도망하여 천태산으로 향하던 중 당의 경비병에게 체포되어 해주아문으로 압송된다. 그리하여 4월 10일 다른 견당사선 편으로 강제송환되어 일본으로 출항했는데 몇차례나 조난을 당하여 표류에 표류를 거듭하다 6월 23일 산동반도의 적산포에 표박한다.
그러다 7월 16일 Ennin을 비롯한 승려 3명을 불법체류자로 남기고 이 배는 출항한다. 이런 연유로 적산포에 있던 법화원에 이들이 찾아와 도움을 청하고 장보고의 법화원은 이들에게 최대의 편의를 제공한다.

Ennin 이 장보고를 직접 만난 적은 없다. 법화원을 담당하고 있던 신라사람들, 압아 장영, 욱정, 왕훈등의 도움으로 여행허가를 받아 순례에 나서기 전인 840 년 2월 17일 Ennin은 장보고 앞으로 편지를 쓴다. “求法의 여행이 끝나면 적산으로 돌아왔다가 청해진을 경유하여 일본에 돌아가고 싶읍니다. 돌아가는 것은 대강 841년 가을쯤이 되리라고 추정됩니다. 혹시 청해진 방면에 사람이나 배의 왕래가 있을 때 소승 일행이 묻어 갈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시면 고맙겠읍니다. 소승일행이 일본에 돌아갈 수 있으냐 없느냐는 오로지 각하의 손에 달려있읍니다.”

840년 4월 1일 여행허가를 받아 오대산으로 떠난다. 5월 1일 오대산 도착, 8월 22일 장안도착, 841년 1월 당 무종이 즉위하여 연호를 회창이라 함. 이 해 11월 청해진의 장보고가 신라 조정이 보낸 자객에게 암살된다. 842년 10월9일 회창폐불이 시작되어 승려의 환속, 재산몰수, 승려의 외출금지, 외국승려의 추방등의 정책이 추진된다. 845년 5월15일 추방령에 따라 장안출발, 6월 양주, 7월 초주, 해주를 거쳐 밀주, 8월 채주경유 등주도착, 그리고 적산포 법화원에 초최한 모습으로 돌아와 장영의 따뜻한 환대를 받는다.

그들은 다시 3년간 적산포 법화원의 신세를 지면서 일본에 갈 배를 기다린다. 드디어 847년 9월 2일 정오 신라사람 김진의 배를 얻어타고 적산포 출항하여 동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9월 4일 날이 밝을 무렵 동쪽에 산이 보이기 시작하다. 충청남도 해안에 도착한것이다. 그날 밤 10시경 전라남도 진도서쪽의 高移島(김대중 대통령 출생지 하의도)에 정박하다. 9월 6일 오전 6시 무주(광주)의 남방영역 黃茅島(丘草島라고도 함, 진도군 거차도)의 泥浦도착하여 정박하다. 9월 9일 전라남도 여수 근처 안도(雁島)에서 휴식하고 남동으로 나아가자 9월 10일 날이 샐 무렵 동쪽 저 멀리 대마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정오부터 일본의 산하가 보이고 오후 8시경 히쩬국 마츠우라 북부의 시카시마에 도착 정박하다.

이 렇게 圓仁의 일기는 838년부터 847년까지의 기간을 기록하고있다. 그간의 우여곡절은 헤아릴 길이 없고 감개무량 했을 법하지만 일기는 담담하게 특별한 감상도 없이 끝맺는다. 그는 장보고를 비롯한 신라인(백제때 진출했던 백제교민을 지칭)들의 도움으로 밀입국, 불법체류, 체포, 강제송환, 조난, 표류, 회창법난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 돌아갈 수 있었다. 그는 장보고에 대한 최상의 존경과 예의를 갖춰 그의 일기를 기록하고있다. 엔랴쿠지에서 적산명신(赤山明神)을 모시는 것은 장보고를 추모하는 圓仁 자각대사의 유언에 따라 이루어 진 것이다. 이 일기에 의거하여 9세기의 선박이 어떻게 대양을 횡단하였는지, 얼마나 많은 인원이 승선하였는지는 물론 당시 장보고의 활동무대와 신라교민에 관한 많은 내용을 알게 되었다. 이 기록의 도움으로 장보고는 비로소 역사의 인물이 될 수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Ennin은 그런 식으로 천년의 세월이 흐른 후 장보고에게 진 신세를 갚았다.

15. 역사의 미로 神功皇后

서기 239년 고이왕(8대239 – 286재위)이 백제 초고왕 계를 제압하고 백제왕이 된다. 그후 고이왕의 후손 책계왕(9대), 분서왕 (10대)으로 이어지다가 분서왕 사후 초고(스사노오)계열의 비류왕 (11대, 304 – 344 재위)이 즉위한다. 야마토 타케루 편에서 나온 게이코(景行) 천황(분서왕의 왕자273-358)이 분서왕 다음 왕이 되어야하나 일본에서 부여계의 숭신천황과 전쟁중이어서 비류왕이 등극한 것이다. 비류는 3명의 아들을 전쟁에 내 보냈는데 장남 이호키노 이리히꼬, 둘째 오호우스, 셋째 오우스(日本武尊)이다. 첫째와 두째아들이 그 전쟁에서 전사하였으며(318년) 셋째 오우스는 게이코 천황을 도와 일본전역을 통일하였다.
야마토 타케루는 게이코천황의 신하였지만 공적이 쌓여갈수록 권력의 무게중심이 그에게 쏠려간다. 서기 344년 비류왕 사후 게이코천황이 백제 12대 걸대왕으로 나갔다가 346년 퇴위되고 야마토 타케루가 13대 근초고왕이 된다.

일본은 그들의 후손들에게 맡겼는데 景行의 왕자 세이무(成務, 326 – 370)가 시가국(滋賀國), 근초고의 아들이며 근구수의 동생 주아이(仲哀, 328 – 379)가 오오사까를 맡았다.
근구수(應神天皇320 – 394)는 백제에서 부왕을 돕고 있었다. 그런데 355년 成務천황이 일본 유일의 왕이 되고자 오오사까를 공격하자 仲哀천황은 큐우슈우로 도망간다.
그 후362년 成務가 仲哀를 토벌코자 큐우슈우 원정을 나갈 때 26세의 미모의 후궁, 오끼나까 타라시 히메(氣長足姬, 336 – 390)가 成務와 동행했다. 이 여인은 활 솜씨가 뛰어 난 무사였으며 시가국 출신으로 어릴 때부터 成務의 다까아나호궁(高穴穗宮)에 왕래하던 사이로 짐작된다. 이 여인의 역사적인 모습이 神功皇后(Empress Jingu)이다. 현재奈良시에 이 두 사람의 묘, 神功皇后墓와 成務천황묘가 나란히 남아있다.

이제 우리는 역사기록의 가장 혼란스런 부분을 건드려야 된다.
일본기록에는 神功이 仲哀의 본처이며 應神의 어머니로 둔갑 되어있다. 應神의 여자가 그 어머니로 둔갑되어 있는 것이다. 仲哀사후 유복자 應神을 잉태한 채 신라를 정복하고 3년만에 돌아 와 應神을 낳아 그가 성인이 될 때까지 69년간 섭정했다고 되어있다.
뿐만 아니라 가야를 정복하여 백제에 주니 근초고왕이 감읍하여 영원히 조공을 바칠 것을 약속했다. 이 기록에 근거하여 일본의 임나 일본부설이 나온다. 또 삼국지의 히미코 기사(3세기)를 모두 神功皇后연대의 기록으로 만들어 놓아서 3세기인지 4세기인지 미로에 빠지고 만다.
서기 249년 신라 첨해이사금 3년 왜군이 침입하여 서불한 석우로(昔于老) 장군이 전사하였다. 이 일은 신무(神武)천황때 일인데 神功의 전적으로 기록되어있다. 서기 402년 왜의 인질이 된 신라 미사흔 기사와 418년 신라 인질 미사흔이 박제상의 도움으로 탈출한 사건까지 이 시대에 몽땅 올라있으니 연대를 맞춰보느라고 역사학자들의 애로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일본내의 사태가 심각하게 돌아가자 2세들 가운데 최연장자이며 집안의 해결사인 근구수가 개입하여 362년 전쟁을 종식시키고 應神천황이 되어 成務와 仲哀를 퇴역시킨다. 이때 포로로 잡혀있던 오끼나까 타라시히메의 처리문제가 오진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42세의 오진은 26세의 오끼나까 타라시히메를 본 순간 두 사람의 운명이 결정된다.
이 후로 그녀의 이름은 미야누시 야까하에히메(宮主矢河枝姬)가 되었고 應神에게 몸을 바쳤다고하여 神功으로 추증된것이다.
363년 12월 후꾸오까 우미하치만궁에서 우지노 와끼 이라쓰꼬를 출산하는 바람에 364년 오진의 신라침공시 그녀는 동행하지 못했다. 서기 369년 근초고왕은 칠지도를 제작하여 며느리와 손자에게 자기의 애정을 표현한다. 일본서기에 칠지도가 일본에 도착한 것은 372년으로 기록되었다. 왕비의 기록에 인색한 삼국사기까지 이례적으로 침류 즉위기사에 모후는 아이(阿彌) 부인이라고 기록을 남겼다.
이 여인은 침류 밑으로 야타노 와끼 이라쓰메 (373 – 426, 후일 닌토쿠 천황비), 메토리 (376 – 411, 닌토쿠 시절 반란사건으로 처형)를 낳았다. 應神천황이 살아있을 때 사망하였는데 죽은 다음에는 첫 남편, 成務천황옆에 묻혔다. 일본에서는 아직도 역사에 기록된데로 그녀가 仲哀의 본처였다고 우기고 있으나 무덤을 가지고 장난치는 후손은 없다.

왜냐하면 귀신을 속일 수는 없는 법이니까. 神功은 奈良 사끼노 다다나미 成務 능 옆에 나란히 잠 들어 있다.
야마토는 660 –663년간의 당-신라와의 전쟁에서 당 나라의 힘을 뼈 저리게 경험하고 냉엄한 국제관계속에서 살아남을 방법을 모색하게 된다. 유구한 역사를 가진 백제와 고구려가 하루 아침에 사라지는 모습을 본 天武천황(631 – 686)은 일본이라는 새로운 나라의 기틀을 마련하고자 황실을 위한 역사편찬에 착수한다. 왕자 Toneri (676 – 735)가 부왕의 명으로 고사기와 일본서기를 저작할 때 황실의 만세일계의 정통성을 확보하고 백제와의 역사및 혈통의 단절을 통하여 독립된 나라를 건설한다는 방침을 정했다. 이를 위하여 백제와 긴밀히 연결된 역사일수록 심하게 왜곡되었다. 4세기 후반 근초고 - 근구수 왕(Emperor Ojin) 부분과 백제 말의 의자왕 – Emperor Jomei – Empress Saimei – Emperor Temmu 부분이다. 시작과 끝에 해당하는 이 두 부분 가운데 神功부분은 시작에 불과하며 의자왕과 천무천황(부여풍장)부분은 더욱 교묘한 역사왜곡의 백미를 보인다.



16. 백제 멸망 후 수복전쟁

 < 백강전투>;이전투는 백제가 멸망한 3년 후 시작되었다!!!!!! 

백제 의자왕의 사비성과 웅진성이 함락되고 의자왕이 중국에 끌려간 것은 660년이지만 백제 부흥군이 활동한 것은 663년까지이다. 의자왕 다음에 그의 왕자 부여풍장이 풍장왕으로 663년까지 부흥전쟁을 이끌었으며 백강의 전투를 끝으로 백제는 완전히 저항력을 상실하였다. 백강의 전투란 당 – 신라의 연합군과 백제 – 왜의 연합군이 백제의 마지막 명운을 걸고 맞 붙은 국제적인 전쟁이었다.
젊은 시절 해동의 증자라는 칭호를 듣던 의자왕도 그의 말년엔 범용한 군주가 되어 사직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 했고 적국의 정보에 어두웠던것 같다. 당의 13만 대군과 신라의 5만 대군이 코 앞에 나타날 때까지 백제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의문이며 마지막에 죽기를 각오한 계백의 5천 결사대가 의자왕이 가진 것의 전부였다. 계백장군은 전쟁터에 가기 전 아내와 자식들을 자기의 손으로 죽인다. 적에게 사로잡혀 수모를 당하느니 나라와 함께 모두 죽어야 할 때가 왔다고 믿었다.
야마토의 Jomei (舒明, 593 - 660) 천황이 629년 즉위하여 640년 사망했다고 일본기록에 씌여있는데 백제 의자왕은 641년에 즉위한 것으로 되어있다. 舒明천황은 야마토의 히꼬히토(日子人)태자의 아들이고 의자왕은 아좌태자의 아들이다.
우리기록은 의자왕이 무왕의 왕자로 되어있으나 사실이 아니다. 위덕왕의 장자 아좌태자는 부왕보다 먼저 사망했으므로 역사에 별로 기록이 없다.
여기서 히꼬히토 태자와 아좌태자가 동일인인가 아닌가에 관심이 모아진다. 일본측은 역사적으로 백제와의 연결고리가 드러나지 않도록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여왔다.
황실에서 개인소장의 역사기록까지 죄다 압수하여 없애버렸다. 분서란 진시황의 독점물이 아니다.
660년 7월 9일 계백이 이끄는 5천의 백제군 결사대가 황산벌에서 5만의 신라군을 맞아 분전하였으나 백제군은 계백을 포함 전멸하였다. 당나라 소정방의 13만 대군이 서해를 건너 사비성에 이른지 3일만인 7월 13일 왕성이 함락되고 왕과 대신들이 당의 포로가 되어 당나라로 끌려갔다. 당나라에 끌려 간 의자왕은 얼마 안 되어 사망했고 낙양성에서 10리 떨어진 북망산에 묻혔다. 곧 이어 백제의 대신이었던 귀실 복신이 흩어진 군사들을 모아 군대를 조직하고 항전의지를 고취하니 도침, 흑치상지등이 합류하여 백제부흥군을 결성하고 계속된 전투에서 승리를 거듭해 한때 사비와 웅진을 제외한 거의 모든 땅을 회복하였다.

660년 10월 야마토의 사이메이(齊明)여왕(603 –661)은 조서를 발표하고 백제를 구원하기위해 거국적인 노력을 경주한다.

詔曰「乞師請救, 聞之古昔。 扶危繼絕, 著自恒典。 百濟國窮來歸我。 『以本邦喪亂, 靡依靡告。 枕戈嘗膽, 必存拯救。 』遠來表啟, 志有難奪。 可分命將軍, 百道俱前。 雲會雷動, 聚集沙彔, 翳其鯨鯢, 紓彼倒懸。 宜有司具為與之, 以禮發遣。 」云云。 送王子豐璋及妻子與其叔父忠勝等。 其正發遣之時, 見于七年。 或本云, 天皇立豐璋為王, 立塞上為輔, 而以禮發遣焉。

“옛적에도 백제가 우리에게 군사적지원을 요청한 경우가 있었다. 위급한 상황에 처했을 때 도와주고 단절된 왕조를 복원시켜 주는 것은 우리가 언제고 지켜야 할 당연한 도리이다. 백제가 이제 최악의 상황에 처해 우리의 지원에 자신의 운명을 맡기는 것이다. 이번 사태에 처한 우리의 결단은 확고하다. 나는 우리 장수들로 하여금 동시에 여러 갈래로 진군하도록 명 할 것이다.”

661년 1월 여왕이 몸소 노쇄한 몸을 이끌고 지원군을 진두지휘하기 위하여 큐우슈우를 향해 서쪽으로 항진한다. 이 해 쯔쿠지의 아사쿠라에 임시행궁을 설치하고 구원작전을 지휘하다가 7월 24일 여왕이 사망한다.

일본에 있던 의자왕의 왕자 부 여풍장(622 – 686)이 지원군을 이끌고 661년 백제부흥군과 합류하여 풍장왕이 되어 부흥군을 지휘한다. 한편 웅진도독 유인원은 본국 당나라에 추가병력을 요청한다. 고구려 정복전쟁에 바쁜 와중에도 당은 7천의 추가병력을 보내 2차 나당 연합군이 결성된다.

 백 제가 멸망한 3년 후인 서기 663년 8월, 2년 5개월동안 준비를 끝낸 야마토의 지원군 2만 7천이 800척의 배에 타고 백제부흥군의 거점 백강구에 모습을 드러냈다. 국제 해전사에서도 유명한 백강의 전투의 막이 오르고 있었다.

백제부흥군의 본거지는 전북 부안의 주류성, 해발 508미터의 능가산에 세워진 이 성은 지금은 우금산성이라 불린다. 백제부흥군은 이 주류성에서 사비성 탈환을 위한 마지막 결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당과 신라의 연합군이 주류성을 포위하고 있다. 야마토 지원군의 상륙을 저지하는 것이 나당 연합군의 목표였다. 아마토의 지원군은 목이 좁은 동진강 (역사에 백강, 백강구 또는 백촌강으로 기록됨)으로 들어와 강변에 상륙하여 성안의 부흥군과 합류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당의 7천 군사가 170척의 함선으로 동진강 입구를 차단했다. 야마토의 대군이 한꺼번에 동진강으로 들어올 수 없는 지형이었고 일본군은 이 곳이 조수간만의 차가 심하다는 지식이 없었다. 663년 8월 27일 부터 28일까지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어 야마토의 지원군은 처절한 패배에 직면한다. 400척의 함선이 파괴되고 10,000명의 전사자가 발생하였다.
전쟁이 치열한 가운데 부흥군의 부여풍장은 몸을 빼어 달아났는데 있는 곳을 알지 못하였다. 9월 7일 주류성이 함락되고 백제의 부흥시도는 좌절되었다.

 백제왕족과 대신가족들은 주유성을 빠져나와 나흘동안에 광주를 거쳐 보성군 득량면까지 200리 피난길을 강행군으로 돌파한다. 피난민들은 보성군 득량면에서 야마토 수송선을 타고 보성만을 탈출하여 큐우슈우에 상륙, 야마토의 백성이 된다.

 6.25때 흥남부두에서 미군 수송선을 타고 남으로 피난하던 것과 비슷한 모습이었으리라. 이들은 백제의 관직에 따라 일본에서 직책이 부여되고 정착지를 배정받았다. 백제의 지식층이 대거 일본에 유입된 것이다. 이 후에도 통일신라에서 배척받게 된 백제시절의 고위급 인사들이 대거 일본으로 건너간다.

일본은 이 전쟁에 왜 이렇게 필사적으로 개입하였을까? 일본영토에 위협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한반도에 국한될 전쟁에 일본이 왜 국력을 총 집결하면서 사이메이 천황이 여자의 몸으로 노구를 이끌고 큐우슈우까지 나와 전쟁을 독려하였을까?
역 사학자들이 지금도 궁금하게 생각하는 대목이다. 백제와 일본이 서로 다른 나라였다면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 글을 읽어 온 독자들은 백제와 일본이 다른 나라가 아니라 한 나라였다는 것을 알고있다. 의자왕은 629년 – 640년까지 야마토의 Jomei (舒明)천황이었고 641년 백제왕으로 부임했다. 그때 그는 이미 49세였고 660년 당에 끌려 갈 때 68세였다. Saimei 천황은 백제 무왕의 딸로 의자왕의 후비이며 부여풍장은 이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 난 아들이다. 백강전투에서 패배한 부여풍장은 역사기록에서 사라졌지만 일본으로 돌아가 권력투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을 낮추고 살았다. 형님이며 천황인 天智에게 권력에 대한 야심이 없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승려가 되어 입산까지 해야 했다. 671년 12월 3일 권력의 화신 天智천황이 사망하고 672년 부여풍장은 왕위에 있던 어린 조카를 무찌르고(임신의 난) 673년 2월27일 왕위에 오르니 그가 天武천황이다.

이때부터 처음으로 살아있는 현직의 왕이 천황으로 호칭된다.

681년 3월 17일, 덴무천황은 새로운 시대에 맞춰 야마토 왕국을 위한 역사를 편찬하라고 명한다. 백제와의 단절을 통하여 당나라와 신라의 침략을 예방하고 일본열도의 토착세력임을 내세워 국내의 지배권을 정당화하려는 천황가의 심모원려였다.
古事記는 덴무천황이 옛 상고역사에 대해 심오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뿌리를 부정하는 역사를 만들었다.

이후로 일본에서는 역사란 국익에 부합해야 되는 것으로 취급되었다. 명치유신이후 현재까지도 일본인은 역사란 국가가 편찬한 국사를 뜻한다. 국가의 필요에 따라 역사가 기술되므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여 역사기술이 변경될 수 있는 것이 일본이다.
중국에서 기원전 2세기 사마천의 사기이래 형성된 정사(正史)라는 개념은 일본에 적용되지 않는다. 따라서 중국적 스칼라 슆의 기준으로 보면 고사기나 일본서기는 역사가 아니라 옛날 이야기(物語 – 모노가타리)에 불과하다. 중학교 교과서 기술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본조야의 시각은 1300년전의 텐무의 시각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역사란 현재의 관심을 표현한다는 말은 만고불변의 진리이다.

모든 사가들이 백강을 금강으로 비정하였으나 백강과 주류성의 실재위치는 1997년 원광대학교 전영래 교수에 의해 비로소 확인되었다. 주류성은 현 전북 변산반도에 있었으며 백강은 동진강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요즘 자주 거론되는 세만금 간척지 남측 제방이 변산반도에서 시작되어 군산으로 이어진다. 따라서 동진강은 세만금 간척지 내부의 땅이 되었다.


17. 조선식 산성 (Korean-style fortress in Japan)

7세기말 백제 의자왕의 아들 天武天皇이 황실의 역사를 기록하면서 백제와 관련된 사실을 감추려고 애 쓰던 태도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일본의 학자들이 큐우슈우에 즐비한 조선식산성을 놓고 한반도와 관련이 있는 이 용어자체를 쓰지않으려고 고대산성이란 용어를 생각해냈다. 그들은 사실데로의 역사가 아니라, 좋은 역사만 후손에게 가르치는 것이 국가에 이롭다고 본다.
그들은 역사란 진실의 기록이 아니라 권력에 이로운 기록을 의미한다. 그런 맥락에서 교과서 문제, 독도문제, 과거사 사과문제, 위안부문제, 2차대전 당시 일본군의 인권유린행위에서 야쓰쿠니신사 참배문제까지 문제의 본질은 일본인의 이러한 역사인식에 있다. 일본은 진리보다 체면과 이해관계를 우선시키는 나라이다

백촌강전투이후 수 많은 백제유민을 수용하면서 일본은 당과 신라연합군의 동향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백촌강에서 참패한 663년부터 당의 군사가 한반도에서 물러가는 676년까지의 13년간 패전국 일본은 시종 전전긍긍하면서 한반도로부터의 침입에 대비하여 백제출신 장군들을 동원하여 백제식산성을 축조한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664년 미즈끼(水城), 665년 나가도노끼(長門城), 오호노쬬(大野城), 기이쬬(基肄城), 667년 타까야스노끼(高安城), 야시마노끼(屋島城), 가네다노끼(金田城)등의 산성을 쌓았다고 기록되어있으며 실재로 백강(백촌강) 패전후 축조된 산성이 12개소에 남아있다. 이들은 자연의 산을 이용하며 많은 돌을 쌓아서 돌담을 축조하는 등 그 형태나 구조가 한반도에서 볼 수 있는 산성과 닮아 있으며 백제에서 망명해 온 장군들의 지휘하에 만들어진 것이다. 일본인의 손으로 만들어지는 이러한 성은 훨신 후대 전국시대의 아즈찌성(安土城)이 처음이다.

일본어로 성(城)을 읽을 때 “-쬬” 또는 “-노끼”로 읽히는데 외국인은 틀리기 쉬우므로 주의가 필요하다. 읽는데 자신이 없으면 한자로 쓰는게 가장 안전하다. 일본역사학자들이 조선식산성대신 고대산성으로 표현코자 하였으나 코우고이시 (神籠石)라 불리는 고대산성이 출현하여 용어의 혼란이 생기자 하는 수 없이 고대산성 = 코우고이시 and 조선식산성으로 타협해서 쓰지않을 수 없게 되었다. 정확한 명칭은 백제식산성이라 해야하나 백제관련사실은 몸에 두드러기가 날듯 오리발을 내미는 판이라서 조선식산성으로 된 것이다.

서기 1898년 큐우슈우의 고우라산(高良山) 에서 이상한 돌담이 학계에 처음 보고된 이래 비슷한 돌담이 북 큐우슈우에서 세도나이 연안에 걸쳐 16개소나 알려졌다.
이들 돌담의 특징은 표고 200 – 400 미터의 산정에서 중턱에 걸쳐 수 킬로미터의 길이에 이르고 한 변이 70센티미터 정도로 깬 돌을 배열하고 골짜기를 통과시는 수문을 설치했다. 이 돌담이 옛부터 코우고 이시라고 불렸다 하여 무슨 뜻인지도 모른 채 지금도 코우고이시(神籠石)라 부른다. 이 코우고이시를 고대산성의 하나로 취급하게 되자 이와 다른 성격을 가진 백강전쟁 패전후 축조된 산성을 의미하는 조선식산성이란 용어도 쓰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일본 세이조(成城)대학교 후루다 다케히코(古田武彦) 교수는 일본천황가보다 먼저 큐우슈우에 큐우슈우 왕조가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는 역사학자이다. 그는 이 코우고이시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고있다.

코우고 이시는 수백 미터에서 천 미터 가까히 산 중턱에 벽돌 모양 가공된 거석으로 산 허리주위를 둘러 싼 배치를 보이고 있다. 그 일부에는 반드시 수문이 있다. 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산중에 몸을 피할 병사나 민중을 위해 만들어진 물의 시설이다. 이것은 외적 (고구려나 신라 또는 당 등) 의 침입에 대비하여 만들어진 군사적 요새의 잔해임을 부인하기 힘들다. 성립시기는 종래 6 – 7세기로 알려졌지만 최근의 연륜측정법에 의하면 5 – 6세기 성립가능성이 높다.
 이 군사요새지의 건설자는 누구일까? 당연히 이러한 방어물의 대상이 되는 치쿠지(현 후쿠오까현)와 히쩬(현 사가현)에 군림하였을 왕조일 수 밖에 없다. 결단코 긴끼지방(야마토)의 천황가는 아닐 것이다. 이러한 자명한 사실을 명치이후 관찬의 역사학은 외면하였고 교과서에서도 이러한 내용이 삭재되었다. 이 군사요새는 당연히 백촌강 전투이전 건설되었다.
 따 라서 7세기 전반의 스이코(推古, 536 – 628)천황. 쇼토쿠(聖德, 574 – 622)태자를 마치 일본열도의 군주중의 군주인 것처럼 선포해 온, 명치이래 금일에 이르는 일본의 학계와 교과서는 모두 결정적으로 부정직했던 것이다.

이 神籠石가 언제 – 왜 – 누가 만든 것인지 기록에 나타난 바는 없다.
백강전투 이후 조선식산성을 열심히 쌓았던 天智천황시절 국방관련 주요 기록은 다음과 같다.
664년 5월 백제진압군 당나라 장군 유인원이 파견한 곽무종이 일본에 왔다. 이 해 대마도, 잇끼도, 북 큐우슈우에 수비병을 배치하고 봉화대를 설치한다. 또 쯔쿠지(현 후쿠오카 다자이후)에 큰 제방을 쌓고 물을 저장한 미즈끼(水城)를 축조한다.
665년 8월 백제 달솔 달본춘초(達本春初)를 보내 長門國에 축성, 또 달솔 억례복류(憶禮福留)와 달솔 사비복부(四比福夫)를 쯔쿠지국에 보내 오호노쬬(大野城)과 키이쬬(基肄城)를 축조한다.
665년 9월 당의 사신 유덕고, 곽무종등 254명이 왔다가 12월 돌아가다. 이들은 일본에서 극진한 대접을 받는다.
667년 3월 조정대신과 백성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수도를 내륙의 오오미(近江, 현 시가현 오오즈시)로 옮긴다. 이로 인해 민심이반이 생기고 매일 밤 도처에 화재가 발생한다. 이 해 10월 고구려 남생이 당나라에 귀순한다.
667년 11월 9일 백제진장 유인원의 웅진도독부 웅산현령 법총등이 와서 쯔쿠지도독부에서 업무를 처리하고 13일 돌아가다. 이 달 야마토에 다까야스노끼(高安城), 사누끼(讚岐)에 야시마노끼(屋島城), 쓰시마(對馬)에 가네다노끼(金田城)을 쌓았다.

668년 9월 신라 사단급찬 김동암(金東巖)등 진조. 김유신에게 선물로 배 한척, 또 신라왕에게 배 한척을 선물. 668년 대당장군 영공(英公)이 고구려 멸망시킴.
670년 신라와 당이 전쟁상태 돌입하고 9월 쓰라타리를 신라에 사신으로 파견.
671년 12월 3일 오오미노미야(近江宮)에서 天智天皇 사망.

백 촌강 전투가 끝난 뒤 당의 사신들이 수시로 일본을 드나드는데 구체적인 역사기술은 없으나 당은 전승국으로서 일본의 전쟁책임문제로 여러가지 질문을 했을 것으로 보이나 큰 문제없이 지나갔다. 일본의 백제관련 역사왜곡 문제는 그런 상황에서 당에게 꼬투리를 잡히지 않으려고 시작되었으리라. 일본은 이때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한반도에서의 침입로에 해당하는 곳에 백제사람들의 힘을 빌려 성을 쌓았고 이것들을 후대에 조선식산성이라 불린 것이다.

18. 19대 允恭天皇 (393 - 453) 그 역사기록의 허상

19대 允恭천황은 지배계급을 개혁하는 정치를 펼쳤다. 그러나 그의 사후 즉위가 정 해져 있던 태자 키나시노 가루왕 (木梨之輕王, 414 – 454)과 부왕의 애첩 가루노 오호이라츠매(輕大郞女)와의 스캔들이 발각되어 세상인심이 동생인 아나호노미고토 ( 穴穗命, 416 – 456, 훗날의 20대 安康天皇) 에게 기울었다. 가루왕은 군세를 모아 신하의 집으로 도망쳤으나 체포되어 이요국으로 유배되었다. 가루노 오호이라츠메는 가루왕을 따라가 유배지에서 함께 자결하였다.
오아사즈 마와꾸꼬노 쓰쿠네(男淺津間若子宿禰, 允恭天皇)는 오호호도왕(백제 전지왕)의 여동생 오시사까노 오호나까쯔히메와 결혼하여 첫째 키나시노 가루왕, 두째 …, 세째…, 네째 아나호노 미고토(穴穗命, 416 – 456, 훗날의 安康天皇)를 낳았다. 다음으로 가루노 오호이라츠메, 다른 이름은 소토호시노 이라츠메(衣通郞女)와 혼인하여 둘째 오호하츠세(大長谷, 418 – 479, 훗날의 21대 雄略天皇) 등 총5남 4녀를 낳았다.

이상은 고사기의 중요기사이며 일본서기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추가되어있다. 있는 그대로의 역사기록이 후세에 어느 정도의 진실성을 가질 수 있는지 보기 위하여 가능한 한 그대로 옮긴다.
잉교(允恭)천황은 18대 反正天皇(Emperor Hanzei, 380 – 432)의 동생으로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 천황은 어려서부터 소극적인 성격이었고 어른이 된 후에도 큰 병을 앓아서 건강하지 못하였다. 反正천황이 갑자기 사망하자 호족들이 하도 졸라서 마지 못하여 즉위하였다.
3년의 춘정월 사자를 신라에 보내 의사를 구 하였다. 그해 8월 의사가 찾아와 병이 완쾌되었다.
14년 9월 오사시(男狹磯)라는 사내가 아까시의 해저에서 커다란 진주를 밴 전복을 건져올리고 죽었다.
고사기 16대 仁德천황(337 – 419, 大雀 오호사자끼)편에 이런 기록이 있다. 천황이 어느 때 히메시마에 갔을 때 기러기가 알을 낳았다. 기러기는 철새로 일본에서 알을 낳지 않는 새다. 또 어느 때 도노끼강 서편에 하나의 거대한 나무가 있었다. 그 나무의 그림자가 아침엔 아와지(淡路)를 넘고 저녁이면 高安山( 奈良의 生駒山 옆의 산)을 넘었다.
일본서기 仁德 12년 고구려가 철재 방패와 과녁을 보내고, 고구려의 활솜씨를 자랑하며 무력시위를 하였다.
일본서기 應神 28년 고구려가 사자를 보내 무례한 상표문을 올렸으므로 우지노 와끼 이라츠코 태자가 격노했다.
옛 기록은 위와 같이 일부는 그 자체가 허위이며 일부는 상징적으로 기록되어 있어서 허위는 밝히고 상징은 해석되어야 역사적인 의미를 갖게된다. 위의 내용을 쉽게 풀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된다.
4 세기말 만주에서 시작된 광개토대왕의 백제-가야.왜의 정벌은 한반도에 국한된 전쟁이 아니었다. 전선은 일본열도로 확대되었고, 대마도와 큐우슈우 일부가 고구려에게 복속되어 임나일본부를 설치하여 이를 관할하게 하였다. 이렇게 임나일본부는 고구려가 만든 행정기구였다.
406년 광개토대왕의 왕자 고진(高珍, 393 – 453)이 큐우슈우에 부임하여 후쿠오카현 구루메시(久留米市) 고우라(高良)산에 고구려의 본거지를 설치하였다. 지금도 구루메시 高良大社에서 모시는 神, 다마타레노 미코토(玉垂命)가 바로 이 사람이다.
407년 왕자 고진은 仁德천황 12년 고구려의 철재방패와 과녁을 보내 고구려의 신무기를 과시하고 항복을 권유한다.
413년 광개토대왕이 사망하자 왕자 고진은 고구려에 나갔다가 416년 큐우슈우에 돌아와 야마토 조정에 선전포고의 상표문을 올린다.(일본서기 應神 28년, 仁德 58년). 418년 오호하까세 왕자( 훗날의 21대 雄略천황)가 태어났다.
419년 시코쿠에서 야마토군과 고구려군의 결전에서 오사시(男狹磯) 사망. 오사시는 이름이 오호사자키(大雀)인 仁德천황을 뜻하며 진주를 밴 전복 즉 왕의 옥새를 빼았겼다. 그러나 이 전쟁후 고구려군은 웬일인지 야마토로 진공하지 않고 큐우슈우로 물러간다. 고구려군의 고진 역시 중상을 입었던 것 같다. 고진은 고우라산에 돌아가 장기간 병상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 允恭천황기에 그가 병약했다는 기록은 이 때의 일을 기록한 것이다. 천신만고 끝에 신라에서 모셔온 의원의 힘으로 병을 치료하고 431년 야마토의 본거지 오오사카와 나라지역을 정복하여 19대 允恭천황이 되었다. 이 일을 기록한 것이 기러기가 알을 낳았다는 仁德천황기의 기사이다. 기러기는 한자로 기러기 안(雁)을 쓴다. 광개토대왕의 이름은 고안(高安)으로 安대신 雁으로 광개토대왕을 상징하니 기러기의 알이란 광개토대왕의 아들 고진왕자를 뜻하게 된다.
允恭천황의 이름, 마와꾸꼬(間若子) 역시 間 – 雁 – 安의 숨은 변화를 거치며 기러기의 어린새끼라는 의미를 감추고있다. 백제출신 사가들의 교묘한 의도가 흥미롭다. 표면적으로는 감추되 눈 밝은 후인들이 알아차릴 수 있게 기록한 것이다.
奈良의 高安山과 이꼬마산(生駒山)이 이 때 고구려와 관련되어 붙여진 이름이다. 일본역사에서는 황실의 만세일계를 주장하므로 允恭천황이 고구려의 피를 가진 정복자로 기록할 수 없다. 그는 16대 인덕천황의 아들이며 18대 반정천황의 동생으로 기록되어 있고 일본역사 학자들은 별로 의심하지않고 받아들인다.

436년 지배계급을 재편성하는 개혁을 추진하고 438년 왜진왕(倭珍王)으로 송나라에 사신을 보낸 기록이 왜 5왕 기록으로 남아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그의 젊고 섹시한 후궁 이야기를 해야된다. 지극히 인간적인 실수로 고진의 25년에 걸쳐 이룩한 사업이 한 순간에 물거품이 된다. 고진은 백제 아신왕의 딸 오시사까노 오호나까츠 히메를 황후로 기나시노 가루태자(木梨輕, 414 – 454)를 낳았다.
允恭천황은 아신왕의 딸 3명을 아내로 삼았는데 막내의 이름이 소토호시노 이라츠메(衣通郎姬)였다. 속 살이 비치는 옷을 입었다는 의미이니 늙은 允恭천황의 넋을 빼고도 남았다. 그런데 允恭천황 뿐만 아니라 가루태자의 넋까지 빼어버린 것이 화근이었다. 결국 조카와 이모간의 불장난은 왕국을 걷잡을 수 없이 불 사르고 만다. 불륜이 발각되자 선수를 쳐서, 태자는 453년 부왕을 독살한다. 가루왕자의 나이 39세 때 일이다. 곧이어 신라에서 대규모의 문상행렬이 80척의 선단으로 장엄하게 도착했다. 신라 눌지왕의 왕자 김무(金武, 416 – 456)가 행렬을 지휘하고 있었다. 이들은 대마도에서부터 곡을 하였고 오오사카에 도착해서는 상복으로 갈아 입었다.
후쿠오까시 사와라구(早良區)에 가나다케(金武)라는 지명이 있다. 430년경 김무왕자가 신라에서 의원을 데려와 고진의 병을 고치고 431년 야마토 공격시 선봉을 맡았던 공로로 김무는 고진의 양아들로 대접을 받았고 후쿠오카에 위치한 安羅羅國의 왕이 되어 가나다케성에서 다스렸다.
그 런데 신라에서 온 조문단이 예사 조문단이 아니었다. 신라는 이미 450년부터 고구려와 동맹관계에서 적대관계로 대외정책이 변하고 있었다. 그들은 무기를 숨기고 들어와 가루왕자를 죽이고 왕국을 빼앗아 김무가 允恭천황 다음의 천황이 되니 20대 安康천황이다. 일본역사는 예외없이 允恭의 아들이라고 기록했다. 이때 신라인들은 철재화살을 사용했고 가루왕자측은 동(銅)화살을 사용했다고 일본기록은 전한다.

그러나 더욱 황당한 일이 3년후에 발생한다. 황실에 근거가 부족한 천황은 권력의 배경을 가진 황후를 필요로 한다. 그 때문이었는지 16대 인덕천황의 왕자였던 오호쿠사가(大草香)를 살해하고 그의 아내 나까시히메 ( 17대 履中천황의 딸)를 빼앗아 황후로 들였다. 나까시히메는 어린 아들을 데리고 와서 궁에서 함께 살았는데 이 일곱살 난 어린아들 마요와노 기미(眉輪王) 가 사정을 알고나서 456년 친부의 원수를 갚고자 잠자던 천황을 살해한다. 이런 연유로 역사는 다시 21대 雄略천황(418 – 479, 允恭의 아들)의 시대를 맞게 된다.
고사기와 일본서기를 읽으면서 가장 큰 애로는 혈연관계가 조작되어 있다는 점이다. 시대의 조작보다 더욱 파악하기 어려운 것이 바로 이 혈연의 조작이다. 지금 다루어지고 있는 시대의 혈연관계는 다음과 같다.
야 마토의 건국자이며 백제 근구수왕인 15대 應神(Ojin)천황 – 16대 仁德(Nintoku, 應神의 아들) – 17대 履中(Richu, 仁德의 아들) – 18대 反正(Hanzei, 백제 침류왕 아들이며 履中천황과는 사촌간) – 19대 允恭(Ingyo, 광개토대왕 아들 고진) – 20대 安康(Anko, 신라 눌지왕 아들 김무) – 21대 雄略(Yuryaku, 잉교천황의 아들이며 광대토대왕의 손자) – 22대 淸寧(Seinei, 백제 비유왕의 아들이며 개로왕의 친동생, 곤지왕).
위와 같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일본열도의 지배권을 백제왕실이 장악하여 현대까지 이어져 온 것이다. 淸寧천황이후 일본은 백제와 한 나라였다.

19. 제 21대 雄略天皇 (418 - 479)

456년 安康천황이 재위 3년만에 졸지에 살해 당한 변란에 처하여 允恭천황의 38세의 아들 오호하츠세 와카다케 (大泊瀨若武)가 황위를 계승할 수 있는 친 형 2명을 살해하고 황위에 올랐다. 그해 17대 履中천황의 왕자였으나 고구려의 允恭천황에게 밀려나 오우미노 쿠니(近江國)에 숨어살던 이치노베노 오시하(市邊押磐) 황자도 살해한다. 이치노베노 오시하황자의 아들 2명은 이때 자취를 감추었고 딸이 백제 무령왕의 어머니 이히노 토요히메(飯豊皇女 )이다.
원년 춘3월 쿠사카노 하타비히메( 일명 타치바나 히메)를 황후로 맞았으나 자식의 기록은 없다. 다음으로 쓰브라노 오호오미의 딸 가라히메(韓媛)를 맞아 시라카노 타케히코쿠니 오시와카 야마토네꼬 (白髮武廣國押稚日本根子)천황 (22대 淸寧천황, 백제 곤지왕자의 족보가 이렇게 왜곡됨)과 와카타라시 히메를 낳았다.
2년 가을 7월 백제가 이께츠히메(池津媛)를 천황에게 보냈는데 딴 남자와 눈이 맞아 천황이 격노했다. 그들 남녀을 불에 태워 죽였다. 백제신찬에 의하면 백제 개로왕 원년 모니부인의 딸 적계여랑을 예쁘게 꾸며 일본에 보냈다고 한다.
4년 춘2월 천황은 가츠라기(葛城)산에서 사냥을 하다가 골짜기에서 키가 큰 사람과 마주쳤다. 그의 외관은 천황과 꼭 같았다. 천황이 누구냐고 묻자 키가 큰 사람이 “나는 아라히도가미(現人神)다. 먼저 그쪽의 이름을 대라” 천황이 대답하기를 “저는 와카타케(幼武, 본명이 高武이므로 저는 풋내기 무입니다라고 표현)라 합니다.” 라고 대답하자 키가 큰 사람이 “나는 히도코토누시가미 (一言主神)다.”라고 대답했다.
같은 해 가을 8월 사냥을 나가 활을 쏘려하는데 등애가 천황의 팔을 물었다. 그때 잠자리(아끼즈- 잠자리의 옛말)가 와서 등애를 잡아 물고 가 버렸다.
5년 여름4월 백제의 개로왕이 적계여랑이 불에 타 죽은 것을 전해 들었다. 그래서 동생 고니키시(軍君 – 곤지)를 야마토에 보냈다. 그때 곤지가 개로왕의 임신한 후궁을 하사받아 함께 일본에 가던 중 출산한 아이가 무령왕이며 이 후궁이 이히노 토요히메(飯豊皇女)이다. 7월 고니키시(軍君)는 수도에 도착하였는데 5명의 아들을 데려왔다고 한다.
백제왕실은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출현으로 잃어버린 일본을 다시 찾으려고 개로왕자를 일본에 보낸다. 그러나 允恭천황 시절 야마토로 진입할 수 없어 439년 백제 비유왕(412 – 465)의 아들 개로왕자는 反正천황( 380 – 438)이 피신해 있던 쿄오토오 북쪽해안 미야즈(宮津)에 들어와 해안지방부터 백제의 수복작전이 개시된다. 개로왕자는 후쿠이(福井)현을 근거로 북부해안의 모인(毛人) 55국을 정복하고 큐우슈우 서부로 진출하여 중이(衆夷) 66국을 정벌하여 고구려편에서 백제세력으로 판세를 뒤집어간다. 한편 바다건너 한반도의 가야지역 95개국에서 고구려세력을 정리한다. 그는 이때 왜제왕 (倭濟王)이라 칭하며 443년, 451년 남송에 사신을 보낸 기록이 남아있다.
개로왕자가 후쿠이현에 있을때 후루히메(振比賣, 434 – 485)를 만나 繼體天皇(450 – 531)을 낳았다. (정식 결혼을 하지않고 태어난 서자였지만 왕통을 이을 후계자가 없는 상황에서 이 사람은 역사적으로 쓸모가 많은 사람이었다). 그후 개로왕자는 455년 백제 21대 개로왕으로 즉위한다. 457년 雄略천황은 일본에 시집온 개로왕의 딸을 불 태워 죽인다. 458년 개로왕은 격노하여 동생 곤지를 데리고 미야즈, 쿄오토오를 거쳐 나라의 가츠라기(葛城)산까지 진격하여 雄略을 무찌르고 무장 해제시킨다. 고사기에 의하면 雄略은 무기와 관인들의 입고있던 옷까지 벗어 바쳤다고 되어있다. 이때 개로왕은 스스로 히도코토누시가미(一言主神 – 한번 한 말은 행한다는 뜻)라 밝힌다.
이때 등애로 묘사된 雄略을 제압한 것은 곤지였으므로 곤지가 잠자리(아끼즈)로 표현되었다. 잠자리는 아끼즈(蜻蛉)로 읽으나 蜻蛉를 한자 그대로 읽으면 淸寧과 같이 발음되므로 곤지가 淸寧천황이 되었다.
雄略천황은 456년 즉위했다가 458년 백제 개로왕과 곤지에 의해 추방 연금상태로 미에(三重)현에 은거하여 479년까지 살았다. 따라서 고사기나 일본서기의 雄略 4년이후의 기록은 雄略의 기록이 될 수 없다. 남송 왜의 5왕 기록에 478년 왜왕 무(武)가 사지절도독 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육국제군사 안동태장군 왜왕을 제수 받은 기록을 보고 일본사가들은 雄略천황의 기록이라고 우기고 있으니 한심할 따름이다. 일본사가들이 바보들이 아닌 바에야 모르고 하는 소리는 아닐 것이다. 우기지 않고 백제 무령왕이라고 사실데로 인정하면 일본역사라고 주장해 온 모든 것이 가공의 것이었다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일본은 그것이 두려운 것이다. 이 밖에 雄略천황기에 기록할 게 너무 없어서 다른 천황의 기록으로 채워 넣었다. 오또메(童女)의 슬프디 슬픈 못 이룬 사랑 이야기가 몇 건 여기 붙어 있는데 곧 역사에 등장할 왜무왕 – 시마왕 – 백제 무령왕의 이야기라고 한다. 일본황실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백제왕자와 고구려공주의 애틋한 이야기는 23대 顯宗천황과 25대 武烈천황의 치사한 패륜의 기록으로 변한다. 고구려공주란 允恭천황의 후손을 뜻한다.
일본의 주장데로 雄略이 왜 5왕 기록을 남기는 479년까지 황위에 23년간이나 있었다면 적어도 15명이상의 자식과 5명 정도의 배우자가 역사기록에 나타나야 된다. 그러나 고사기에 그의 자손은 1남 1녀로 기록되어 있으며 1남이라는 것마져 곤지 – 후일의 淸寧천황을 의미하는 허위족보이다. 백제왕실의 혈통이 431년 反正천황때 단절되어 允恭 – 安康 – 雄略의 3대이후 458년 다시 백제왕실로 회복되고(3년간 공석) 461년 淸寧천황으로 연결된다.
458년 雄略을 처치한 개로왕은 이 해 雄略에게 살해 당한 이치노베노 오시하(市邊忍磐)황자의 딸, 이히노 토요히메 (飯豊皇女, 개로왕과 8촌형제간)를 수습하여 백제로 데려가 후비로 맞는다.
461 년 곤지가 야마토를 직접 다스리기 위하여 일본에 들어온다. 이 때 임신한 飯豊皇女를 개로왕이 곤지에게 하사한다. 일본에 오던 길에 가카라 시마(各羅島)에서 시마왕(후일의 백제 무령왕)이 태어난다. 곤지는 飯豊皇女를 끝까지 개로왕의 황후로 대접한 것 같다. 야마토에 들어올 때 개로왕의 다른 아들 호시카와(星川, 개로왕이 부하의 부인을 빼앗아 낳은 아들) 황자가 곤지의 입성을 거부하였으나 곤지는 이들을 불 태워 죽이고 궁궐을 차지하여 22대 淸寧천황 – 왜흥왕(倭興王)이 된다. 462년 왜흥왕은 남송에서 안동장군 왜국왕을 제수받는다. 이 해 유폐되어있던 雄略 (미모로오까의 신이라고 나옴) 을 불러내 高武라는 이름을 高雷로 바꾼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462년 신라가 왜의 공격을 받는다.
이후의 역사를 아는 후세의 사람들에게는 475년의 한성백제의 멸망이라는 사건이 일어나기까지 13년 전의 일이다. 백제의 개로왕과 야마토의 淸寧천황에게 60년전, 자기들의 증조 할아버지대(代)에 고구려 광개토대왕에게 유린된 백제의 국력을 회복하는 것이 가장 시급한 현안이었다. 그러나 일본쪽은 대부분 고구려세력이 제거되었으나 백제쪽은 고구려의 우위가 요지부동이었다. 광개토대왕의 아들 장수왕은 부왕 못지않은 영명한 군주로서 한치의 빈틈도 보이지 않고 아버지가 확보한 땅을 장악하고 있었다. 괄괄한 성격이었던 개로왕은 그러한 답답한 국면을 타개하기 위해 고구려와 적대적인 북위를 이용코자 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시도는 고구려 장수왕을 격노하게 만들어 비극을 부르게 된다.
雄略 20년 겨울(이미 밝힌데로 雄略4년이후는 그는 황위에 있지않았으나 편의상 일본서기의 기록을 따름. 실제로 이 시점은 淸寧천황의 시대임) 고구려왕이 대군을 끌고와 백제를 멸망시켰다. 백제기에 “제 21대 개로왕 재위시 서기 475년 겨울 고구려의 대군이 몰려와 밤과 낮 7일에 걸쳐 왕성을 공격하였다. 왕성이 함락되고 본거를 잃었다. 국왕과 황후, 황자등은 적에게 살해되었다.”라 한다.
삼 국사기에도 백제가 475년 고구려에게 멸망되어 국왕이 전사했다. 제 22대 문주왕(재위 475 – 477)이 왕실을 이어 수도를 한성에서 웅진으로 옮기고 체제를 정비하다 2년후 가신에게 암살되었다. 제 23대 삼근왕 (재위 477 – 479)도 2년후 15세로 죽었다. 삼국사기는 477년 곤지가 일본에서 나와 문주왕 (그들은 형제간)을 만나고 내신좌평을 제의받았으나 거절하고 백제에서 죽었다고 기록했다. 일본에서 나올때 곤지는 시마왕을 왜무왕으로 즉위시켜 천황자리를 물러주었다. 왜무왕은 477년, 478년 남송에 사신을 보내 사지절도독 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6국제군사 안동태장군 왜왕을 제수받는다. 왜무왕은 고사기, 일본서기 기록에서 배제되었다.
이때 곤지는 백제에 나와 시마왕에게 백제왕위를 물러주는 것이 도리에 맞는 일이라고 문주왕을 설득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전쟁중에 개로왕의 왕자들이 모두 살해되었으므로 시마왕이 이제는 개로왕의 최장자였다. 문주는 이를 거절하고 오히려 곤지를 자기 밑에 와서 내신좌평을 하라고 제의했던 것이다. 석달 후 곤지의 모습은 백제에서 사라졌다.
웅략 23년 4월(479년) 백제 23대 삼근왕이 죽었다. 천황은 일본에 체류중인 곤지의 다섯 아들가운데 어려서부터 총명하였던 말다왕(末多王)을 불러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백제왕을 명하였다. 츠꾸지국의 병사 500인으로 호위하여 본국에 보내니 24대 동성왕이다.
곤지가 일본에 올때 5명의 아들을 데려왔다는 기록은 왜 삽입되었는지 알 수 없다. 왜냐하면 461년 곤지가 18세이므로 아들을 다섯이나 둘 나이가 아니었다. 또 고사기와 일본서기는 淸寧천황이 아들이 없었다고 하였다. 개로 – 문주 – 곤지 삼형제의 후손을 살펴보면 461년 임신한 개로의 후비를 일본에 보냈던 것은 결과적으로 백제의 왕통을 잇는 절묘한 선택이었다. 개로의 후손은 475년 전쟁때 대부분 처형되고 문주의 후손도 삼근왕의 비극으로 없어지고 곤지는 자식이 없었다. 구사의 일생이라 할까, 무령왕의 어머니가 임신중 일본으로 떠나는 바람에 개로왕의 왕통을 이을 수 있는 무령왕이 살아남아 백제 무령왕 이후의 일본천황 모두가 그의 후손이다. 그러면 위에 나온 24대 동성왕이 된 말다왕이란 누구일까.


20. 백제 24대 동성왕 (447 - 501)과 왜무왕의 상표문

서기 475년 한성백제의 멸망에 이어 문주왕과 삼근왕의 잇단 살해사건을 수습하고 백제왕통을 회복할 결단을 내릴 위치에 있던 사람은 일본의 淸寧천황 (곤지왕)뿐이었다. 그러나 계속된 사고로 왕위를 승계할 인력이 별로 남아있지 않았다. 한성백제 멸망시 개로왕의 왕자들이 희생되고 문주왕 2대가 살해되었다. 곤지 자신에게는 후손이 없다. 479년 백제 23대 삼근왕이 15세로 죽은 후 백제왕이 될 수 있는 후보는 개로의 아들로 18세의 사마왕( 당시의 왜무왕), 13세의 사아왕 (安閑), 12세의 사비왕(宣化)이 인재풀의 전부였다.
고사기에 의하면 淸寧천황은 젊어서 서거하였으나 자식이 없었다. 차기 천황이 정해질 때까지 이치노베노 오시하 왕의 황녀 (고사기에 여동생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나이를 따져보면 딸로 봐야 됨) 이히노토요 히메(飯豊皇女, 곤지와 일본에 오던 길에 무령왕을 출산 )가 궁(宮)에 있을 때 하리마국에서 이치노베노 오시하 왕의 두 아들이 발견되어 츠노사시노 미야(角刺宮) 에 데려와 누나인 飯豊皇女와 함께 살게 되었다.

461년 야마토에 들어와 츠노사시노 미야(角刺宮)를 차지하고 시마왕을 키우고 있던 飯豊皇女는 황태부인으로 봉해져 황실의 어른으로 대접받았다. 그녀가 일본에 들어오려고 했던 것은 456년 잃어버린 동생 둘을 찾고자 함이었다. 456년 雄略이 17대 履中천황의 피신해 있던 아들 이치노베노 오시하(市邊押磐, 414 – 456)황자를 공격해 죽였을 때 두 아들이 도망쳐 행적이 묘연하였다. 역사기록을 보면 淸寧천황시절 이 두 형제가 발견되어 누나인 반풍황녀와 함께 츠노사시노 미야에서 살았다. 동생이 훗날의 23대 顯宗천황(451 – 488)이며 형이 24대 仁賢천황(447 – 501)이 되는데 이들은 仁德천황의 후손으로, 아신왕의 후손인 곤지와 8촌간이었다. 모두 應神천황의 4세손들이다. 이렇게 따져가면 곤지가 자기 이외로 활용할 수 있는 왕손은 다섯명이 된다.
일본서기 웅략 23년 4월(479년) 백제 23대 삼근왕이 죽었다. 천황은 일본에 체류중인 곤지의 다섯 아들 가운데 어려서부터 총명하였던 말다왕(末多王)을 불러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백제왕을 명 하였다. 츠쿠지국의 병사 500인으로 호위하여 본국에 보내니 24대 동성왕이다. 이때 그의 나이 32세였다.
위에 기록된 천황은 곤지자신일 수 밖에 없다. 여기 등장하는 말다왕(末多 또는 牟都王)이 위에서 발견된 두 왕자중의 형이며 곤지와는 같은 항렬의 3살 아래이므로 머리를 쓰다듬어줄 정도는 아니다.
동성왕은 백제왕으로서 괄목할 만한 업적을 남긴다. 중국대륙에 백제의 영토가 있었다는 중국의 사서 자치통감과 남제서의 기사가 모두 동성왕 치세의 기록이다.
삼 국사기 백제본기에 “ 동성왕 10년(488년) 위(魏)가 군사를 보내어 우리나라를 침범했으나 아군에게 패배하였다.”라고 기록되어있다. 백제가 중국 남북조시대 화북의 패자였던 북위의 침략을 물리친 이 전쟁을 삼국사기는 이렇게 짧게 처리하고있다. 그러나 이 기사는 자치통감 488년 기사 “ 북위가 병력을 보내어 백제를 공격하였으나 백제에게 패배했다. 백제는 진나라 때부터 요서(遼西), 진평(晉平) 2개군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기록을 옮긴 것이다. 자치통감은 이렇게 요서군과 진평군이 백제의 영역이었다는 놀라운 사실을 전하고 있다. 이것은 그 동안 한반도 서남부에 국한되어 있었다고 알려진 백제가 중원의 서부지역까지 세력을 넓히고 있었다는 의미가 된다.
위의 기사에 더하여 남제서 제 58권 490년 기사에 “ 이때 위(魏)의 오랑케가 다시 기병 수십만을 발하여 백제경내에 들어왔다. 백제 국왕 모대가 장수 사법명, 찬수류, 해례곤, 목간나를 파견했는데 이들이 백제군을 이끌고 적을 격퇴시켰다”라고 나와있다. 그러나 우리 역사학계에서는 중국의 사서에 기록된 북위와 백제간의 전쟁을 역사적사실로 인정하지않는 학자가 많다.
 북위가 한반도 서해안의 백제를 침략했다는 것이 지정학적으로 설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백제가 대륙에도 진출해 있었다면 전혀 무리없는 기록이 된다. 사실 역사란 모두 밝혀져 있는 것 같지만 아직도 추측에 불과한 부분이 많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한사군과 관련된 낙랑 대방의 위치이다. 어쩌면 시대에 따라, 다른 곳을 같은 명칭으로 불러왔을 것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의하면 위구태가 부여무리를 이끌고 와서 한 나라 요동태수 공손강이 서기 204년경 설치한 대방고지에 구태백제를 건국하였다고 한다. 이 대방고지(帶方故地)가 어디인지 확인해 줄 권위는 아무도 없다. 황해도, 요동반도, 산동반도등이 학자에 따라 거론된다. 산동반도가 대방고지였다면 3세기초부터 중국 동해안은 백제계의 영토가 된다. 왜냐하면 대방고지의 구태계 백제가 한반도 서해안의 온조계 백제를 제압하고 고이왕의 치세를 열었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서기 479년 백제 동성왕을 즉위시킨 뒤 일본의 곤지와 왜무왕의 행방이 역사에서 사라진다. 이 두 사람은 일본에도 없었고 백제에도 없었던 것은 분명하다. 곤지는 484년 사망한 것으로 되어있고 왜무왕이 백제 25대 무령왕이 되는 501년까지 어디서 무었을 하고 있었는지 기록이 없다. 479년이후 일본은 飯豊皇女가 다스렸는데 483년 사망하여 角刺宮에 들어 와 살던 친동생이 황위에 올라 顯宗天皇(451 – 488)이 되었다.
이 사람은 친형 동성왕과 달리 도덕적으로 황폐한 인물이었고, 자기를 구해준 백제 왕실의 배신자가 되었다. 치세 3년 2월 가락국 세력을 끌어들여 백제에 반기를 든다. 그 해 기노 오이와노 쓰쿠네 (紀生磐宿禰)가 임나에서 고구려와 밀통하고 삼한의 왕이 되고자 하여 백제의 적막이해를 대마도에서 살해하였다. 또 시토로모로 노 사시(帶山城)를 쌓아 동(東)으로 통하는 길목을 막고 식료를 보급할 항구를 장악하여 군량미의 보급을 끊었다. 이 시기에 백제 군사들은 산동반도에서 북위와 전쟁중이었다. 백제의 동성왕이 대로하여 고이해와 막고해등을 보내 帶山城을 공격하였다. 기노 오이와노 쓰쿠네는 임나에서 야마토로 도주하였고 백제군은 대마도의 사루(佐魯), 나까타고우하이등 300인을 죽였다.

488년 백제 동성왕은 일본에 건너가 반역자 顯宗천황을 죽이고 사태를 수습한다. 이때부터 일본측에서는 동성왕을 일본의 24대 仁賢天皇 (447 – 501)으로 기록한다. 仁賢천황은 顯宗과 황후 나니하노 오노(難波小野)왕을 제거하고 헤구리노 마토리 (平群眞鳥)를 재상으로 하니 헤구리노 마토리의 아들 헤구리노 시비 (平群志毘)를 살해하고 484년 顯宗의 집권에 협조했던 오호토모노 가네무라 (大伴金村)는 숨어지내면서 후일을 기다린다. 헤구리(平群) 가문은 479년부터 곤지와 왜무왕의 명령을 받은 대신으로 飯豊皇女와 難波小野王을 보호하고 있었다.
오호토모가 기다리던 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仁賢천황 말년 병이 들어 행동이 부자유스런 틈에 오호토모가 군사를 동원하여 헤구리노 마토리를 죽이고 권력을 장악한 뒤 顯宗의 아들 武烈 (489 – 506)을 25대 천황으로 세우고 백제에 반기를 들어 친 고구려 정책을 편다. 백제가 일본을 잃은 것이나 다름 없다.

한편 삼국사기에 의하면 동성왕 23년 (501년) 12월 왕이 위사좌평 백가에 의해 살해되었다. 따라서 삼국사기는 479년부터 501년까지 동성왕 치세로 기록했으나 위에서 본 바와 같이 488년이후 동성왕은 일본에서 仁賢천황으로 있었다. 그런데 중국의 사서 책부원구 (冊府元龜)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 남제 건원 2년 (480)백제왕 모도(牟都, 동성왕의 이름)가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치니 사지절 도독 백제제군사 진동대장군을 수여하였다. 또 영명 8년 (490) 백제왕 모대(牟大)가 사신을 보내 표를 올렸다. 남제는 모대를 책명하여 돌아가신 조부 모도의 작호를 잇도록 하고 백제왕으로 삼고 행도독 백제제군사 진동대장군 백제왕으로 삼았다.” 백제왕위는 489년쯤 동성왕의 손자 모대가 승계하였고 501년 백가에게 살해된 것이다. 이 해 백가의 난은 왜무왕이 들어와 수습하고 백제 25대 무령왕으로 즉위하였다. 이 때 그의 나이 40세였다.
그런데 동성왕이 즉위하기 2년전 왜무왕이 서기 477년 과 478년 남송에 사신을 보낸 표문이 송서 왜국전에 실려 있다. 한국과 일본의 역사학자들이 송서의 왜 5왕 기사는 잘 알고 있는데 실재 인물과 표문의 역사적 배경을 모르고 그 문장자체의 해석에 메달리고 있어서 보기에 민망하다. 시대적으로 백제 개로왕의 한성백제가 역사속으로 소멸되고 백제왕궁에 있던 왕가가 몰살 당한 시점이다. 앞에서 거론한 바와 같이 백제의 친족들이 경영하고 있던 남송에 집안 사람으로서 집안 일이면서 국가의 일이기도 한 475년도의 한성백제의 일을 논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에 있던 개로왕의 최장자가 스스로 사지절 도독 왜 백제 신라 임라 가라 진한 모한 7국 제군사 안동대장군 왜국왕을 칭한다. 그러면서 돌아가신 아버지가 갑옷을 입은 채로 산천을 누비며 천자를 위하여 변두리의 땅을 개척하였다고 주장한다. 동으로 모인 55국을 정벌하고, 서쪽의 중이 66국을 복속시켰으며, 바다건너 북쪽의 95국을 평정하였다. 그러나 송은 백제는 빼고 나머지 6국 제군사는 허락한다.
신의 작고하신 아버님 제(濟)께서는 고구려 원수가 가로막아서 천자에게 자주 문안드리지 못함을 분통해 하셨으며……
대의를 위하여 원수를 혼 내 주려 하였으나 졸지에 아버지와 형제를 잃고…….
병기를 준비하고 군사를 길러 아버지와 형제들의 뜻을 이루기를 기원하고 있나이다.
<서기 477년 기사> 興、死す。弟、武立つ。(왜흥왕이 죽고 동생 무가 즉위하다)自ら、使持節、都督倭・百済・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七国諸軍事、安東大将軍、倭国王と称する。
<서기 478년 기사> 順帝の昇明二年、使いを遣わして上表して曰、「封国は偏遠にして、藩を外に作す。昔自り祖禰、みずから甲冑を擐き(つらぬき)、山川を跋渉して、寧所に遑がない
東の毛人五十五国を征し、西の衆夷六十六国を服し、渡って海北の九十五国を平す。王道 融泰にして、土を廊きて(ひらきて)、畿を遐にする。累葉朝宗して、歳に愆らず。」
○ 臣、下愚だと雖も、悉く(かたじけなく)先緒を胤ぎ(つぎ)、統べる所を駆率して、天極に帰崇す。道は百済を遥て(へて)、船舫(せんぼう)を装治す。而 るに、句麗は、無道にして、図りて見呑を欲する。辺隷を掠抄し、虔劉して已まず。毎に(つねに)稽滞を致し、以て良風を失う。路(みち)に進むと曰うと雖 も、或いは通じ、或いはしからず。
臣の亡考済、実に寇讎の天路を壅塞することを 忿る(いかる)。控弦百万、義声に感激して、方に(まさに)大挙しようと欲するのに、奄に(にわかに)父兄を失い、垂成の功をして、一簣を獲ず。居りて (おりて)諒闇に在って、兵甲を動かさず。是を以て偃息して、未だに捷たず。今に至りて、甲を練り、兵を治めて、父兄の志を申すと欲する。
○ 義士・虎賁(こほん)、文武、功を效し、白刃を前に交われども、また顧みる所なし。若し、帝の徳の覆載を以て、この強敵を摧き(くだき)、克く(よく)方 難を靖めようとすれば、前の功に替わること無し。竊に(ひそかに)自ら開府儀同三司を仮し、其の余りは咸各(みなおのおの)仮授して、以て忠節を勧めた」
詔して武を使持節、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国諸軍事・安東大将軍、倭王に除す。
479년부터 501년까지 왜무왕이 일본을 비운 사이 일본내 백제세력의 결속력이 떨어져 오호토모가 내세운 武烈천황이 백제에 대항하고 있었다. 아버지나 다름 없었던 곤지와 어머니 飯豊皇女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이 때 백제 무령왕이 백제와 일본을 통 털어 백제왕실의 진로를 결정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고 이후의 일본천황 모두가 이 사람의 후손이다.
무령왕이 가진 인적자산은 동생 사아왕(安閑), 사비왕( 宣化)( 安閑, 宣化는 후일의 천황명) 그리고 두 아들 성명(聖明)과 흠명(欽明)이 있었다. 무령왕은 이 네명의 힘으로 큐우슈우를 먼저 장악한 뒤 나중 야마토를 제압하는 작전으로 나간다.
이런 연유로 구주백제가 성립되어 큐우슈우 왕조설의 기원이 된다.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큐우슈우에는 백제 직할의 구주백제가 야마토의 상위에 존재하였다. 백제멸망이후 일본역사 정리과정에서 이 九州百濟의 존재는 없었던 일로 가닥을 잡은 것이다. 재차 지적하거니와 일본이 역사를 다루는 방식은 이와 같이 있었던 일이 없어지기도 하고 없었던 일이 있었던 일이 되기도 한다.

21. 九州百濟의 성립

서기 501년 무령왕이 왕위에 올랐다. 봄 정월에 좌평 백가가 가림성을 근거로 반란을 일으켰다. 왕은 군사를 거느리고 우두성에 이르러 한솔 해명에게 명령하여 토벌하게 하였다. 백가가 나와 항복하자 왕은 그의 목을 베어 백강에 던져버렸다. 겨울 11월에 달솔 우영을 보내 군사 5천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수곡성을 습격하였다. 이상이 삼국사기 백제본기 무령왕 즉위년의 기사이다.
479년부터 501년까지 무령왕이 행적이 묘연하다는 이야기는 전회에 이미 나왔다. 일본서기 웅략조 23년 (479년) 동성왕을 즉위시킨 기사에 이어 이해 백제의 공물이 보통 때보다 많았다. 츠쿠지국의 아치노 오미(安致臣)와 우마까히노 오미 (馬飼臣)등에게 선단을 인솔하여 고구려를 공격시켰다라는 기사가 나오는데 이 일이 무령왕의 추후의 행적과 관계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 때 무령왕과 곤지는 함경도 지방을 공략하였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으나 이를 증명할 기록이 없다.
백제왕위에 오른 뒤 무령왕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은 생각은 부왕 개로왕의 원수를 어떻게 갚을까하는 것과 야마토를 어떻게 확보할까하는 문제였을 것이다. 어쩌면 지난 20여년 그는 이미 개로왕의 원수를 갚는 일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무령왕은 일본을 회복하는데 九州를 먼저 확보한 뒤 야마토를 백제세력으로 흡수하기로 방침을 정하고 504년부터 동생인 사아왕 (斯我王, 466 – 535 훗날의 安閑天皇)에게 백제군사를 보내 九州정벌을 시작한다. 야마토의 武烈천황은 이때 15세의 어린나이였고 오호토모 가네무라가 권력을 쥐고 있었다. 백제의 공격이 시작되자 야마토의 움직임도 빨라진다. 오호토모 가네무라는 백제의 압력에 밀려 506년 고구려와 가까운 武烈천황( 489 – 506)을 살해하고 繼體천황(450 – 531)을 새로 옹립한다. 계체천황은 개로왕자가 모인국 정벌시 만난 후루히메(振媛)와의 사이에 태어나 후루히메의 친정인 후쿠이현에서 버림받은 채로 자랐다. 백제왕족의 서자로 잊어진 존재였으나 應神천황의 5대손임은 확실하며 개로왕의 적자인 무령왕보다 11살이 많은 형이었다. 백제는 이를 묵인한 것 같다. 찬성은 아니지만 적의는 훨신 무디어지고 계체천황을 앞 세운 오호토모 가네무라가 계속 권력을 쥐고 있었다.
일본서기에 당시의 숨 막히는 백제의 압력이 기록된다. 繼體천황 치세 3년 춘2월 임나(九州) 일본 구석구석에 살고있는 백제인민의 도망해 왔거나 호적이 없어진 자의 3대4대까지 거슬러 올라가 조사하여 백제의 호적을 정리하였다. 6년 4월 호즈미노 오미 오시야마를 백제에 보내 치쿠지의 말 40필을 바쳤다. 동 12월(512년) 백제가 사자를 보내 조공을 바치면서 문서로 요구하였다. 임나국의 오꼬시타리(上哆唎), 아로시타리(下哆唎), 사다(娑陀), 무로(牟婁) 의 4현을 백제에 내 놓으라는 요구이며 이는 이곳이 이미 백제의 수중에 들어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본서기의 능청스러운 기록이 계속된다. 마가리노 오호에 (勾大兄) 황자가 나중에 이러한 사실을 알고 백제에 항의하였다. 그러나 여기 기록된 마가리노 오호에황자는 후일의 安閑천황이며 무령왕의 동생으로 이 시점 구주공격의 선봉에 서 있었다.
513년 백제는 대마도의 북부 기문(己汶)을 내 놓으라고 요구하였다. 이 해 야마토는 백제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여 구주의 공격자 사아왕을 繼體천황의 황태자로 선언한다. 514년 繼體천황은 기문과 타사(滯沙)를 백제에게 내 주었다.
523년 5월 백제의 무령왕이 사망하고 524년 1월 태자 明이 즉위하여 聖明王이 되었다. 무령왕의 힘에 억눌려있던 야마토는 527년 6월 오미의 게나노 오미(毛野臣)가 6만의 군사를 이끌고 남가라(김해)와 녹기탄(거제도)을 탈환하여 다시 임나와 합병하려 하였다. 일본역사는 이때 이와이 (磐井)의 반란을 기록하고 있다. 치쿠지의 이와이(磐井, 475 – 528)는 肥前, 肥後, 豊前, 豊後등과 연합하여 백제편에 서서 게나노 오미의 작전을 방해하였다. 繼體천황이 모노노베노 아라까히에게 토벌군을 보내면서 “나까도(현 야마구치 현)에서 동쪽은 내가 다스릴테니 치쿠지국의 서쪽은 임자가 가져도 좋아. 상벌도 임자 마음데로 해. 일일히 보고하지 않아도 돼”라고 하였다.
528년 11월 11일 치쿠지의 미이노고오리(三井群)에서 처절한 전투끝에 이와이가 참수되고 반란은 진압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어지는 기록을 보면 백제의 요구가 계속된다.
529년 백제는 가라의 多沙津 (현 부산 다대포)을 내 놓으라고 요구한다. 김해와 거제도, 다사진은 당시 게나노 오미에게 점령되어 있었다.
531년 3월 백제의 사비왕( 훗날의 宣化천황)이 백제군을 이끌고 九州의 구마모토에 상륙하여 아스카라(朝倉)에 진주하여 구주백제 왕이 되고 532년 가라(김해)는 신라에 합병된다.
일본서기는 계체천황 마지막 부분을 묘하게 끝맺고 있다. “ 어떤 책에 의하면 천황은 치세 28년 붕어했다고 한다. 그것을 치세 25년붕어로 한 것은 백제본기에 의해 기사를 썼기 때문이다. 그 기록에 <치세 25년 3월, 진군하여 안라에 이르러 걸둔성(乞屯城)을 쌓았다. 이 달 고구려는 그 왕 안(安)을 시해하였다. 또 들리기를 일본천황및 황태자, 황자 모두 죽었다>고 한다. 이와 맞춰보면 신해년은 치세 25년에 해당한다. 후세에 따져보는 자는 알게 되리라.
백제의 무력 시위 앞에서 야마토의 오호토모 가네무라는 계체천황, 황태자, 황자를 모두 죽이고 구주백제군을 야마토에 무혈입성시킨다. 이때부터 구주백제의 사아왕이 야마토의 27대 安閑천황 (466 – 535)으로 기록된다. 당시 그의 나이 65세였다. 535년 安閑천황이 야마토에서 사망하자 그의 동생이며 구주백제왕인 사비왕이 야마토로 가서 28대 宣化천황 (467 – 539)으로 즉위하고 구주백제왕으로 무령왕의 두째왕자 사귀왕(斯貴王)이 부임한다. 이 사람이 29대 欽明天皇(510 – 571) 이며 백제 聖明王( - 554)의 친 동생이다. 이리하여 일본은 백제계가 다시 장악하였으나 역사는 백제본국에서 다음의 변혁을 예고하고 있었다.



22. 백제성왕(523 - 554재위)의 전사와 역사의 급반전

백제 성왕(성명왕)치세 일본서기 기록은 성왕이 백제의 동맹국들에게 가야를 수복하기 위한 전쟁에 동참하도록 독려하는 내용으로 가득하다. 서기 539 – 571년간 재위에 있던 일본 29대 킨메이(欽明) 천황 ( 백제 성명왕의 동생)기록의 80%는 백제 성명왕의 언사로 장식되어있다.
삼국사기의 백제본기와 신라본기 기록은 다음과 같다.
백제본기 성왕 원년 (523) 고구려 군사가 패수에 이르렀다. 좌장 지충에게 명하여 보병과 기병 1만명을 거느리고 나가 싸우게 하여 이를 물리쳤다.
백제본기 성왕 7년 (529년) 겨울 10월 고구려 왕 흥안(안장왕)이 몸소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와서 북쪽 변경의 혈성을 함락하였다. 좌평 연모에게 명하여 보병과 기병 3만명을 거느리고 오곡의 벌판에서 막아 싸웠으나 이기지 못 하였는데 죽은 자가 2천여명이었다
백제본기 성왕 16년 (538년) 서울을 사비(泗沘, 다른 이름은 所夫里였다)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라 하였다.
당시 상황을 이해하는데 백제기록보다 상대편인 신라의 기록이 더 참고적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법흥왕 15년 (서기 528년) 불교를 처음으로 시행하였다. 18년 (531) 상대등의 관직을 처음 설치하였다. 19년 (532) 금관국의 왕 김구해 (金仇亥)가 왕비와 세 아들 奴宗, 武德, 武力을 데리고 나라 창고에 있던 보물을 가지고 와서 항복하였다.
신라본기 진흥왕 원년 (서기 540년) 진흥왕이 일곱살로 왕위에 올랐다. 왕이 어려 황태후가 섭정하였다. 2년 (541) 이사부를 병부령으로 삼고, 백제에서 사신을 보내와 화친을 청하였으므로 허락하였다.
9년 (548) 봄 2월 고구려가 예인과 함께 백제 독산성(獨山城)을 공격하였으므로 백제에서 구원을 청하였다.
11년(550) 봄 정월 백제가 고구려 도살성을 빼았았다.. 3월 고구려가 백제의 금현성을 함락시켰다. 왕은 두 나라의 군사가 피로한 틈을 타, 이찬 이사부에게 명하여 군사를 내어 이를 쳐 두 성을 빼앗아 증축하고 군사 1천을 머물러 지키게 하였다.
12년 (551) 거칠부 등에게 명하여 고구려에 침입케 하여 10개 군을 빼았았다.
14년 (553) 가을 7월 백제의 동북부 변두리를 빼았아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아찬 무력(武力)을 軍主로 삼았다. 겨울 10월 왕이 백제왕의 딸을 맞아들여 소비로 삼았다.
15년(554) 가을 7월 명활성을 수리하여 쌓았다. 백제왕 명농이 가야와 함께 관산성을 공격해왔다. 군주 각간 우덕과 이찬 탐지등이 맞서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였다. 新州軍主 김무력이 州의 군사 를 이끌고 나아가 교전함에 비장 삼년산군의 고간 도도가 급히쳐서 백제왕을 죽였다. 이에 모든 군사가 승세를 타고 크게 이겨 좌평 4명과 군사 2만 9천 6백명을 목 베었고 한 마리의 말도 돌아간 것이 없었다.
554년 백제본기 성왕 32년 (554) 가을 7월 왕은 신라를 습격하고자 하여 친히 보병과 기병 50명을 거느리고 밤에 구천(狗川)에 이르렀다. 신라의 복병이 일어나서 더불어 싸웠으나 난병에게 해침을 당하여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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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제동맹을 믿고 550년 백제 성왕은 신라, 가야의 연합군을 편성하여 고구려 공격에 나서 고구려가 장악하고 있던 한성을 수복하고 고구려의 도살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하지만 고구려의 반격으로 오히려 금현성을 빼았겼는데, 신라장군 이사부가 고구려와 백제군사가 피로해진 틈을 타 도살성과 금현성을 모두 차지하고 군사 1 천을 머물러 지키게하였다.
이후 백제, 신라, 가야 연합군은 고구려를 공격하여 신라는 10개의 군을 얻고, 백제도 6개의 군을 회복하였다. 신라는 이때 비로소 죽령이북의 땅을 확보하여 한강유역에 접근할 수 있는 교두보를 마련하였다.
고구려는 이때 신라를 물밑에서 접촉하여 나제동맹을 무력화시키고 신라와 동맹을 성립시킨다. 고구려의 반격이 다시 시작되고 신라는 마음을 바꿔 고구려와 손 잡고 백제를 공격한다. 신라의 배반으로 백제는 당혹하여 우왕좌왕하는 사이 신라군은 한강이북의 갓 수복한 백제땅을 차지하고 한성까지 장악해버렸다. 성왕은 궁지에 몰려 자신의 애지중지하는 딸을 신라 진흥왕에게 시집보내는 굴욕을 감수하며 가까스로 신라의 맹공을 누그러뜨린다.


진흥왕 14년(553) 가을 7월에 신라는 백제의 동북변경을 확보하고 그곳을 新州로 삼았다. 그 신주의 軍主로 임명된 자가 바로 김무력이다. 김무력 휘하의 부대는 새롭게 얻은 한성백제의 옛땅인 신주뿐 아니라 서기 550년 고구려와 백제로부터 빼앗은 도살성과 금현성에도 주둔하고 있었다. 당시 도살성(현 충북 증평)과 금현성(현 충북 진천)은 고구려, 백제, 신라 3국의 교차점이자 군사상의 요충지였다. 이곳의 軍主 김무력은 532년 신라에 투항한 가락국 마지막 왕 김구해의 3남이며 뒷 날 태어날 김유신의 조부이다. 이런 연고로 김유신은 충북 진천에서 태어났다.
신라의 배신에 이를 갈던 성왕은 이후 일본과 가야를 질타하여 연합군을 편성하고 554년 5월 왜의 수군이 도착하자 신라 정벌을 시작하여 신라의 함산성을 함락시키고 파죽지세로 밀고들어 갔으나 태자 여창이 이끄는 백제 주력군은 굴산성 전투에서 신라의 방어선을 뚫지 못하고 퇴각하여 환산성 (고리성)으로 들어갔다. 한편 성왕이 이끄는 백제연합군도 충북 영동군의 핏골전투에서 패하여 성치산성으로 지휘본부를 옮기게 되었다.
반격에 나선 신라군은 현재의 옥천분지에 주력군을 배치하고 금산지역의 백제군과 대치하였다. 성치산성에서 환산성까지는 약 20킬로메터, 말을 타면 두 시간정도 걸리는 거리이다. 그런데 그 중간에 삼성산성 (관산성, 충북 옥천)이 위치하고 이곳은 신라군이 차지하고 있었는데 백제성왕의 움직임을 이들은 포착하고 있었다.
554년 가을 7월 왕은 직접 보병과 기병 50명만 데리고 해가 서산에 넘어가는데도 불구하고 태자 여창의 군영, 환산성으로 출발했다. 백제는 신라의 매복을 전혀 예상치 못했지만 신라는 백제진영의 이동을 훤히 파악하고 태자 여창의 군대와 성왕의 교통로를 관산성에서 차단하여 양군을 고립시키고자 하였다. 관산성에서 내려다 보이는 실개천이 있는데 현재 서화천이라 불린다. 역사기록은 이곳을 구천(狗川) 이라 하였고 이는 우리 말 개천을 한자표기로 개 狗로 바꾼것이다. 성왕은 현지 방언인 구진베루(벼랑)밑에 흐르는 개천가에서 매복하고 있던 신라복병에 사로잡혀 참수되었다.
이후 관산성의 신라군은 환산성과 성치산성의 백제군을 각개격파한다. 성왕이 참수된 사실이 알려지자 성치산성의 백제군이 필사적으로 관산성을 공격하였으나 신라군의 방어선을 돌파하지 못하였다. 신라조정은 이때 도살성과 금현성의 김무력에게 관산성으로 이동하여 백제군을 섬멸할 것을 명령한다. 김무력의 기병대는 진천 – 청주 – 신탄진 – 대전 – 백골산성으로 진격하여 백제태자 여창군의 배후로 달려든다. 백골산에서 신라군을 방어하던 백제군은 현재의 대청호를 등지고 신라군과 대치하고 있었는데 김무력의 기병이 무방비 상태인 배후를 공격하여 일방적인 공격을 퍼붙는다. 학살과 다름없는 신라기병의 맹공으로 백제의 여창군은 좌평 4명과 사졸 2만 9천6백여명을 잃었다. 여창은 포위당하자 빠져 나오려 하였으나 나올 수 없었다. 사졸들은 놀라 어찌 할 줄 몰랐다. 활을 잘 쏘는 츠쿠지국조(國造)가 나아가 활을 당겨 신라의 말 탄 군졸중 가장 용감하고 씩씩한 사람을 쏘아 떨어뜨렸다. 그 사이에 여창은 겨우 도망쳤다.
전쟁기록과 설명사진은 고성혁의 역사추적에서 옮긴 것이다. 기록을 확인하기 위하여 실재 현지를 답사하고 사진까지 곁들인 선배 연구가들의 도움으로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은 순전히 고성혁 씨의 공로이다. 감사를 드린다.
554년 7월 신라와 백제의 대회전은 역사에 관산성 전투라고 기록되지만 실재는 백골산성에서 대회전이 치러졌고 신라는 이때부터 한반도의 주도권을 확보해 가는 반면 백제는 회복 불가능한 상처를 입는다. 이 전쟁에 참전하여 백제를 도왔던 경북 고령의 대가야가 562년 신라에 병합되어 소멸된다. 그리하여 몇 백년간 백제와 동맹관계를 유지해 왔던 가야제국은 영원히 역사에서 사라진다.
진흥왕은 계속 영토를 확장하여 창녕, 북한산, 황초령, 마운령에 순수관경비와 단양에 적성비를 세워 역사에 발자취를 남긴다. 창녕비는 561년, 함남 함흥군에 있는 황초령비와 이원군에 있는 마운령비는 568년에 각기 건립된 것을 알수 있으나 북한산비는 훼손이 심하여 건립연대의 해독이 불가하다. 북한산 문수봉 아랫쪽의 비봉에 세워져있던 진흥왕 순수비는 조선 순조 16년 (1816년) 추사 김정희가 발견하고 판독하여 세상에 알려졌으며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
백제는 가야를 합병하지 않고 몇 백년간 동맹국으로 대우해 왔는데 6세기의 신라는 상대국을 정복하면 바로 신라의 땅으로 편입하여 직접 통치하는 방식을 취했다. 중앙집권적인 왕권의 확립은 삼국 가운데 가장 늦었으나, 고구려나 백제보다 150년후에야 불교를 수용하면서 신라는 늦은만큼 확실하게 왕권을 강화해 나간다. 진흥왕은 재위 37년만인 576년 43세로 죽었으나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수 있는 토대는 바로 그의 치세하에 마련된 것이다. 이 시절의 신라 군부를 움직인 이사부와 거칠부 두 사람은 시대가 낳은 탁월한 전략가로서 삼국중 가장 후진적이던 나라가 100년후 삼국통일의 주역을 맡을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하였다.
이 당시 임나(가야)는 10개의 나라를 합쳐 그렇게 불렀는데 그 가운데 일곱 나라가 한반도에 있었고 3 나라는 일본에 있었다. 한반도의 7국중 고령의 대가야 (多羅國) 가 마지막으로 562년 신라에게 멸망하자 일본의 欽明천황( 539 – 571재위)이 남긴 피맺인 절규가 일본서기 흠명치세 23년 (562년) 여름 6월기사로 실려있다.
신라는 서쪽 구석에 치우친 보잘것 없고 야비한 나라이다. 하늘을 거역하는 무도을 저지르고 우리의 은의를 배반하고 우리의 직할지를 쳐부셨다. 우리 인민을 해치고 군현에 해를 입혔다. 옛적에 신령스럽고 총명하였던 오끼나까 타라시히메노 미코토 (氣長足姬尊, 神功황후, Empress Jingu) 는 천하를 주행하며 힘 써 인민을 보살폈다. 신라가 곤란한 일을 당하자 불쌍히 여겨 신라왕을 죽이지 않고 살려 주었으며, 요해지의 땅을 주어 신라가 번영하도록 배려해 주었다. 오끼나까 타라시히메노 미코토가 신라를 언제 섭섭하게 한 적이 있었느냐. 우리국민도 신라에 원한 같은 것은 갖고 있지도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라는 장창과 강궁을 들고 임나(가야)를 공격하여 거대한 이빨과 날카로운 손톱으로 인민을 학살하였다. 간을 찢어 발기고, 사지를 도려냈으며, 뼈를 부시고 , 시신을 불태우면서 즐거워하고 있다. 임나사람을, 관리에서 백성에 이르기까지 칼 도마에 올려놓고 마음데로 난도질을 하고있다. 왕의 땅에 살면서 왕의 신하로서 그 땅의 곡식을 먹고 그 땅의 물을 마시고 산 사람으로서 이러한 말을 듣고 애통하지 않을 사람이 있겠느냐. 태자, 대신들은 서로 도와서, 대지위에 피눈물을 흘릴 망정 원한은 드러나지 않게 가슴 속에 감추고 가야 할 사람들이다. 대신의 지위에 있으면 그 몸을 수고하여 봉사하는 자일진데, 선왕의 은혜를 입고, 후세에 선왕의 뜻을 이어 가려면 단장의 아픔을 이겨낼 생각으로 반역자를 응징하여, 천지의 아픔을 달래고, 군부(君父)의 원수를 갚을 수 없다면 죽어서도 자식으로서 도리를 못 한 한(恨)을 남길 것이다.
흠명치세 32년 (571년) 여름 4월 15일 천황이 병으로 누웠다. 황태자가 타지에 있어 부재중이므로 역마를 달려 대전으로 불러들여 그 손을 잡고 천황이 말했다.
나는 병이 무거워 다시 회복할 수 없을 것 같다. 뒤를 부탁한다. 너는 신라를 쳐서 임나를 재건하라. 그리하여 전과 같이 임나와 사이좋은 사이로 회복될 수 있다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 이 달 천황은 62세로 붕어하였다. 위와 같은 언사를 보고 欽明천황이 가야의 후손일꺼라고 추측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가야를 빌어 백제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欽明천황의 유지를 받들어 30대 敏達천황(Emperor Bidatsu, 538 – 585)이 등극하며 그는 일본서기 기록과 달리 欽明의 아들이 아니라 백제 성명왕의 둘째 아들로 위덕왕의 동생이다. 이 때 왕위 계승권은 철저하게 장자에게 있었으며 흠명천황은 성명왕의 동생이므로 그 아들 중 천황이 된 사람은 32대 崇峻천황 (530 –592) 한 사람 뿐이다. 나머지 백제 27대위덕왕, 일본 30대 敏達천황, 일본 31대 用明천황 (540 – 599, 백제 28대 혜왕), 백제 29대 법왕 ( ? – 600)은 모두 백제 성명왕의 아들이며 일본 33대 推古천황 ( Empress Suiko, 536 – 628) 도 성명왕의 딸이다.

 23.왜왕 多利思北孤의 遣隋使 중국사서에 나타나는데


정작 일본사서에는 보이지 않는 일본역사는 고의적으로 누락시킨 것이다. 왜냐하면 일본인이 자기역사를 기록할 때 그보다 앞 서 기록된 중국의 기록을 참고로 하기 때문에 모르고 넘어갈 수는 없다. 앞에서 이미 거론된 3세기의 히미코(卑彌呼)여왕의 중국교류 기사가 묘하게 가공되어 히미코의 이름이 일본역사에서 제외되었다. 서기 266년부터 147년간 일본역사 기록이 중국사서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 후 413년부터 502년까지 왜의 5왕 (The Five Kings of Wa) 기사가 나타난다. 이 또한 일본기록에 없는 부분이다. 일본은 지금도 이 기사를 확인되지 않은 역사로 간주한다. 일본의 역사를 기록할 때 자국의 방침에 맞지않는 부분은 고의적으로 제외한 것이다. 지금까지 보아온데로 그것이 일본황실이 역사를 다루는 방식이므로 이러한 점을 감안하여 그들의 역사를 보면 된다.
백제 27대 위덕왕( 554 – 598재위)시절 중국에서는 400여년간 계속된 대륙의 이합집산을 끝내고 581년 수(隋) 양제가 중국을 통일하였다. 중국내의 혼란이 계속된 400여년간 중국주변의 소국들은 작은 규모의 분쟁을 하면서 살았으나 강력한 정권이 대륙을 차지한 이 시대는 분열에서 통일로 패러다임이 바뀌는 시절이었다.
이 시절 隋書 동이 왜국전에 서기 600년과 607년 왜국왕이 隋에 사신을 보냈다고 기록되어있다. 왕의 姓은 아매(阿每), 이름은 다리시북고(多利思北孤), 號를 아배계미(阿輩鷄彌)라 한다. 왕비의 이름도 계미(鷄彌). 이 나라 사람들은 거리를 재는 리(里)의 개념을 모르고 왕래하는데 걸리는 날짜로 거리를 말한다. 국경은 동서로 5개월, 남북으로 3개월 걸리며 각각 바다에 이르게 된다. 야마타이(邪摩堆)가 수도이며 魏志에서 말한 야마타이이다. 아소산이 있고 이유없이 하늘에 닿을듯 불길이 솟구쳐 제사를 지낸다. 관리의 등급을 12개로 나누어 관리하는 관위 12계의 제도를 운영하고있다.
607년 多利思北孤는 다시 수 나라에 보낸 국서에서 “ 해 뜨는 곳의 천자가 해 지는 곳의 천자에게 (日出處天子致書日沒處天子無恙)”라고 기록하여 수양제를 격노하게 한다. 일본인들은 그 시절 이만한 기개를 가진 천황이 있었다고, 일본이 수나라와 맞 먹는 강력한 나라였다고 좋아하면서도 이 천황의 아이덴티티를 밝히지 못한다. 일본역사를 기록할 때 부끄러운 역사든 자랑스런 역사든 있는 그데로 기록하고자 했다면 중국사서에 있는 역사가 일본역사에 기록되었을 것이나 불행하게도 일본은 자랑스런 역사만을 고집하였다. 앞 장에서 논의된 구주백제와 관련된 역사는 일본황실에서 없었던 일로 결정하여 일본서기와 고사기를 기록한 것이다. 그 때 없어진 역사를 살려 낼 기개와 양심을 그들의 후손들에게 기대할 수 있을까?
608년 수양제는 배세청(裵世淸)을 사자로 왜국에 보냈다. 배세청은 백제의 진도, 남해도를 거쳐 쓰시마, 잇끼도를 지나 九州의 筑紫, 다시 동쪽으로 진왕국 기타 10여국을 거쳐 해안에 도착했다고 한다. 筑紫에서 동쪽은 모두 왜라고 한다. 이때 배세청이 왜의 수도 야마다이를 방문하고 왜왕 多利思北孤를 만나고 돌아갔다. 그가 방문했던 왜의 수도는 현 오오이타 현 나가즈(中津)였다. 삼국사기 백제 무왕 9년(608) 수나라 배세청이 우리나라 남로를 거쳐 왜에 사자로 갔다고 보인다.
헌데 이 부분이 후대에 교묘하게 요리되어 일본서기에 기록된다. 推古치세 15년(607년) 7월 오노 이모꼬(小野妹子)가 견수사(遣隋使)로 파견된다. 608년 4월 이모꼬는 백제경유로 배세청과 함께 귀국했다. 수나라 황제의 친서를 이모꼬는 제출하지 않고 오는 길에 백제에서 빼앗겼다고 변명한다. 구주백제 왜왕 다리시히꼬의 외교기사를 마치 야마토의 推古천황이 한 일처럼 황실의 역사로 미화한다. 수나라 황제의 친서를 수나라 사자 배청과 함께 오는 길에 백제에서 강탈 당 했다고 거짓말까지 역사에 나열한다. 이런 짓까지 해야만 황실의 역사가 고귀하게 될 거라고 생각하였을까. 일본서기는 배세청이 야마토의 천황을 만나고 간 것으로 역사를 도둑질한다.
아배계미, 593년 백제 아좌태자의 장자로 태어났다. 백제쪽에는 아좌태자의 기록이 없고 일본서기 스이코 천황 5년 (597년) 백제왕이 왕자 아좌를 보내 조공하였다고 나와있다. 아좌태자는 이 해 야마토에 가서 사촌동생 성덕태자의 초상화를 그려 준 것으로 되어있고 이 그림은 현재 일본에서 가장 오래 된 초상화로 궁내청에 보관되어있다. 아좌태자는 백제 27대 위덕왕의 장자로 일본에서는 오시사까 히꼬히도노 오호애 (押坂彦人大兄)황자 (생몰년 미상이나 556 – 598로 추측한다) 로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593년부터 구주백제왕이었으며 위덕왕 다음의 백제왕이 될 신분이었으나 위덕왕보다 1개월 먼저 죽었다. 이 사람이 요절하므로서 백제왕위는 위덕왕과 동 세대의 늙은 동생들이 즉위하여 혜왕, 법왕 모두 1년만에 죽고 법왕의 아들 무왕(일본호칭 지누(茅渟)왕 – 서동요의 마동, 무강왕)이 젊은 나이로 그 뒤를 이었다. 이 바람에 아배계미는 600년부터 8세의 나이로 구주백제왕이 되었고 수 나라에 사신을 보냈다. 따라서 이 기록은 이 때 야마토의 천황 스이꼬(推古)나 섭정 성덕태자와 관계없는 구주백제의 외교기록이며 야마토는 구주백제의 우산아래 존재하고 외교권이 없었다.
아배계미는 촌수로 따지면 성덕태자의 조카이다. 당시 섭정 성덕태자는 어린 조카의 압력에서 벗어나고자 하여 구주백제 정벌전쟁을 시작한다. 이 전쟁을 일본역사는 신라를 정벌하기 위한 것으로 기록하여 역사를 제 멋데로 가공한다. 일본서기가 그렇게 되어있으니 요즘도 학교에서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推古천황 10년 (서기 602년) 구메(來目)황자 (用明천황의 아들이며 성덕태자의 친동생)를 격신라장군으로 임명하여 2만 5천의 군사를 츠쿠지(筑紫)에 집결시켰다. 그러나 구메황자가 6월 병으로 쓰러져 603년 2월 사망한다. 이 해 4월 다기마(當麻)황자 (用明과 히로꼬의 첫 아들)가 다시 정신라장군에 임명되었다. 이번에는 종군하고 있던 정벌군 대장의 아내, 도네리히메왕 (舍人姬王, 흠명과 기타시히메의 제 13자)이 아까시(赤石)에서 사망하여 정벌은 중지된다.
602년과 603년 아마토의 구주백제 정복전쟁에서 야마토가 오히려 구주백제의 반격을 받아 정복된 것을 이런 식으로 기록하였다. 602년 야마토 군은 치쿠지에서 격파되고 총사령관마져 전사하였다. 603년 야마토 군은 구주백제군의 반격으로 오오사까의 바로 코 밑에 해당하는 아까시(현재 고베시) 에서 총사령관의 아내가 전사할 정도로 패배한다. 당시의 야마토의 실력자들, 推古천황, 성덕태자, 그리고 소가노 우마꼬는 구주백제의 多利思北孤 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구주백제의 관위제도를 도입하고 헌법 17조를 반포하여 구주백제의 개혁요구에 따른다. 훗날 구주백제를 역사에서 삭제한 야마토의 천황가는 이 모든 개혁이 성덕태자의 작품으로 포장하여 성덕태자를 일본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군주의 한 사람으로 만들어 지금도 일본의 지폐에서 그의 얼굴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성덕태자는 이때 구주백제 정벌에 실패하여 정치에서 손을 떼고 불교에 전념하는 조건으로 겨우 목숨을 보전하였다. 역사는 실제보다 성덕태자(574 – 622)의 모습을 과장되게 전 하였다.

24. 백제와 일본황실의 혈연관계

지금까지 따라온 독자들은 2세기부터 7세기까지 부여의 扶餘氏가 백제왕실뿐 아니라 일본황실도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백제와 일본은 동일한 세력집단이 장악하고 있었으며 서로 외국이라고 할 수 없는 관계를 유지하였다. 빽제 무령왕이 구주백제를 설립한 후로 구주백제왕을 거친 왕자가 백제왕 또는 야마토천황으로 부임한다. 백제왕과 혈연적으로 약간 소원하거나 야망이 있던 야마토의 천황들은 가끔 백제나 구주백제로 부터 독립하고자 전쟁을 일으키는 일도 있었으나 모두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서기 645년 야마토의 궁중에서 황실내부 사람들에 의해 쿠테타가 발생하고 이 쿠테타에 의해 백제 의자왕이 낙점한 후계세력이 제거된다. 일본역사에서 乙巳의 變으로 불리는 이 정변은 황실내부 방계세력이 중심세력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한 사건이며 역사의 정당성을 얻고자 꾸며 낸 것이 大化의 改新( Taika no Kaishin)이라는 캐치프레이스였다. 쿠테타의 주모자, 나까노 오호애(中大兄)황자( 38대 天智천황)는 645년부터 661년까지 천황자리에 외삼촌과 어머니를 앉히고 본인은 황자의 신분을 가지고 있으면서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치밀하고 냉혈한 사람이었다.
이 정변으로 백제 의자왕의 아내 皇極천황 (Empress Kogyoku, 594 – 661)이 유배되고 의자왕의 적장자 후루히도노 오호애 (古人大兄, 615 – 645)황자가 반란죄로 처형된다. 의자왕의 황실을 떠 받히고 있던 당시 정계의 실력자 소가노 이루까가 궁궐의 천황면전에서 도륙된다. 고구려, 신라와의 전쟁에 바쁜 백제 의자왕은 일본에서 진행되고 있는 반란사건에 개입할 여력이 없었다. 훗날 中大兄 황자의 후손들이 일본서기를 편찬할 때 이 정변과 관련하여 조상들의 무자비한 행적을 감추고자 이 무렵의 역사가 제 멋데로 재단되어 미화된다. 일본서기가 완성된 서기 720년 天智천황의 자식들이 천황자리에 있었다.
백제왕실과 일본황실은 동일한 집안세력이라는 지금까지의 주장을 뒷바침하기 위하여 약간은 소설같은 이야기를 엮어가야 된다. 소설같은 이야기라 하였으나 일본서기 기록 자체가 모호하여 일본서기에 나오는 인물들의 혈연과 나이등에 정설이 없는 것이 정설이므로 사실 일본서기 자체가 소설인 것이다.
일본서기 欽明천황 (Emperor Kimmei) 치세 13년 여름 4월 (서기 552) 야다노 다마까츠노 오호애 (箭田珠勝大兄) 황자가 죽었다는 기사가 다짜고짜 등장한다. 欽明천황이 즉위하고 황후를 세울 때 540년 1월 15일 善化천황의 황녀 이시히메(石姬)를 세워 황후로 한다. 이시히메는 2남 1녀를 낳았다. 장자를 야다노 다마까츠노 오호애황자라 한다. 다음을 오사다노 누나쿠라노 후토다마시키 (譯語田渟中倉太珠敷) 尊이라 한다. 가장 밑을 가사누이 (笠縫)황녀라 한다. 이렇게 欽明천황의 적장자로 태어났다는 그가 일본서기에 딱 두번 나오고 다시 등장하지 않는다.
그 대신 일본서기는 백제왕자 여창을 추적한다. 흠명치세 14년 (서기553) 백제의 왕자 여창은 전군을 몰아 고구려에 들어가 백합벌에 성채를 쌓고 병사들과 침식을 함께 했다. 당시 그의 나이 29세였다. 서기 554년 왕자 여창은 나이많은 신하들을 설득하고 신라와 전쟁을 시작했다. 이 해 그의 아버지 성왕이 전사한다. 555년 백제왕자 여창은 동생 혜(惠, 후일의 백제 혜왕)를 欽明왕에게 보내 성왕사망을 보고한다. 그 해 8월 왕자 여창은 출가하여 수도하면서 부왕에 대한 불효를 참회하겠다고 신하들에게 선포한다. 557년 백제 왕자 여창이 신하들에게 옹립되어 27대 위덕왕으로 즉위한다.
서기 552년 야다노 다마까츠노 오호애황자가 죽었다는 기사가 왜 실렸을까? 552년 이후 이 사람은 일본을 떠나 백제에서 생애를 보낸 역사의 인물이 되었다는 의미가 아닐까? 왕자 여창은 위덕왕으로 598년까지 무려 44년간 왕위에 있었다. 일본의 야다노 다마까츠노 오호애황자가 백제에 오면 왕자 여창이 된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가 성왕이라면 欽明왕의 아들이라는 일본서기 기사를 어떻게 해석해야 될까? 일본서기 편찬자들이 가장 고심했던 문제는 백제왕실과의 연결고리를 떼어내서 독자적인 일본황실 계보를 확보하는 일이었다. 왕자 여창이 성왕의 아들인 이상 欽明천황의 황후로 기록된 이시히메(石姬)도 성왕의 황후로 보아야 된다. 성왕이 무령왕의 적장자이므로 성왕 다음의 백제와 일본의 왕위계승권은 성왕의 아들들이 0 순위였다.
그 럼 흠명천황 다음에 즉위한 30대 敏達(Emperor Bidatsu)천황을 보자. 그는 위의 이시히메 소생의 두째 황자이다. 바로 위덕왕의 동모형제이다. 따라서 이들은 백제 무령왕의 두째 아들이었던 흠명의 소생이 아니라 사실은 백제 성왕의 아들이었다. 일본서기 편찬자들에게 백제의 무령왕, 성왕, 그리고 의자왕은 골치아픈 존재들이었음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그들의 많은 아들들이 일본황실 역사에 나오게 되는데 그들의 족보를 비슷한 시기의 일본역사에만 나오는 천황에게 갖다 붙여야 되기 때문이다. 그 바람에 그들을 낳은 어미들까지 다른 천황의 황후로 기록되는 우스운 일이 생기게 되었다.
이야기를 진행하기 위하여 일본서기에 나오는 29대 흠명천황의 가족을 모두 기록하면 다음과 같다. 모두 15남 8녀의 자식을 기록했는데 4명이 후일 천황으로 등극한다. 여기서 황후로 기록된 이시히메가 성왕의 황후인데 시동생 欽明의 황후로 역사에 기록된 이유는 이미 설명하였다. 그렇다면 2명의 천황을 배출한 기타시히메는 누구의 아내였을까?
우선 13명의 자녀가 기록된 것부터 좀 구린내가 난다. 그러나 2명의 천황은 역시 성왕의 자식이라 봐야 되지 않을까.
오아네노 기미가 출산한 4남 1녀가운데 하츠세베 황자가 32대 崇峻천황이 되었는데 이 사람은 欽明의 자식인 것이 거의 확실하다. 자식의 숫자로 보더라도 한 사람의 자식으로 15남8녀는 좀 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皇后:石姫皇女(いしひめのひめみこ。宣化天皇の皇女)2남 1녀
箭田珠勝大兄皇子(やたのたまかつのおおえのみこ、八田王) : 백제왕자 여창 (525 – 598)
渟中倉太珠敷尊(ぬなくらのふとたましきのみこと、30대 敏達天皇)
笠縫皇女(かさぬいのひめみこ、狭田毛皇女)
妃:稚綾姫皇女(わかやひめのひめみこ、『古事記』に小石比賣命。宣化天皇の皇女。) 1 남
石上皇子(いそのかみのみこ、上王)
妃:日影皇女(ひかげのひめみこ、『古事記』になし。宣化天皇の皇女?)1 남
倉皇子(くらのみこ。『古事記』に宗賀之倉王として、母は糠子郎女)
妃:堅塩媛(きたしひめ。蘇我稲目宿禰の女) 7남 6녀
大兄皇子(おおえのみこ、31대 用明天皇)
磐隈皇女(いわくまのひめみこ、夢皇女) 伊勢斎宮
臘嘴鳥皇子(あとりのみこ、足取王)
額田部皇女(ぬかたべのひめみこ、33대 推古天皇)
椀子皇子(まろこのみこ、麻呂古王)
大宅皇女(おおやけのひめみこ)
石上部皇子(いそのかみべのみこ、伊美賀古王)
山背皇子(やましろのみこ、山代王)
大伴皇女(おおとものひめみこ)
桜井皇子(さくらいのみこ、桜井之玄王)
肩野皇女(かたののひめみこ、麻奴王)
橘本稚皇子(たちばなのもとのわかみこ)
舎人皇女(とねりのひめみこ、泥杼王) 当麻皇子の妃
妃:小姉君(おあねのきみ。蘇我稲目宿禰の女)4 남 1녀
茨城皇子(うまらきのみこ、馬木王)
葛城皇子(かずらきのみこ)
穴穂部間人皇女(あなほべのはしひとのひめみこ) 用明天皇の皇后、聖徳太子の母
穴穂部皇子(あなほべのみこ、須賣伊呂杼・天香子皇子・住迹皇子)
泊瀬部皇子(はつせべのみこ、長谷部若雀命・32대 崇峻天皇)
妃:糠子(ぬかこ。春日日抓臣の女)1남 1녀
春日山田皇女(かすがのやまだのひめみこ)
橘麻呂皇子(たちばなのまろのみこ、麻呂古王)


25. 敏達天皇(Emperor Bidatsu)의 家系


敏達천황(30대)은 欽明천황의 두째 아들로 어머니는 宣化천황의 딸 이시히메이다. 서기 572년 4월 3일 천황에 즉위하여 그 달 百濟의 大井에 궁궐을 지었다(일본서기 기록). 일본서기 기록과 달리 敏達천황은 백제 성왕의 왕자임을 이미 전회에서 거론했다. 百濟大井宮 (구다라노 오오이노미야) 터는 현재의 나라현 고오료우쬬(廣陵町) 구다라(百濟)로 비정한다. 이곳에 百濟寺 삼중탑이 남아있고 그 지역이 구다라(百濟)로 불리고 있으나 궁궐터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575년 1월 오끼나가 마떼왕의 딸 히로히메(廣姬)를 황후로 세웠다. 황후는 1남 2녀를 낳았다. 첫째가 오시사까 히꼬히토노 오호애 (押坂彦人大兄)황자, 두째가 사까노보리 황녀, 세째가 우지노 시즈까이 황녀라 한다. 그 해 11월 황후 히로히메가 죽었다. 576년 3월 누까타베(額田部)황녀를 황후로 맞아 2남 5녀를 보았다. 이 시대 불교수용여부를 두고 논란이 심했으나 敏達천황은 불교를 공인하지 않고 두창으로 585년 사망했다.
두번째 황후가 된 누까타베 황녀는 592년 12월 33대 스이코(推古)천황(일본역사 최초의 여자천황)이 되는데 일본서기 推古條에 그녀는 18세때 황후가 되었고 34세에 남편을 여이었으며 39세에 천황이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推古천황은 대략 서기 551년에서 554년 사이에 출생한 것으로 되며 누까타베 황녀가 18세 때 시집왔다면 569년에서 572년사이가 된다. 이는 천황 즉위 전에 누까타베 황녀와 혼인했다는 뜻이 아닌가? 그렇다면 일본서기에서 첫째 황후가 575년 죽어서 576년 두번째 황후를 들였다는 것은 거짓이 된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본업이 역사학자가 아닌 아마츄어 역사학도에게 드는 느낌은 29장에서 나온 논의의 연장선에서 이 기사가 누군가 다른 백제 주요인물의 기록을 여기 갖다 붙였기 때문에 생긴 문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欽明條의 이시히메(石姬)와 같은 방법으로 백제 위덕왕의 황후 히로히메(廣姬)를 敏達천황의 황후로 만든 것이다. 왜냐하면 이 다음에 등장할 34대 敍明천황 때문이다. 서명천황은 이후의 일본황실을 열어 갈 38대 天智천황과 40대 天武천황의 부친이다. 그런데 하필 그 사람이 백제 위덕왕의 아들 아좌태자 (일본의 오시사카 히로히토노 오호애황자)의 아들이다. 그러니 그의 어머니 히로히메를 어딘가 꼭 끼워 넣어야 되는데 가장 적당한 곳이 위덕왕의 친동생 敏達천황이다. 따라서 첫 황후가 죽어서 다음 황후를 뽑았다는 둥의 거짓말을 하게된다. 위덕왕은 서기 525년생, 비다츠 천황은 538년으로 본다. 이렇게 보면 첫 황후로 기록된 히로히메는 위덕왕의 황후, 누까타베 황녀는 명실상부한 敏達의 正妃로 敏達이 즉위하기 전 결혼하여 즉위하자 황후가 된 것으로 된다. 백제와 일본의 황실을 혈연적으로 분리하기 위하여 일본서기 편찬자들이 고민하여 내 놓은 결과물이 일본서기의 혈연기록인 것이다.
1. 皇后(前):広姫(ひろひめ、息長真手王の女) 敏達4年(575年)薨去
押坂彦人大兄皇子(おしさかのひこひとのおおえのみこ、麻呂子皇子)
逆登皇女(さかのぼりのひめみこ、坂騰王)
菟道皇女(うじのひめみこ、宇遅王) 伊勢斎宮
2. 皇后(後):額田部皇女(ぬかたべのひめみこ、後の33대 推古天皇)2남 5녀(일본서기)
菟道貝鮹皇女(うじのかいたこのひめみこ、菟道磯津貝皇女・静貝王) 聖徳太子の妃
竹田皇子(たけだのみこ)
小墾田皇女(おはりたのひめみこ) 押坂彦人大兄皇子の妃
鸕鶿守皇女(うもりのひめみこ、軽守皇女・宇毛理王)
葛城王(かずらきのみこ、古事記のみ)
尾張皇子(おわりのみこ)
田眼皇女(ためのひめみこ、多米王) 舒明天皇の妃
桜井弓張皇女(さくらいのゆみはりのひめみこ、桜井玄王・由波利王) 押坂彦人大兄皇子の妃・来目皇子の妃
 
3. 夫人:老女子(おみなご、春日臣仲君の女)
難波皇子(なにわのみこ) 橘朝臣・路真人・甘南備真人・大宅真人などの祖
春日皇子(かすがのみこ) 春日真人などの祖
桑田皇女(くわたのひめみこ)
大派皇子(おおまたのみこ、大俣王)
4. 采女:菟名子(うなこ、伊勢大鹿首小熊の女)
太姫皇女(ふとひめのみこ、桜井皇女・布斗比売命)
糠手姫皇女(ぬかでひめのみこ、田村皇女・宝王・島皇祖母命) 押坂彦人大兄皇子の妃・舒明天皇の母
누까타베 황녀가 낳은 5녀 가운데 오하리다 황녀와 사쿠라이노 유미하리 황녀의 두 딸이 히꼬히도노 오호애 황자에게 시집갔다. 놀라운 것은 다메(田眼 또는 多米)황녀로 기록된 넷째 딸이 敍明천황 (위의 히꼬히도 황자의 아들)에게 시집간 사실이다. 결국 5녀 가운데 딸 둘을 히꼬히도 황자(아좌태자)에게 보내고 한명의 딸을 그의 아들 敍明천황에게 시집보냈으니 아좌태자 부자가 백제와 왜의 왕위 계승권의 중심인물임이 확실하지 않겠는가? 백제 무령왕 – 성왕 – 위덕왕 – 아좌태자 (히꼬히토노 오호애 황자) – 의자왕 – 후루히토노 오호애 (古人大兄) 황자로 이어지는 백제의 적장자들의 명단이다. 소위 백제왕실의 장손들의 리스트인 것이다. 부부가 모두 천황을 지낸 敏達 – 推古천황의 커플조차 자기 아들을 황위에 세우지 못 하였다. 왕위 계승권은 적장자가 0 순위였던 것이다. 왜의 敍明천황이 641년 백제 무왕사후 의자왕으로 부임한다. 물론 일본측 기록은 641년 敍明천황의 죽음을 기록한다.
헌데 재미있는 것은 상기 가계에서 네번째에 있는 우네메(采女) 우나꼬의 기사이다. 采女란 천황의 시중을 들기 위하여 궁에 들어 간 여자이다. 따라서 신분이 천황의 비로 들어 간 여자보다 떨어지는데 천황의 눈에 들어 자식을 갖게 되면 비가 된다. 채녀 우나꼬가 낳은 누까데 히메 (일명 다무라 황녀 또는 다까라 왕) 황녀와 히꼬히토 황자 사이에서 敍明천황(593 – 660)이 태어난다. 그런데 어떻게 된 영문인지 이 때부터 다무라(田村), 다까라(寶), 다메(田眼), 다미(多米), 계미(鷄彌)등의 비슷한 이름이 남녀불문하고 敍明천황 주변의 여러 사람에게 붙여진다. 우리 말로 닭에서 비롯되었다는 설도 있으나 확신할 수 없다. 敍明천황, 皇極천황, 齊明천황 그리고 敍明천황의 어머니 이름이 모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 敍明천황에게 推古천황의 딸 다메(田眼 또는 多米)황녀가 시집가는데 敍明천황은 593년생, 다메황녀 594년생이다. 594년이라면 推古천황 40세때이므로 자식을 낳을 수도 있는 나이지만 敏達천황이 585년 사망했으므로 부친이 누구일지 의문이 남는다. 다메황녀는 敍明천황의 황후였고 천황의 사랑을 받았으나 자식을 낳지 못 하는 여자였다. 이 여인이 敍明천황 다음의 35대 皇極 天皇 (Empress Kogyoku, 594 – 661)이 되나 645년 을사의 변으로 쿠테타의 제물이 되어 추방된다. 이때 敍明천황의 장자 후루히도노 오호애 (古人大兄)의 나이가 천황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나이가 안 되어 그가 30세가 될 때까지 皇劇천황이 한시적으로 천황자리에 있었다고 보인다. 그렇다면 후루히도노 오호애 황자는 대략 615년생이며 그가 30세가 되는 645년 쿠테타가 때 맞춰 발생하여 그를 죽이고 황극천황을 폐위시킨다. 그리고 권력을 장악한 쿠테타 그룹은 자기들의 반역을 감추려고 훗날의 사이메이천황 (齊明, Empress Saimei, 601 – 661)과 코교쿠 천황이 동인인물이라고 역사를 조작하여 자기들이 천황을 폐위시킨 사실을 은폐한다. 일본역사는 그렇게 기록되어있다.
2008년 11월 28일 금요일


26. 乙巳의 變 (Isshi Incident, 645)

백 제 무왕 42년 (641) 봄 3 월 왕이 죽었다. 시호를 무(武)라 하였다. 무왕의 원자 의자왕은 무왕 재위 33년(632) 태자로 정해졌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야마토의 34대 敍明천황 (Emperor Jomei)은 641년 10월 붕어하여 대궐북쪽에 빈소를 차렸는데 이를 백제대빈이라 하였다. 敍明天皇에 이어서 642년 2월 그의 황후가 35대 皇極天皇 (Empress Kogyoku)으로 즉위한다.
을사의 변이란 645년 6월 14일 궁중의 皇極天皇의 면전에서 쿠데타가 발생하여 정권을 탈취한 사건을 이른다.
지금 우리가 보고있는 황실의 역사기록 (일본서기)은 이긴 자의 후손들이 손 본 내용이다. 만세일계를 자랑하는 천황가는 쿠데타가 일어났다는 사실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오직 천황가에 배반하는 나쁜 놈, 소가노 이루까 (蘇我入鹿)를 처단한 것으로 기록하고 이왕 나선 김에 개혁 (大化의 改新)을 내세워 무늬만 개혁을 하는척 한다. 개혁이란 예나 지금이나 혁명뒤에 따라다니는 법이다.
이 쿠데타가 일어나기까지의 과정이 皇極天皇 조에 나와있는데 그 기술이 하도 불친절하여 일류 탐정소설을 읽는 것 같다. 현재까지 어떤 역사학자도 이 무렵의 역사의 진실을 밝힐 수 없었다. 백인 백색, 오직 추측만 난무할 뿐이다. 맛이나 보고 넘어가자.

641년 11월 백제 대좌평 지적(智積)이 죽었다. 642년 1월 국왕의 어머니가 죽었다. 弟王子의 아들 교기(翹岐)및 같은 어머니가 낳은 누이 - 여자 4명, 내좌평 기미(岐味), 거기에 유명인 40여명이 섬에 유배되었다. 백제국왕은 “새성 (塞上)은 항상 나쁜 짓만 저지르니 사자들 편에 귀국하겠다고 하거든 천황이 허락하지 말라”고 전했다. 2월 천황은 교기를 불러 아즈미의 야마시로 무라지의 집에 살도록 해 주었다. 4월 교기가 종자를 데리고 천황을 배알했다. 소가노 에미시가 우네비의 집으로 교기등을 초대하여 담소한 뒤 많은 선물까지 주었다. 그러나 이 때 새성 (塞城 또는 塞上)은 부르지 않았다. 5월 교기등을 불러 말타고 하는 활쏘기를 구경시켰다. 5월 21일 교기의 종자 1명이 죽었다. 22일 교기의 아이가 죽었다. 5월 24일 교기가 처자를 데리고 구다라의 오호이 (지명, 百濟大井)의 집으로 옮겼다. 7월 22일 대좌평 지적등에게 조정에서 향응을 베풀었다. 교기앞에서 씨름을 시켰다. 지적등은 연회가 끝나고 교기의 집까지 가서 문전에서 배웅했다.
죽었다던 지적이 조정의 연회장에 살아 나타나는데 대한 설명이 없다. 백제왕자 교기(翹岐)를 翹企로 쓰면 “긴 줄 후미에서 발 돋움을 하면서 제 차례를 기다린다”는 뜻이 되므로 교기라는 명칭은 많은 함축을 가진 말일 것이다. 그러나 훗날 역사의 전개에 이 이름은 다시 등장하지 않고 다른 이름들만 나오므로 교기가 훗날의 누구에 해당하는지 알수 없다.

644년 봄 1월, 나까토미노 가마꼬 (中臣鎌子)는 신관(神官)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임하지 않았다. 그때 가루황자 (輕皇子)도 다리가 아파서 조정에 출사할 수 없었다. 나까토미노 가마꼬는 가루황자와 친한 사이였으므로 병 문안을 갔다. 가루황자는 자기의 사랑하는 황비 아헤노 우지를 보내 가마꼬가 불편하지 않도록 모든 편의를 봐 주었다. 나까토미노 가마꼬는 공명정대하고 충성심이 강 한 사람이었다 (쿠데타 주체세력이 혁명에 성공한 뒤 기록한 내용임). 그는 황실의 권위를 무시하고 전횡을 일 삼는 소가노 이루까 (蘇我入鹿)를 제거하고 황실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갈 지도력을 가진 인물을 찾고 있었다. 그의 마음은 차차 나까노 오호애 황자 (中大兄皇子)에게 기울었다. 나까노 오호애황자가 어느 날 법흥사에서 축구를 하다가 신발이 벗겨져 날아갔는데 옆에서 지켜보던 가마꼬가 신발을 줏어와 무릎을 꿇고 나까노 오호애황자 에게 신겨 주었다. 이 일을 계기로 두 사람은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두 사람은 미나부치 세이안 (南淵請安)의 학당(學堂)에 함께 다니면서 공자와 주공의 가르침을 강의 받았는데 오고 가는 길에 사람들의 눈을 피하여 소가씨를 섬멸할 방도를 모의하였다. 가마꼬는 소가씨 일족이면서 소가노 에미시 (蘇我蝦夷, 이루까의 부친), 소가노 이루까에게 비판적인 소가노 구라야마다노 이시가와마로 (蘇我倉山田石川麻呂)를 한편으로 끌어들여 이시가와마로의 딸과 나까노 오호애황자를 혼인시켜 결속을 다진다. 모든 준비를 완료하고 삼한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사자들이 공물을 바치는 날을 소가노 이루까 암살의 날로 정했다.
혁명 주체세력은 나까노 오호애황자 (中大兄皇子), 가루황자(輕皇子), 나까토미노 가마꼬 (일명 나까토미 가마타리, 훗날 후지와라 가마타리), 소가노 구라야마다노 이시가와마로의 4명이었다. 이 사람들의 이름이 일본서기의 이 시점에서 처음 등장하므로 과거에 이들의 아이덴티티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 쿠데타의 결과로 당시의 권력자 소가노 이루까가 현장에서 살해되었다. 현장에서 사건을 목격한 皇極天皇은 퇴위되어 현 시코쿠 (四國) 高知市 아사쿠라 (朝倉)신궁에 유폐된다. 그러나 쿠데타의 실제 목표는 따로 있었으니 바로 皇劇天皇곁에 시립하고 있던 후루히도노 오호애황자 (古人大兄皇子, 615 – 645)였다. 이 사람은 백제 의자왕의 장자로 皇極天皇 다음 천황이 될 신분의 사람이었다. 그는 이 사건후 승려가 되어 목숨을 보전코자 간청하였으나 3개월 뒤 모반죄로 처형된다. 모반자가 누구인지 정말 헷 갈리는 것이 역사이다. 황위 정통 승계권자를 젖히고 방계의 황자가 천황의 자리를 도둑질한 것이 을사의 변의 진상이다.
쿠데타 이후 가루황자가 36대 孝德天皇 (Emperor Kotoku)으로 즉위하고 나까노 오호애황자를 황태자로 봉한다. 가루황자는 나까노 오호애황자의 외삼촌이다. 가루황자와 나까노 오호애황자의 어머니는 일본서기에 지누왕 (茅渟王) 소생으로 되어 있으나 지누왕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고 백제 무왕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나까노 오호애황자의 어머니가 훗날의 37대 齊明天皇 (Empress Saimei, 601 – 661)인데 孝德天皇(? – 654)이 죽은 뒤 655년 천황으로 즉위하여 661년 죽었다. 따라서 나까노 오호애황자는 17년간 황태자 신분이면서 실제로는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여기서 齊明天皇을 나까노 오호애황자의 어머니라고 표현하는 것은 사이메이와 코교쿠를 동일인으로 일본서기를 기록함으로써 시호이외의 이름, 다까라황녀, 다무라황녀, 다메황녀등을 누구로 봐야 하는지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나는 이 이름들이 皇極천황의 이름이었다고 본다. 그런데 皇極天皇(Empress Kogyoku, 594 – 661, 비타츠 천황과 스이코 천황의 딸)과 齊明天皇 (Empress Saimei, 601 – 661, 백제 무왕의 딸 또는 지누왕의 딸)이 동일인이라고 일본서기는 역사를 기술하였다. 그렇게 되면 황실의 위협이었던 소가노 이루까를 처치하여 황실의 권위를 반석위에 올려 놓은 것이 을사의 변이다. 을사의 변으로 천황이 폐위되어 유폐된 일은 없었다고 일본서기는 말하고 싶은 것이다. 왜냐하면 이 일로 인하여 일본황실은 을사의 변 쿠데타 주체세력의 후손들이 맡게 되었고 조상들이 저지른 권력탈취의 수치스련 기록을 황실역사에서 지워버렸다.
1948년 부여읍에서 사택지적비 (砂宅智積碑)가 발견되었다. 여기 나오는 대좌평 지적과 동일인으로 본다. 654년 세운 석비로 “ 갑인년 정월 9일 내기성의 사택지적은 해가 쉬이 가는 것을 슬퍼하고 달은 어렵게 돌아오는 것이 서러워서 금을 캐어 진귀한 집을 짓고 옥을 파 내어 보배로운 탑을 세우니 그 높고 자애스런 모습은 신령으런 빛을 토하여 구름을 보는 듯하고 그 우뚝 솟은 자비로운 모습은 성스러운 밝음을 머금어…..” 라는 내용이 해독 가능하다. 지적이 나까토미 가마꼬 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또 교기가 나까토미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이렇게 천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는 것이 일본서기의 기록이다.
나까토미 가마꼬 (中臣鎌子)의 이름이 출세함에 따라 나까토미 가마타리 (中臣鎌足)로 또 후지와라 가마타리 (藤原鎌足)로 바뀐다. 후지와라씨(藤原氏)는 일본역사상 최고의 명문명가이면서도 어디서 왔는지 의문에 쌓여있고 후지와라씨의 원조로 알려진 가마타리(鎌足)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알려진 게 없다. 그가 백제에서 온 인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위에서 이미 언급된 누군가일 수 도 있다. 들어갈 수록 미로에 빠지게 되는 것이 일본역사의 재미이다.
야 마토의 33대 스이코 천황 (推古天皇, 593 – 628재위)시절 서기 600 – 629년 구주백제왕으로 야마토를 지배하였던 多利思北孤는 백제 아좌태자의 장자였다. 아좌태자는 일본에서 히코히도노 오호애황자(彦人大兄皇子)로 불렸고 敏達天皇의 황자로 기록했다. 스이코 천황은 넷째 딸 다메황녀 (眼田皇女)를 多利思北孤의 황후로 주었다. 수나라 기록에 나온 왕비 계미(鷄彌)이며 훗날의 皇極天皇이다. 그런데 620년경 백제의 무왕이 딸을 多利思北孤에게 시집보냈다. 이 여인이 훗날의 齊明天皇( 출생년을 601년으로 추정)이다. 사이메이는 조숙한 편이었던지 나이 20이전에 이미 한번 결혼하여 高向王과의 사이에 아들 아야황자 (漢皇子)을 두었다. 高向王이 누구인지 아야황자가 어떻게 되었는지 아는 자는 없다. 이 글에서는 多利思北孤에게 시집올 때 데려 온 아야황자를 위에 나온 백제왕자 교기로 본다. 혈통상 황위를 넘볼 수 없는 왕자이므로 翹企 (긴 줄 후미에서 발돋움하며 지루하게 순서를 기다림)할 수 밖에 없었고 그래서 쿠데타에 의지하여 권력을 탈취할 수 밖에 없는 처지였다.
多利思北孤의 구주백제 수도는 오오이다 현(大分縣) 나까즈시 (中津市), 수 나라의 사신 배세청이 608년 방문했던 왜의 수도란 이 곳을 말한다. 齊明는 620년경 백제에서 구주백제 수도였던 나까즈시로 시집와서 629년 多利思北孤가 야마토의 敍明天皇으로 떠날 때까지 함께 살았다. 이 기간에 齊明은 하시히도황녀 (間人皇女), 오아마황자 (大海皇子), 백제왕 善光을 낳았다. 629년 敍明天皇은 왕비 계미(鷄彌) 즉 다메(田眼)황녀 또는 다까라황녀(寶皇女)와 함께 야마토로 떠나고 구주백제는 642년까지 齊明이 맡았다. 641년 敍明天皇이 백제 의자왕으로 떠나자 다까라 황후가 皇極天皇으로 즉위한다. 서명천황의 장자 후루히도노 오호애 황자 (古人大兄皇子)와 소가노 이루까 (蘇我入鹿)가 천황의 최측근이었다.

642년 구주백제에서 齊明의 모후가 사망한다. 일본서기 황극조에서 1월 국왕의 어머니가 죽었다고 나온 것이 이것이다. 헌데 그때 齊明의 남동생 가루황자 (輕皇子, 훗날의 孝德天皇)가 정변을 일으켜 구주백제왕이 되고 齊明, 교기를 비롯한 가족 측근 모두를 추방한다. 거기서 쫒겨난 사람들이 야마토로 몰려들어 3년후 을사의 변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한다. 그때 구주백제왕이었던 가루황자도 정변에 참여하므로서 자동적으로 구주백제가 야마토에 흡수된다.

27. 敍明天皇 ( Emperor Jomei)   

“오끼나가 타라시히 히로누까 천황 (息長足日廣額天皇)은 敏達天皇의 손자이고, 히코히도노 오호애황자 (彦人大兄皇子)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누까떼히메황녀 (糠手姬皇女)이다. 推古29년 (621) 황태자 토요토미미 (豊聰耳, 성덕태자)가 죽은 뒤 황태자를 세우지 않고 推古36년 (628) 천황이 죽었다”. 일본서기 敍明紀는 이렇게 시작된다.
위의 시호가운데 足日廣이 脩書에 기록된 왜왕 多利思北孤에 해당한다. 敏達(30대 천황), 用明(31), 崇峻(32), 推古(33)로 이어진 형제자매가 60여년간 황위를 즐기는 바람에 한 세대를 건너뛰어 그들의 장손자 敍明天皇이 629년 (당시 36세) 34대 천황이 된다. 백제의 위덕왕이 이들 형제자매 가운데 적장자이며 崇峻을 제외한 모두가 백제 성왕의 아들 딸이다 (崇峻은 欽明의 아들). 백제 무령왕 – 성왕 – 위덕왕 – 아좌태자 (히코히도노 오호애황자) – 敍明天皇 (多利思北孤 훗날의 의자왕) – 후루히토노 오호애 황자 (古人大兄皇子)로 이어지는 것이 백제왕실 적장자의 명단인데 아좌태자가 598년 부왕 위덕왕보다 먼저 사망했다. 이 때문에 백제왕위는 598년 위덕왕 사후 다시 혜왕 –법왕으로 위덕왕의 늙은 형제들이 채웠다. 리스트의 마지막 후루히토노 오호애황자 (古人大兄皇子, 615 – 645)는 이런 혈통을 가졌기 때문에 방계황자들의 타겟이 되어 645년 을사의 변 (Isshi Incident)으로 희생된 비운의 황태자였다.
이들의 혈통이 황위에 오르는데 필요한 조건이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후루히토노 오호애를 죽이고 권력을 장악한 나까노 오호애황자도 나중 후루히토노 오호애황자의 딸, 야마토히메를 황후로 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황위에 오르려면 그만큼 혈통이 중요했던 것이다. 야마토히메는 아버지를 죽인 원수의 황후가 되어야 했고 두 사람 사이에 자식이 있었다는 기록도 없다. 명목상의 부부였을 것이다.
치세 2년 (630) 정월 다까라 황녀 (寶皇女)를 황후로 세워 2남 1녀를 낳았다.
첫째 가츠라기황자 (葛城皇子)
두째 하시히도 황녀 (間人皇女)
셋째 오호아마황자 (大海皇子)
다음 소가노 우마꼬 (蘇我馬子)의 딸 호떼이노 이라츠메 (法提郞女)부인에게서 후루히토노 오호애황자 (古人大兄皇子)를 낳았다.
다음 敏達天皇의 딸 다메황녀 (田眼皇女)를 비로 세웠으나 자식의 기록이 없다.
641년 10월 敍明天皇 구다라노 미야 (百濟宮)에서 서거. 그때 동궁 히라까스와께 황자(開別皇子)가 16세였다.
위에 인용된 몇줄의 기록은 이 시대 역사의 진실을 이해하는데 너무 중요하다.
630년 다까라 황녀를 황후로 세워 2남1녀의 역사상의 인물들의 어머니가 되었다는 발언은 皇極과 齊明이 처음부터 동일인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다까라황녀는 敏達의 딸 다메황녀의 다른 이름이며 齊明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다. 630년 황후가 된 것은 皇極이지 齊明이 아니며 皇極은 아이를 낳은 적이 없다. 齊明의 무덤은 奈良市 高市郡 高取町 오치노 오까노에노 미사사기 (越智崗上陵)이며 황극은 奈良縣 橿原市 고다니고분 (小谷古墳)으로 알려져 있다.
皇極/齊明의 68세 사망설은 皇極의 생년 594년 기준이며 齊明은 601년생으로 61세 사망이 타당하다. 帝王編年記는 齊明의 출생을 601년으로 기록하고있다. 두 사람 다 661년 사망했는데 皇極 594년생, 齊明 601년생이다.
가츠라기황자, 히라까스와께황자, 나까노 오호애황자, 天智天皇은 동일인의 명칭이다. 641년 히라까스와께황자가 16세였다는 기록은 나까노 오호애황자의 나이를 속이기 위하여 일본서기에 삽입되었다고 본다. 왜냐하면 그를 서명천황의 피를 이어받은 것으로 속이려면 626년생이라는 꼬리표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가 서명천황의 친아들이라면 이러한 사족이 필요치 않았을 것이다. 또 그가 그 시점 동궁(東宮)이었다는 기록도 믿기 어렵다. 지금 공식적인 역사서 모두가 그의 나이를 이 일본서기기록을 근거로 626년생으로 못 박고 있으나 (641-15 = 626) 나까노 오호애황자를 齊明이 시집올 때 데려 온 아야황자 (漢皇子) 및 교기(翹岐)로 보는 이 글에서는 그의 생년을 619년으로 한다. 天智天皇의 619년 출생설은 一代要記에 적혀있다. 齊明은 619년 天智를 낳고 620년 시집와서 나까즈의 나까즈노미야 (中津宮)에 살면서 622년 오호아마황자를 낳았다. 天武天皇은 65세를 살았다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며 622년생이 합당하다. 一代要記, 興福寺略年代記, 神皇正統錄, 本朝皇胤紹運錄이 천무의 622년 출생을 기록하고 있다.
후루히도노 오호애황자는 615년생으로 본다. 615년으로 보는 이유는 641년 敍明이 떠날 때 후루히도가 즉위하지 않고 황극이 즉위한 이유를 그 때 후루히도가 30세가 되지 않아서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면 641년 후루히도가 27세이므로 황극이 3년 정도 황위에 있다가 후루히도가 30세를 넘으면 황위를 넘겨 줄 계산이었다. 그 시절 백제왕은 대강 40세, 야마토 천황은 30세 정도의 연령 가이드 라인이 있었다고 보인다. 백제 무령왕, 의자왕 모두 40세이후에 즉위하였다. 645년 후루히도가 31세가 되므로 천황으로 즉위할 연령이 되었으나 그 때에 맞춰 을사의 변이 일어난 것이다.
후루히도황자는 敍明天皇의 아들가운데 최연장자이며 어머니가 소가노 우마꼬의 딸이다. 소가집안은 당시 최고의 실세이며 천황을 능가하는 권력자였다. 후루히도가 차기 천황이 되리라는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620년 백제 무왕의 딸 齊明이 아야황자를 데리고 시집왔을 때 호떼이노 이라츠메 히메와 다메황녀는 시집와서 이미 여러 해를 지냈을 것이다. 호떼이노 이라츠메와 다메황녀는 박힌 돌, 제명은 그 당시 굴러 온 돌이 아니었을까. 결혼력이 있는 제명이 데려 온 한 살짜리 아들 아야황자는 자기보다 4살 많은 후루히도노 오호애황자를 선망의 눈으로 바라 보면서 자랐으리라. 교기(翹岐)라는 이름은 많은 것을 함축하는 의미로 선택된 용어이다. 630년 敍明천황이 야마토의 천황으로 옮길 때 다메황녀(다까라황녀 즉 皇極)와 16세의 후루히도노 오호애황자는 함께 아쓰까노 오까모토노미야 (飛鳥岡本宮)로 따라갔고 齊明과 그 아들들은 九州 오오이다현의 나까즈노미야에 남았다. 큐우슈우에 남아 구주백제왕으로 봉해진 齊明이 야마토의 황후가 되었다는 것은 후대의 창작이다. 敍明이 붕어했다는 641년 27세의 동궁 후루히도노 오호애황자는 이미 어엿한 어른이었다. 16세의 동궁 히라까스와께 운운 할 처지가 아니었다. 실제 오오이다현의 나까즈에서 성장한 교기는 641년 23세의 청년이었다. 나까노 오호애황자를 626년생으로 만들기 위하여 16세의 동궁 히라까스와께 운운하는 해괴한 기사가 필요한 것이다. 그러면 622년생인 천무가 동생이 아닌 형이 되고 만다.
645년 6월 12일 皇極天皇은 아쓰까노 후다부끼노미야 (飛鳥板蓋宮)의 다이고쿠텐 (大極殿)에 좌정하고 있었다. 후루히도노 오호애황자가 곁에 시립하고 있었다. 쿠데타의 주모자들은 三韓의 사자들의 조공을 받는 자리에 출석할 소가노 이루까 (蘇我入鹿)의 무장해제를 확인했다. 소가노 이루까가 참석하고 쿠라야마타노 마로가 조서를 낭독하는 사이 나까노 오호애황자의 명에 의하여 궁중의 통행문이 차단되었다. 소가노 이루까가 공격자들에게 공격을 받아 쓰러지면서 천황을 향해 말했다.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하였읍니까?”. 이 광경을 보면서 천황이 나까노 오호애를 향해 “ 나는 모르는 일이다. 이게 무슨 짓이냐?”라고 소리쳤다. “쿠라츠쿠리 (鞍作, 이루까의 실명)가 황실을 빼앗으려 하였읍니다” 나까노 오호애의 대답이다. 쿠라츠쿠리가 쓰러지자 후루히도노 오호애황자가 정신없이 밖에 나와 외쳤다. “카라히도(韓人)들이 쿠라츠쿠리를 헤쳤다. 억장이 무너진다.” 하고는 내전에 들어가 문을 닫아버렸다. 당시 구주백제는 백제본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므로 야마토 사람과는 여러 면에서 달랐다. 말의 억양만 들어도 구주사람인지 야마토 사람인지 구별할 수 있었으리라. 카라(韓)란 원래 한반도의 마한 진한 변한의 한이므로 반도의 냄새를 많이 풍기는 사람을 카라히도 라고 했을 것이다. 카라히도들이 쿠라츠쿠리를 죽였다는 증언은 구주백제에서 온 교기, 가루황자, 나까토미노 가마꼬 모두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이로부터 3개월 뒤 후루히도노 오호애황자 (古人大兄皇子)도 모반죄로 살해된다.
2남1녀중의 하시히도황녀 (間人皇女)는 나중 孝德天皇(위의 가루황자)의 황비가 되는데 나까노 오호애황자와 연인사이로 알려져 있다. 아무리 근친상간의 시대라 하더라도 동부동모형제간의 치정관계는 좀 심하다. 敍明天皇이 나까노 오호애의 친아버지가 아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부동모간의 치정관계).
1997년 나라현 사꾸라이시(櫻井市) 기비이케 (吉備池)제방에서 7세기중반의 거대한 사원 금당터로 보이는 기단이 출토되었다. 금당터는 동서 약 37미터. 남북 약 27미터의 면적이며 서쪽으로 86미터 떨어진 곳에 일변 약 30미터의 탑기단과 회랑, 중문, 승방으로 보이는 유적이 발견되었다. 기단의 규모로 보아 아쓰카 시대 최고층의 높이 90미터 정도의 탑으로 추정한다. 기비이케 하이지 (吉備池廢寺)로 불리는 이 유적이 敍明天皇 11년 (639년) 조영이 시작된 구다라 오호데라 (百濟大寺)가 아닐까하고 단연 주목을 받고있다.
百濟大寺는 최초의 칙원사 (勅願寺) – 國營寺院으로 敍明紀 11년 7월 구다라 강(百濟川) 양쪽에 오호미야 (大宮) 및 오호데라 (大寺) 를 건설한다. 구다라 강의 서쪽 주민은 百濟大宮을 짓고 동쪽주민은 百濟大寺를 지었다. 639년 12월 百濟川邊에 구중탑을 세웠다. 640년 10월 百濟宮으로 옮겼다. 641년 10월 천황이 백제궁에서 붕어했다. 일본서기에서 이렇게 붕어한 그는 현해탄을 건너 백제 사비성의 의자왕으로 부임한다.
吉備池 廢寺의 발견은 百濟大寺의 소재지를 놓고 논쟁중인 학계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조영시기는 백제대사의 시기와 일치한다. 동시대의 다른 사원을 압도하는 기단의 규모는 국가가 총력을 경주하여 착수한 칙원사에 어울린다. 吉備池 廢寺가 있는 곳은 이와레(磐余)라 불리는 지역이며 5 – 6 세기 야마토 왕권이 궁을 집중적으로 지었던 지역이다. 推古天皇의 豊浦宮 (토요우라노 미야) 부터 飛鳥 (아쓰까)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으로 궁을 옮겨가는데, 서명천황이 백제대사와 백제궁을 다시 磐余 (이와레)에 조영하였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28. 百濟觀音 (Kudara Kannon)

백제관음은 나라현 이까루가쵸의 호류지(法隆寺)가 소장하고 있는 아스까시대의 목조관음보살상이다. “목조관음보살입상 (백제관음) 1구”가 국보로 지정된 정식명칭이다. 길이 210.9 센치의 가늘고 늘씬한 이 불상은 아스까시대 7세기 중반경 제작되었다고 보며 제작자는 밝혀지지 않았다.
1997년 파리의 루브르 미술관에서 백제관음의 특별전시가 이루어졌다. 1997년부터 1999년까지 “프랑스의 야마토의 해”및 “야마토의 프랑스의 해”란 취지로 양국에서 기념행사가 열렸는데 이때 양국의 국보급 미술품 1점씩을 상대국에서 공개하기로 하였다. 이때 야마토에서 “백제관음”, 프랑스에서 우젠느 드라크로와의 대표작 “민중을 인도하는 자유의 여신”이 선택되었다.
백제관음이 루브르 미술관에서 공개되었을 때 불란서에서는 일본의 비너스로 절찬을 받았으며 1개월간 30만이상의 사람들이 찾아왔다. 이 불상은 세계사람들의 눈을 사로잡는 아름다움을 갖고 있는 것이다. 백제관음은 옆에서 보는 모습도 매우 아름다워서 法隆寺에서는 측면에서도 감상할 수 있도록 배치하였다. 일본국내最古급의 부처인 동시에 시공을 초월하여 사람의 혼을 흔드는 최고도의 미를 갖추고있다.

이 녹나무(樟木, 쿠스노끼)로 조각된 불상의 출생은 의문에 쌓여있다. 일본의 대표작으로 뽑혀 루브르 미술관에 보낼 정도로 아름다운 이 불상을 두고 일본사람들이 백제 커넥션을 당연히 거부한다. 이름에 백제가 붙어있긴 하지만 당시의 한반도에는 佛師가 구스노끼를 사용한 예가 없고, 아무래도 일본국내에서 만들어진 듯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아스까의 도읍지에는 백제관음과 같은 타잎의 가늘고 긴 부처는 발견된 게 없다. 이 정도의 천재적인 불사라면 많은 부처를 만들었을 테고, 아무 기록도 남기지 않을 이유가 없다. 도대체 어디서 생겨난 부처일까.
문예평론가 가메이 가쓰이치로 (龜井勝一郞)가 야마토 古寺風物誌에 기록한 감상을 보자.
1937년 나라를 처음 방문하여 여늬 부처의 좌상을 봐도 모두 그렇고 그런 정도의 느낌밖에 없었다. 거대하면 거대할 수록 그런 느낌은 더 했다. 그러나 입상의 아름다움은 언어를 단절하는 매력으로 나를 압도하였다. 특히나 法隆寺 금당에 우뚝 선 백제관음은 불상에 대한 본인의 편견을 일거에 부셔버리고 말았다. 이 미불의 인도에 의해 나는 일보일보 많은 고불을 스쳐 지나갈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슴프레한 어둠속에 그 희미한 체구가 불꽃처럼 똑바로 서있는 모습을 본 순간, 관찰보다는 먼저 합장하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대지에서 피어오른 영원의 불꽃처럼 느껴졌다. 인간의 상이라기 보다 인간의 탑 – 생명의 불꽃이 생동하고있는 탑이었다. 가슴에도 동체에도 사지에도 사실적인 노출같은 것은 없다. 근육도 물론 없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통달한 피안의 체구(體軀), 인간의 가장 아름다운 꿈이라고나 할까.
40 여년전 프랑스의 작가이자 문화상이었던 앙드레 말로가 일본을 보고 돌아가면서 한마디의 소감을 피력하였다. “만약 일본열도가 침몰한다면 나는 한점의 미술품을 가지고 나가겠다. 그것은 호류지(法隆寺)의 백제관음보살상이다.” 목조로 된 이 백제관음은 천의(天衣)자락 휘날리는 몸매와 은은한 미소로 세계최고의 걸작조각품으로 꼽힌다.

이 불상이 언제부터 백제관음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는지 옛 기록이 별로 없다. 백제관음은 그 명칭때문에 종전직후 한국정부가 반환요구한 첫번째 문화재였다. 이에 대해 백제관음의 재질인 구스노끼 (樟木, 녹나무, Campho tree)는 일본특산종으로 한국에서 자생하지 않으므로 백제관음은 한국에서 만들어 진 것이 아니라 일본에서 만들어 진 불상이라는 주장이 일본학자들에 의해 제기되었다.
 녹 나무로 불상을 조각하는 일은 아스까시대에 크게 성행하여 대부분의 아스카 불상이 녹 나무로 밝혀져 녹 나무로 만들어진 불상은 일본에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주장이 정설처럼 되어왔다. 얼핏 들으면 그럴싸 하게 들리지만 한 반도에 녹 나무가 자생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진실이 아니다. 녹 나무는 녹 나무과의 대표적인 수종으로 한 반도의 난대림 즉 상록활엽수림대의 대표적 구성종의 하나이다. 나무전체가 향기를 내며 나무껍질과 뿌리에서 나온 향이 계피향과 비슷하여 옛부터 음식물의 향신료로 쓰였고 고대 이집트 인들은 이 나무의 살균력을 잘 알고 미이라의 방부제로 썼다. 이 나무는 벌레가 생기지 않으므로 가장 이상적인 건축재, 가구, 조각재료로 쓰인다.
호 류지 창건당시인 750년 기록에 이 백제관음에 해당하는 불사의 기록이 없고 11세기 후반에 작성된 금당일기에도 백제관음에 대한 기록이 없다. 호류지의 기록에서 백제관음의 기록이 나타난 것은 에도시대에 들어 훨신 훗날인 겐로쿠(元祿) 11년 (1698) “겐로쿠 호류지 諸堂佛體數量記” 이다. 여기에 “허공장입상, 길이 7척5분”이란 불상높이 기록때문에 백제관음에 해당한다고 추정되고 이것이 백제관음의 존재를 기록한 최고의 문헌으로 본다. 호류지 제당불체수량기는 이 허공장보살을 “백제로부터 도래”라는 글이 보이고 백제관음 대좌 아래에도 허공장 대륜 (虛空藏 臺輪)이라는 글자가 보인다.
이 로써 백제로부터 도래했다는 기록과 함께 백제관음으로 불리게 된 것이라는 것이 한국측 학자들의 주장이다. 메이지 19년 (1886년) 일본정부가 최초로 호류지의 보물조사를 실시한 조사보고서는 이 불상을 반도에서 온 관음으로 판단하여 "조선풍 관음"으로 기록하였다. 최초의 학자들은 국가적인 편견 없이 학자적인 양심으로 보았으나 후일 국수주의적 견해가 주류를 이루게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경향이 있다. 호류지 측은 허공장 보살이란 명칭을 원 하였으나 보살상의 보관(寶冠)에 아미타여래의 화불이 조각되어있어 관음보살로 확인되었다.

29. 부여풍장은 누구일까

서기 665년 9월 23일 당은 백제진장 유덕고(劉德高)와 곽무종(郭務悰)을 일본에 파견했다. 파견원 254명, 7월 24일 쓰시마 도착, 9월 20일 쓰쿠지를 거쳐 9월 22일 표함을 진상했다고 일본서기에 기록되어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당과 신라의 연합군이 663년 백강의 전투에서 백제-왜의 동맹군을 격파한 뒤 승전의 여세를 몰아 일본에 들어 온 점령군이었다. 이들의 최대의 관심은 백제의 마지막 항전의 구심점이었던 풍장왕의 행방이었다.
 백강의 전투중 홀연히 사라져 고구려로 도망갔다고 일본서기에 기록되고 다시 나타나지 않는 인물, 부여풍장은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전범(戰犯)이었다.
敍明 3년 3월 (631년) 백제 의자왕이 왕자 풍장을 인질로 보냈다. 서기의 이 기사는 분명히 엉터리이다. 왜냐하면 631년 백제왕은 무왕이며 의자왕은 641년 즉위하므로 631년 백제 의자왕이 야마토의 敍明天皇에게 왕자 풍장을 인질로 보낼 수는 없다. 왜 이런 기사가 필요하였을까.
이는 역사를 하루하루 일기처럼 기록한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100년 후에 역사를 한꺼번에 기록한다면, 기록자는 후일의 일을 미리 알고 현재의 일을 기록하므로 후일을 알기 때문에 일으킬 수 있는 실수이다. 풍장이 백제왕자로 일본에 인질로 있어야만 훗날 어떤 역할을 무리없이 설명할 수 있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敍明 7년 (635) 쯔루기 연못 (劍池)에 기이한 연꽃이 피었는데 한 줄기에 두 송이의 꽃이더라 (一莖二花). 한 줄기에 두송이의 꽃이란, 원래는 한 사람인데 두 사람의 역할을 하는 일인이역의 배우같은 것일까.

660 년 당 – 신라군이 백제를 멸하자 백제의 잔존세력이 일본에 구원군을 요청하면서 체일중인 왕자풍장을 국주로 맞을 의향을 전해 왔다. 齊明天皇은 661년 (齊明 7년) 1월 6일 九州에 가서 백제부흥군을 진두지휘코자 나니와(難波)를 출항하여 九州를 향하여 서진한다. 1월 8일 오까야마(岡山)시 동남부에 위치한 오호쿠(大伯)에 닿자 오호다황녀 (大田皇女)가 딸을 출산하였으므로 이름을 오호쿠황녀 (大伯皇女)라 지었다. 오호다황녀는 齊明天皇의 손녀이며 황태자 나까노 오호애황자 (中大兄皇子)의 딸이다. 출항한지 이틀만에 출산할 만큼 산월이 가까운 임산부까지 백제원정단에 포함시킨 걸 보면 황실의 구성원은 남녀불문 총 출동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전 쟁준비로 난리통인 九州의 쓰쿠지(筑紫)에서 오호다황녀 (644 – 667)는 663년 두째, 오호즈황자 (大津皇子)를 출산한다. 오호즈(大津)는 오미(近江)의 오호즈가 아니라 쓰쿠지의 나노 오호즈 (娜大津)이다. 661년 첫째 오호쿠황녀, 663년 두째 오호즈황자를 낳은 것이다. 또 우노노 사라라 황녀 (645 – 703, 훗날의 持統天皇)도 662년 쿠사가베황자를 출산한다. 두 여인이 모두 天智天皇의 딸로 형제간인데 동일한 남편, 오호아마황자 (大海皇子)의 아이를 출산한 것이다. 오호아마황자는 훗날의 天武天皇 (622 – 686)이며 天智天皇 (619 – 671)의 동생이다.
나까노 오호애황자 (훗날의 天智天皇)의 동생 오호아마황자 (훗날의 天武天皇)가 이 아이들의 아버지인데 그 무렵 전혀 역사에 나타나지 않고 백제왕자로 적힌 풍장만 쓰쿠지의 전진기지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모습을 드러내는 왕족은 齊明天皇, 나까노 오호애황자, 백제왕자 풍장, 풍장의 숙부 새성 충승 (塞城 忠勝)뿐이다. 새성 충승은 한 사람의 이름으로 새성이란 아명이며 충승이란 어른이 된 뒤 품위를 갖춰 붙인 이름일까? 역사가 명백한 기록을 하고 있지 않지만 충승은 충지(忠志)란 동생이 있으며 두 사람 모두 백제 부흥군으로 주유성에 있다가 패전후 항복했다고 당 나라 기록이 전한다.
일본서기에 야마토의 敍明天皇밑으로 기록된 두명의 동생, 中津王 - 多良王과 동일 인물로 보인다.
그러면 오호아마황자는 일본서기 어디에 등장할까? 敍明 2년 (630) 敍明의 가족소개에서 大海皇子 (오호아마황자, 훗날의 天武天皇)로 등장한다. 다음은 天武 원년 (672)의 자기소개에서 어릴 적 大海人皇子 (오호아마황자)라 했다고 나오는데 이게 전부이다. 그것도 첫번에는 大海, 두번째는 大海人이다. 敍明紀, 皇極紀, 孝德紀, 齊明紀의 629년부터 661년까지 형인 나까노 오호애황자는 대활약을 보인 반면 동생 오호아마황자는 한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런 가운데 661년 오호다황녀가 백제원정단의 뱃길에서 오호쿠황녀를 출산했다. 아이 아빠라는 오호아마황자는 어디에도 보이지않고 왕자풍장과 동행한 백제 구원군의 선상에서 생긴 일이다. 662년 우노노 사라라황녀가 다시 오호아마황자의 아들을 낳고, 663년 오호다황녀가 두째 오호즈황자를 출산한다. 주변에 황실의 남자라고는 풍장뿐이다. 오호아마와 풍장 즉 天武와 豊璋은 한 줄기에 핀 두 송이의 연꽃이었다.
631년 백제의 의자왕이 왕자 풍장을 인질로 보냈다. 이 때 풍장뿐 아니라 풍장의 동생 선광 (善光 후일 禪廣, ? – 692)이 함께 야마토의 아버지, 敍明天皇 옆으로 왔다. 둘 다 敍明과 齊明간에 九州의 나까즈에서 태어 난 아들이다. 풍장이 10세, 선광이 6세정도의 나이였으리라. 선광은 정치보다 종교에 관심이 많았던지 전쟁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백제왕자 신분으로 알려졌기 때문에 당의 유덕고는 그의 신병을 인도할 것을 요구했으나 天智天皇이 완강히 저항하여 선광은 승려로 일생을 보냈다.
당과 일본의 전후처리 협의 과정에 오호아마황자는 그 아이덴티티에 의심을 받지 않았다. 인질이었던 백제왕자 풍장은 자국의 전쟁에 가서 행방불명으로 일본은 그 이상은 모른다고 잡아떼었다. 왕자 풍장과 관련된 사람들은 당의 관리와 대질심문 전에 살해되었으리라. 665년 하시히토 황녀가 죽었는데 667년 2월 어머니인 齊明과 합장하였다. 이 무렵 오호다황녀의 무덤이 곁에 있었다고 하였다. 오호다황녀는 667년 24세로 죽었다.
그 해 3월 수도를 오미(近江)로 옮긴다. 이 때 야마토 지역은 당의 관할지역으로 양도하고 九州에 당의 쓰쿠지 도독부가 설치된다. 일본도 백제처럼 당의 식민통치가 시작된 것이다. 당은 죽은 사람의 무덤까지 확인했는지 제명천황과 간인황녀의 합장이 이 무렵 이루어진다. 제명천황은 전쟁을 명령한 당사자이므로 시체까지 확인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길고 긴 줄다리기 끝에 당과의 전후책임문제가 매듭지어진 후에야 나까노 오호애황자는 천황에 즉위하니 668년 정월이었다.


30. 아스카 문화 <백제 왕흥사와 일본의 法興寺 >

2007 년 10월 24일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부여 왕흥사적의 목탑기초(심초석)부분에서 서기 577년 (위덕왕 24년) 제작되어 수납된 사리장엄구와 각종의 장식품등을 발굴하였으며, 완전한 모습으로 백제의 사리장엄구가 발견된 것은 처음이라고 발표하였다. 왕흥사적목탑은 실재하지않으나 조사결과 가로세로 14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탑이었다. 사리용기에 백제왕의 이름이 각인된 명문이 발견되어 당시 역사의 실상을 알게되었다. ”577년 2월 15일 사거한 왕자를 위하여 백제왕 昌(위덕왕의 실명)이 절을 건립하였다. 사리 2매를 넣었으나 부처님의 가호로 사리가 3개로 되었다. (丁酉年二月 / 十五日百濟 / 王昌爲亡王 / 子立刹本舍 / 利二枚葬時 / 神化爲三).” 이 명문에 의하여 왕흥사적의 사리장엄구는 신라, 백제, 고구려 삼국 가운데 가장 오랜 것이며, 왕흥사는 삼국사기에 기록된 서기 600년이 아니라 577년 창건되었다는 것, 위덕왕에게는 일본서기에 기록된 아좌태자 이외로 577년경 사망한 다른 왕자가 있었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백제시대 왕흥사는 사비성이 있는 부소산에서 봐서 금강 건너편 대안의 울성산(131미터) 산록에 건축되었다. 삼국사기는 왕훙사 창건의 내력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무왕 2년 (600) 정월 왕흥사 창건착수하여 무왕 35년 (634) 2월 낙성되다. 절은 강변에 붙었고 채색장려하다. 왕은 항상 배에 타고 절에 들어가 분향한다.

현재의 일본 아스까데라(飛鳥寺)는 아스까촌 (明日香村)의 넓지않은 경내에 安居院이라는 조그만 전당과 상처투성이 大佛의 초라한 모습으로 남아있다. 아스까데라의 전신인 호꼬지(法興寺)는 당시의 숭불파였던 소가노 우마꼬 (蘇我馬子)가 用明천황 2년 (587)의 발원에 의하여 세워진 소가씨의 사원이다. 소가씨는 587년 배불파의 모노노베노 모리야 (物部守屋)와의 전쟁에 앞서 싸움에 이기면 불사를 건립하겠다고 서원한 바 있어 승전후 아스까의 마가미노 하라 (眞神原)에 절을 짓기로 하였다. 崇峻天皇 원년 (588) 백제왕에게 法師와 工匠의 파견
을 부탁한 바, 백제에서 승려, 사리, 목수, 주물기술자, 기와기술자, 화공이 헌상되었다. 또 여승을 백제에 보내 법을 배워 오도록 하였다. 592년 法興寺의 불당과 보곽공사를 시작하다. 593년 推古天皇 원년 탑의 심초에 사리가 안치되고 심주가 세워지기 시작했다. 596년 8년만에 아스까데라의 낙성식이 있었다. 아스까데라는 탑을 세개의 금당으로 둘러 싼 일탑

삼금당 양식의 가람배치였다. 이 일탑삼금당의 가람배치는 四天王寺식이나 法隆寺식과 다른, 유례가 없는 독특한 양식으로, 그보다 약 1세기 먼저 조성된 고구려의 금강사(金剛寺) 사지인 청암리 사지와 같은 양식으로 알려져 왔다.
을사의 변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한 나까노 오호애황자와 나까토미 가마타리의 초대면이 이 절에서 이루어졌고, 645년 소가노 이루까를 암살한 혁명군은 이 절에 군영을 설치하고 甘樫丘 (아마까시노 오까)에 웅거하고 있던 소가노 에미시 (소가노 이루까의 부친)를 압박하였다.

2008년 4월 16일 일본 아사히신문은 일본에서 가장 오래 된 절로 알려진 나라의 아스까데라의 원형은 부여 왕흥사일 가능성이 높다는 기사를 내 보냈다. 신문은 와세다 대학의 오호하시 가츠아끼 (大橋一章)교수등 일본연구팀이 금월 초 부여 왕흥사유적지를 조사한 결과 거기서 출토된 기와의 문양과 탑의 구조등이 아스까데라의 유물과 거의 일치함을 밝혔다. 오호하시교수는 두 절이 동일한 기술자에 의해 창건되었다는데 이견이 없다고 말했다. 아스카데라는 일본유일의 1탑3금당식이다. 왕흥사는 탑과 금당, 강당이 일직선으로 연결된 사천왕사식으로 보이나 회랑의 동서에 있는 부속건물이 후일, 아스카데라를 지을 때 금당으로 변경되었을 것으로 신문은 전했다. 함께 연구에 참가한 국학원대학의 鈴木靖民 (스즈끼 야스타미 ) 교수는 아스카데라 창건은 백제왕과 왜왕간의 활발한 교류를 의미하며 역사서에 당시 권력자였던 소가노 우마꼬가 낙성식에서 백제의 의복을 입고 참렬했다는 기록이 있다고 설명했다. (지금까지 이 연재기사를 읽어 온 독자들은 이때 백제와 야마토가 한 나라였다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소가노 우마꼬가 백제 옷을 입었다는 것은 전혀 놀라운 사실이 아니다. – 저자 주)

2008년 11월 중순 동경 국학원대학에서 백제 왕흥사유적 관련 심포지움이 열렸다. 2007년의 발굴조사 결과 일본最古의 사원 아스카데라와 왕흥사의 가람배치에 유사점이 눈에 띄어 연구자를 크게 자극하였다. 지난 반세기동안 아스카데라의 원류는 고구려 평양의 청암리(淸岩里) 사지 (寺址)라고 믿어왔다. 그러나 이번 심포지움에서 놀라운 사실이 발표되었다. 한국 문화재청의 김용민 발굴조사과장의 보고에 의하면 왕흥사와 마찬가지로 백제의 고도 부여에서 발굴이 진행되고 있는 정림사(定林寺)와 능산리사 (陵山里寺) 두개의 사원에서 금당

의 동서로 긴 건물이 있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이제까지 탑과 금당이 일직선으로 늘어선 사
천왕사식으로 보아왔으나 이로써 왕흥사와 닮은 구조라는 것을 알게되었다. 서울의 국립중앙박물관의 이병호학예원은 “왕흥사만이 특별한 구조를 가진게 아니라 백제에는 사천왕사식과 다른 독자의 가람배치가 있었다”고 한다. 능산리사는 강당의 양 옆구리에도 건물이 부속되는 등 세부는 다르나 백제식이라는 호칭명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2008년 12월 4일 아사히신문 문화면 기사)
여기에서 1탑3금당이니 하는 가람배치 용어가 나오는데 설명이 필요하다. 사찰하면 부처님을 모신 대웅전을 떠 올리게 되는데 사찰의 기본은 대웅전이 아니라 탑이다. 원래 사찰의 가장 본질적인 경배의 중심은 대웅전 밖에 호젓이 서 있는 탑 구조물이다. 탑(Stupa)이란 인도의 초기 불교에서 부처님의 무덤을 의미하며 부처의 사리를 나누어 수납했던 곳이다. 이렇게 초기불교에서 탑(Stupa) 중심구조였던 것이 세월이 흐르면서 불상중심구조로 변화하므로 탑과 금당이 어떤 구조를 이루고 있느냐 하는 것은 사찰의 역사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초기 불교에는 불교의 무아론(無我論)의 근본취지에 어긋나지 않도록 아이콘적인 구체형상으로서 부처를 기념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따라서 기독교와는 전혀 다른 의도로 불교에서는 우상숭배를 허용하지 않은 것이다. 대웅전에 안치된 금빛찬란한 오늘날의 부처님의 형상은 훨신 후대에 대승불교운동과 함께 출현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시대에 따라 탑과 금당의 배치관계에 변화를 수반하므로 불교사학자들에게 가람의 배치는 매우 중요한 정보이다.

정 림사는 왕궁에서 연장된 대로에 면한 부여의 상징, 능산리사는 왕가의 능묘를 수호하는 절이었다 하며 왕흥사보다 앞 서 서기 567년 지어졌다. 성왕이 538년 사비성으로 천도한 뒤 성왕의 아들 위덕왕 시절 사비성은 사찰건립의 망치소리가 그치지 않았으리라. 요새 말로 하면 백제에서 사비성 천도와 함께 시작된 건설붐이 推古天皇 시대 아스카(飛鳥)의 건설붐으로 이어진다. 이 시대의 백제와 일본관계를 근대국가의 외교관계처럼 이해하면 안 된다. 백제 성왕의 장자가 위덕왕 (일본에서 야타노 다마까스노 오호애황자)으로 사비성 사찰건립의 주체였고, 일본의 敏達, 用明, 崇峻, 推古天皇이 위덕왕의 동생들이다. 위덕왕은 부왕의 비극적인 죽음에 대하여 평생 죄책감을 갖고 살았고 부처님에 의지하여 부왕의 극락왕생을 기원하였다. 그는 일본의 동생들에게도 부왕의 명복을 기원하도록 독려하고 사찰건립을 지원하였다. 그의 뜻을 받들어 그의 동생들 , 조카들(聖德太子), 손주(敍明天皇)들이 불법을 일으키고(法興), 불법을 융성하게 하고 (法隆), 불법을 널리 퍼뜨린(廣隆) 결과가 호꼬지(法興寺), 호류지(法隆寺), 고류지 (廣隆寺)등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백 제 사비성에서 터득한 대형사찰 건축및 불상제작의 노하우는 당시 일본의 사찰을 건립하는데 그데로 전해 졌다. 백제의 첨단 건축기술이 채용된 첫 번째 사례가 아스카데라였다. 아스카데라는 일본에 처음 등장한 기와지붕이었으며 그 기둥이 주춧돌위에 세워진 첫번째 건물이었다. 백제에서 건너간 기술자들은 아예 가족을 데리고 거기서 살게 되었으니 일본의 아스까 문화란 백제의 문화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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