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이집트 과학과 그리스 과학
서양학자들은 유럽과학이 그리스의 전통을 이었으며 따라서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 과학과는 별 관계가 없다고 주장한다. 오리엔트 지역의 과학은 실용적인 수준에 머물렀으므로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면에서 그리스 과학보다 한참 뒤떨어진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인들이 자연을 발견한 최초의 과학자이며 탈레스가 최초의 철학자-과학자라고 주장한다.
이렇게 오리엔트 과학을 과소평가하는 것은 그리스와 오리엔트 세계를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근대 헬레니즘적 사고의 영향이 아직도 크게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 과학도 외부의 영향을 받지 않은 독자적인 성취로 보려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 시대에 와서 과학이 더 정교하게 발전한 것은 사실이라고 해도 그것은 오리엔트의 영향, 특히 이집트의 영향을 배제하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또 오리엔트 과학은 서양학자들이 일반적으로 주장하는 것보다 훨씬 높은 수준에 있다.
실제로 많은 그리스인들이 이집트에 가서 과학을 배워왔다. 기원전 6세기의 자연철학자인 탈레스는 이집트에 가서 그 사제에게 철학을 배웠고 기하학을 들여왔다. 또 그는 피타고라스에게 이집트에 가서 멤피스와 테베의 사제에게 수학을 배우라고 강력하게 권고한 사람이다.
기원전 5세기 천문학자인 오에노피데스나, 천체 운동을 최초로 수학적으로 체계화한 것으로 알려진 기원전 4세기의 에우도수스는 모두 이집트 사제들에게서 천문학을 배워 온 사람들이다. 히포크라테스의 의학도 아스클레피우스와 그 뱀에 대한 종교적 신앙이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데 이는 분명히 이집트적 기원이다.
고전 그리스 시대의 과학의 중심지는 그리스 본토가 아니라 이집트와 지리적으로 가까운 이오니아 지역이다. 또 헬레니즘적 시대의 과학 중심지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였는데 그것은 이 시기의 과학에 이집트적 전통이 매우 강하게 작용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그리스 본토의 과학수준이 높았더라면 멀리 떨어져 있는 알렉산드리아까지 그 중심지가 옮겨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집트 과학의 수준도 매우 높다. 수학만을 살펴보자. 수학에서는 산술학, 대수학, 기하학, 삼각법이 다 발전했으나 가장 중요한 것은 산술학이었다. 서기(書記)는 호수를 파고, 경사면을 만들고, 오벨리스크를 옮기고, 거상을 세우고, 군대를 보급하는데 필요한 계산법을 배워야 했다.
기원전 16세기의 린드 파피루스에 의하면 이집트인은 10진법 위에서 덧셈, 뺄셈, 곱셈, 나눗셈과 함께 분수를 사용했으며 원주율을 3.16으로 계산했다. 그리고 원통형 곡물저장고의 밑부분 반지름과 높이를 알 때 그 부피를 구하는 방법이나, 사각형안에 내접하는 원의 면적 구하기 같은 방법을 알고 있었다. 또 다른 파피루스에 의하면 윗부분을 잘라낸 피라미드의 부피를 계산하는 방법도 알고 있었다. 건축을 할 때의 길이 측정단위는 1밀리미터 수준의 정확성을 보이고 있다.
지금 남아 있는 수학 파피루스들은 실용적인 목적에 사용하는 교본과 같은 것이므로 그것을 통해 이집트 수학의 이론적인 측면을 잘 알기는 어렵다. 그러나 지금 남아 있는 것만으로도 그것이 상당히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수준에 올랐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따라서 그것을 단순히 실용적인 것만으로 폄하하는 것은 편견의 산물로 생각된다.
이슬람 과학
이슬람 과학은 과학사에서 매우 독자적이고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것은 이슬람 사회가 안정된 8세기 중반부터 그리스와 헬레니즘적 철학과 과학의 성과를 받아들이며 본격적으로 발전했다. 바그다드를 중심으로 많은 그리스어 책들이 아랍어로 번역되었고 그 바탕 위에 인도의 천문학과 수학을 받아들이며 독창적인 수준으로 발전했다.
스페인에서 페르시아에 이르기까지 지역에 따라 다르기는 하나 15, 16세기까지 활력을 유지한 곳도 있다. 기하학을 개선했고 대수학을 한층 높은 수준으로 발전시켰다. 관측에 큰 비중을 둔 천문학은 프톨레마이오스의 행성 이론 안에서 더 정교해졌다. 광학도 발전했고 아르키메데스의 전통을 이은 수학적 물리학도 발전했다. 연금술의 발전도 물질의 성질을 이해하게 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약학, 의학도 마찬가지이다.
이슬람 세계는 제도 면에서도 과학발전에 기여했다. 병원과 공공도서관, 마드라사라는 종교교육기관, 천문대가 그것이다. 도서관 가운데에는 수십만 권의 장서를 보유한 곳도 있었다. 유럽의 중세대학은 마드라사를 본 따서 만들어진 것이다.
유럽 과학은 12, 13세기에 라틴어 번역을 통해 아랍어로 된 그리스, 헬레니즘적 과학과 이슬람 과학을 받아들이며 그 기초를 마련했다. 이는 15세기의 르네상스 인문주의 운동을 통해 더 확장되었다. 실제로 16, 17세기 유럽과학의 발전은 이슬람 과학 없이는 잘 설명하기 힘들다.
뉴턴도 열심히 한 광학 연구는 이슬람 광학 연구의 전통을 잇는 것이고 연금술도 마찬가지이다. 11세기의 이슬람 약학자인 이븐 시나(라틴 이름은 아비켄나)는 16세기까지도 유럽의 의학이나 약학에서 권위를 유지하고 추앙을 받았다. 그래서 앞에서 말한 이탈리아의 해부학자 베살리우스도 '그리스인과 마찬가지로 아랍인도 우리에게 매우 친숙하다'고 말하고 있을 정도이다.
천문학 분야도 마찬가지이다. 코페르니쿠스와 이슬람 천문학도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서양학자들은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이 유럽에서 독자적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주장하나 이는 미심쩍다. 14세기 다마스커스의 천문학자인 이븐 알-샤티르라는 사람의 책에서 나온 달의 운행 모델이 코페르니쿠스의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에 나오는 그림과 똑 같기 때문이다.
또 13세기의 알-투시가 행성운동을 설명하기 위해 고안한 소위 '투시 커플' 그림과, 같은 문제를 다룬 코페르니쿠스의 그림도 거의 비슷하다. 코페르니쿠스는 이에 대해 이무 이야기도 하지 않고 있으나 표절 수준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이런 사실은 이미 1950년대에 밝혀졌는데 서양학자들은 아직도 이를 잘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유럽과학의 독자성을 주장하기 위해서이다.
실제로 이슬람 과학은 16세기는 물론 17세기 초까지도 유럽에 많은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이 시기에 오면 고대 그리스 고전들은 이미 낡았고 중세 유럽 지식들은 상대적으로 낮은 수준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럽인들은 과거에 라틴어 번역에 의존하던 것과는 달리 아랍어를 배워 아랍어 원전을 직접 연구했다.
16세기 말에 시리아의 한 고위 성직자가 이탈리아로 정치적 망명을 했는데 그는 많은 아랍책을 갖고 왔고 과학책도 꽤 섞여 있었다. 그가 가져온 책들 가운데 이슬람권에서 연구된 <유클리드 기하학> 등 상당한 숫자가 아랍어 판본 그대로 출판되었다. 많게는 3천부까지 찍어냈는데 사업이 수지를 맞출 수 있을 정도였다. 당시에 그만큼 아랍 책에 대한 수요가 많았다는 이야기이다.
이슬람과학에 대한 연구는 아직 매우 부족하여 그 전모를 잘 알기 어렵다. 또 17세기 이후 이슬람 과학이 왜 쇠퇴하게 되었는지는 아직도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종교와 과학의 마찰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으나 그러면 그 전에는 왜 종교와 과학의 마찰이 없었는지 설명하기가 어렵다. 더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서양학자들은 유럽과학이 그리스의 전통을 이었으며 따라서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 과학과는 별 관계가 없다고 주장한다. 오리엔트 지역의 과학은 실용적인 수준에 머물렀으므로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면에서 그리스 과학보다 한참 뒤떨어진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인들이 자연을 발견한 최초의 과학자이며 탈레스가 최초의 철학자-과학자라고 주장한다.
이렇게 오리엔트 과학을 과소평가하는 것은 그리스와 오리엔트 세계를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근대 헬레니즘적 사고의 영향이 아직도 크게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 과학도 외부의 영향을 받지 않은 독자적인 성취로 보려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 시대에 와서 과학이 더 정교하게 발전한 것은 사실이라고 해도 그것은 오리엔트의 영향, 특히 이집트의 영향을 배제하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또 오리엔트 과학은 서양학자들이 일반적으로 주장하는 것보다 훨씬 높은 수준에 있다.
실제로 많은 그리스인들이 이집트에 가서 과학을 배워왔다. 기원전 6세기의 자연철학자인 탈레스는 이집트에 가서 그 사제에게 철학을 배웠고 기하학을 들여왔다. 또 그는 피타고라스에게 이집트에 가서 멤피스와 테베의 사제에게 수학을 배우라고 강력하게 권고한 사람이다.
기원전 5세기 천문학자인 오에노피데스나, 천체 운동을 최초로 수학적으로 체계화한 것으로 알려진 기원전 4세기의 에우도수스는 모두 이집트 사제들에게서 천문학을 배워 온 사람들이다. 히포크라테스의 의학도 아스클레피우스와 그 뱀에 대한 종교적 신앙이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데 이는 분명히 이집트적 기원이다.
고전 그리스 시대의 과학의 중심지는 그리스 본토가 아니라 이집트와 지리적으로 가까운 이오니아 지역이다. 또 헬레니즘적 시대의 과학 중심지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였는데 그것은 이 시기의 과학에 이집트적 전통이 매우 강하게 작용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그리스 본토의 과학수준이 높았더라면 멀리 떨어져 있는 알렉산드리아까지 그 중심지가 옮겨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집트 과학의 수준도 매우 높다. 수학만을 살펴보자. 수학에서는 산술학, 대수학, 기하학, 삼각법이 다 발전했으나 가장 중요한 것은 산술학이었다. 서기(書記)는 호수를 파고, 경사면을 만들고, 오벨리스크를 옮기고, 거상을 세우고, 군대를 보급하는데 필요한 계산법을 배워야 했다.
기원전 16세기의 린드 파피루스에 의하면 이집트인은 10진법 위에서 덧셈, 뺄셈, 곱셈, 나눗셈과 함께 분수를 사용했으며 원주율을 3.16으로 계산했다. 그리고 원통형 곡물저장고의 밑부분 반지름과 높이를 알 때 그 부피를 구하는 방법이나, 사각형안에 내접하는 원의 면적 구하기 같은 방법을 알고 있었다. 또 다른 파피루스에 의하면 윗부분을 잘라낸 피라미드의 부피를 계산하는 방법도 알고 있었다. 건축을 할 때의 길이 측정단위는 1밀리미터 수준의 정확성을 보이고 있다.
지금 남아 있는 수학 파피루스들은 실용적인 목적에 사용하는 교본과 같은 것이므로 그것을 통해 이집트 수학의 이론적인 측면을 잘 알기는 어렵다. 그러나 지금 남아 있는 것만으로도 그것이 상당히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수준에 올랐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따라서 그것을 단순히 실용적인 것만으로 폄하하는 것은 편견의 산물로 생각된다.
이슬람 과학
이슬람 과학은 과학사에서 매우 독자적이고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것은 이슬람 사회가 안정된 8세기 중반부터 그리스와 헬레니즘적 철학과 과학의 성과를 받아들이며 본격적으로 발전했다. 바그다드를 중심으로 많은 그리스어 책들이 아랍어로 번역되었고 그 바탕 위에 인도의 천문학과 수학을 받아들이며 독창적인 수준으로 발전했다.
스페인에서 페르시아에 이르기까지 지역에 따라 다르기는 하나 15, 16세기까지 활력을 유지한 곳도 있다. 기하학을 개선했고 대수학을 한층 높은 수준으로 발전시켰다. 관측에 큰 비중을 둔 천문학은 프톨레마이오스의 행성 이론 안에서 더 정교해졌다. 광학도 발전했고 아르키메데스의 전통을 이은 수학적 물리학도 발전했다. 연금술의 발전도 물질의 성질을 이해하게 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약학, 의학도 마찬가지이다.
이슬람 세계는 제도 면에서도 과학발전에 기여했다. 병원과 공공도서관, 마드라사라는 종교교육기관, 천문대가 그것이다. 도서관 가운데에는 수십만 권의 장서를 보유한 곳도 있었다. 유럽의 중세대학은 마드라사를 본 따서 만들어진 것이다.
유럽 과학은 12, 13세기에 라틴어 번역을 통해 아랍어로 된 그리스, 헬레니즘적 과학과 이슬람 과학을 받아들이며 그 기초를 마련했다. 이는 15세기의 르네상스 인문주의 운동을 통해 더 확장되었다. 실제로 16, 17세기 유럽과학의 발전은 이슬람 과학 없이는 잘 설명하기 힘들다.
뉴턴도 열심히 한 광학 연구는 이슬람 광학 연구의 전통을 잇는 것이고 연금술도 마찬가지이다. 11세기의 이슬람 약학자인 이븐 시나(라틴 이름은 아비켄나)는 16세기까지도 유럽의 의학이나 약학에서 권위를 유지하고 추앙을 받았다. 그래서 앞에서 말한 이탈리아의 해부학자 베살리우스도 '그리스인과 마찬가지로 아랍인도 우리에게 매우 친숙하다'고 말하고 있을 정도이다.
천문학 분야도 마찬가지이다. 코페르니쿠스와 이슬람 천문학도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서양학자들은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이 유럽에서 독자적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주장하나 이는 미심쩍다. 14세기 다마스커스의 천문학자인 이븐 알-샤티르라는 사람의 책에서 나온 달의 운행 모델이 코페르니쿠스의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에 나오는 그림과 똑 같기 때문이다.
또 13세기의 알-투시가 행성운동을 설명하기 위해 고안한 소위 '투시 커플' 그림과, 같은 문제를 다룬 코페르니쿠스의 그림도 거의 비슷하다. 코페르니쿠스는 이에 대해 이무 이야기도 하지 않고 있으나 표절 수준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이런 사실은 이미 1950년대에 밝혀졌는데 서양학자들은 아직도 이를 잘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유럽과학의 독자성을 주장하기 위해서이다.
실제로 이슬람 과학은 16세기는 물론 17세기 초까지도 유럽에 많은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이 시기에 오면 고대 그리스 고전들은 이미 낡았고 중세 유럽 지식들은 상대적으로 낮은 수준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럽인들은 과거에 라틴어 번역에 의존하던 것과는 달리 아랍어를 배워 아랍어 원전을 직접 연구했다.
16세기 말에 시리아의 한 고위 성직자가 이탈리아로 정치적 망명을 했는데 그는 많은 아랍책을 갖고 왔고 과학책도 꽤 섞여 있었다. 그가 가져온 책들 가운데 이슬람권에서 연구된 <유클리드 기하학> 등 상당한 숫자가 아랍어 판본 그대로 출판되었다. 많게는 3천부까지 찍어냈는데 사업이 수지를 맞출 수 있을 정도였다. 당시에 그만큼 아랍 책에 대한 수요가 많았다는 이야기이다.
이슬람과학에 대한 연구는 아직 매우 부족하여 그 전모를 잘 알기 어렵다. 또 17세기 이후 이슬람 과학이 왜 쇠퇴하게 되었는지는 아직도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종교와 과학의 마찰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으나 그러면 그 전에는 왜 종교와 과학의 마찰이 없었는지 설명하기가 어렵다. 더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http://m.pressian.com/section_view.html?no=55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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