콤네누스조 시기 로마빠 발굴 - 원수정 로마빠만 문제가 아니다
로마사 |2013.01.14 11:00
로마인 이야기만 무비판적으로 어설프게 읽어서 주화입마 걸려 원수정 로마빠 되신 분들은
그래도 이해는 합니다.
원수정 1~2세기 로마 하악하악....카이사르 하악하악...이건 서구에서도 극복할 때까지
몇 백년이 걸렸으니까요.
근데 희한하게도 후기 로마 제국 중 11~13세기 시대, 즉 콤네누스 왕조 로마에 대한 빠가 되어
그전 테마 제도, 즉 6~10세기 로마는 무조건 폄하하는 이상한 사람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이로써 비이성적인 빠는 구태여 특정 시기에 국한되지 않음을 발견했었는데, 일단,
그 이상한 논리 구조에 대해서는 반드시 조명이 필요할 것 같아, 다른 곳에서 벌어진
논쟁을 약간 다듬어서 가져와 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읽을 시간 없는 분들을 위해 사전 요약하자면,
이 사람은 야전에서 승리한 적이 없으면 무조건 캐허접이란 소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럼 수당을 막아낸 고구려도 캐허접이고, 당신 그렇게 무시하는 테마 제도 로마도 야전에서 제대로 이겨본 적 없는 불가리아 제국도 캐허접이냐? 했더니 거기에 대해선 답변을 회피.
..........
에효. 참, 차라리 기독교 때문에 로마가 망했다는 드립질이 더 논리적으로 보인다. -_-
시작합니다.
콤네노스빠>
테마군대가 이슬람 제국의 정복을 막았다기 보다는 이슬람측에 정복의사(아나톨리아)가 없었다고 보는 편이 더 타당하지 않나 싶습니다.
비잔티움이 야전에서 이슬람군을 격파한 사례가 거의 없을 뿐더러, 테오필로스 황제 통치기에는 칼리프 알 마문이 기존의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목표로 한 참수전략을 변경하여 국경지대를 초토화 시킨 후 알박이를 하며 전진하는 신전략을 채택했을 때 로마 제국은 칼리프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이슬람군이 철수할 때까지는 별다른 저항을 하지 못했지요.
마법의활>
8세기에 있어서 테마 제도가 도입되면서 이슬람의 정복 속도가 늦어졌고 현격한 자원의 격차에도 불구하고 결국 비잔티움은 방어에 성공한 건 FACT입니다. 또한 야전을 말씀하시는데, 그리 따지면 뭐 고구려는 당에 대해서 얼마나 야전에서 이긴 사례가 있는가?
생각보다 별로 없습니다. 불가리아 제국도 정작 비잔티움에 대한 야전 승리는 생각보다 적습니다.
그랬다고 그 나라들이 제대로 못 싸웠고 그들의 방어 체계가 영 부족했다는 견해가 나올 수 없는 것처럼, 이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어떤 제도가 늘상 항시 효율을 발휘할 수는 없는 것이며 그 자랑의 2세기 로마 제국도, 그리고 완전히 군국주의 국가를 방불케 하는
그 엄혹한 디오클레티아누스 테트라키아 로마 제국도 방어 체계가 무너져서 야만족들이나 페르시아인들에게 쪽팔린 손실을 겪은 적이 없는 게 아닙니다.
"정복 의사가 없는 것"자체가, 해봐야 손해만 나니까 못하는 거지 그냥 귀찮아서 안 하는 게 아니죠. 그럼 게르만족과 사산조도 그냥 "정복 의사"가 없어서
정복을 안한 것일까요? 여담이지만 이란의 자린쿠 교수가 이런 주장을 하니까, 대번에 서구 학자들이 "민족주의적 서술"을 한다고 낙인을 찍더군요.
콤네노스빠>
모든 제도가 완벽히 기능할 수는 없지만 적국의 군대가 제국의 영토를 제집 드나들듯하며 약탈하며 이에 대응하지 못하는 현상은 전 시대에는 찾기 어려운 현상이며 전술능력이나 기강또한 그러했습니다.
'귀찮아서' 정복 안 했다고 한 적 없습니다. 앞서 말씀드렸지만 테마제가 침략저지의 핵심요소가 아니며 이슬람 제국의 전략목표가 소아시아의 정복에 있지 않음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마법의활>
"테마 제도가 완성되던 시기"는 없습니다. 다만 테마 제도가 현실에 맞게 바뀐 여러 시기가 있을 뿐. 그리고 말씀하시는 그 사례는 테오필루스의 개편이 이뤄지기 전이라 별반 효과적인 사례가 되지 않습니다.
"방위 체계의 기본 원리"가 동일했으나 "시대적 상황"이 다르기 떄문에 "그 시대를 기준으로 앞선 시대에 대한 평가"는 가능해지지 않으며, 어디까지나 그 시대는 그 시대에 일어난 일을 기준으로 평가해야 합니다.
또한, 콤네노스님이 내놓으시는 "지방군의 구체적인 대응"이란 건 늘. 못싸우거나 패배한 사례만 늘어놓으시는 아주 편향된 취사선택된 사례기 때문에 타당성이 몹시 부족합니다.
님은 콤네누스조에 대해 심한 애호를 하는 나머지 그전 테마 제도 자체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사례만 아주 편향적으로 취하고 있습니다. 이는 다른 쪽들의 사례도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에 별로 설득력이 없습니다.
"테마 제도 도입과 이슬람군의 정복 속도가 늦춰진 사실"은 "시간적 근접성"이 있는 게 아니라 그냥 "시간적으로 일치"합니다. 몇 백 년 동안의 경과로 검증된 것인데 그걸 그렇게 "불충분하다고"함부로 결론을 내리는 근거는 도데체 어디에 있을까요?
그냥 "칼리프국이 그럴 의사가 없어서다"라고 한다면 이것같이 "불충분"한 섵부른 판단이 있을 수 없습니다.
칼리프국의 영구적 정복 시도가 없었고 혹은 하더라도 콘스탄티노폴리스만 노렸던 것은, 테마 제도 탓에 아나톨리아에서의 정복이 불가능함을 깨달았기 때문으로 풀이됩니다. 말따나마 그렇게도 병사 개개인 전투력이 형편 없었는데 진군 속도가 늦춰졌다면?
그건 제도에서 이유를 찾을 수 밖에 없습니다.
또한,
그렇게 못싸운 사례와 전과만 취사 선택하는 편향적인 관점을 취하면 세계 어디에 당나라 군대 아닌 데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적국의 군대가 제국 영토를 제집 드나들듯 약탈하여 이에 대응하지 못하는 현상"은 전 시대에도 있었습니다만?
그 유스티니아누스 때는 그런 일이 없었는가? 디오클레티아누스 때는? 콘스탄티누스 때는 그런 일이 없었나? 콘스탄티누스 부친인 콘스탄티우스도 야만족들에게 여러 차례 위기를 맞을 뻔한 일이 있었습니다만? 그리고 콤네누스들 때는? 님 관점대로 못 싸운 사례, 뚫린 사례만 강조하면 제국이 진작 망했을 것처럼 여겨집니다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테마 제도가 그렇게나 비효율적이었다면 어떻게 7세기 중반부터 10세기 중반까지 300년을 버틸 수 있었겠습니까?
. 콤네노스님은 어떤 패배나 방어선이 뚫리는 현상은 못 싸운 사례만 들어 죄다 테마 제도가 있었을 때에만 연관짓고 다른 때에는 그런 일이 없었다는 결론을 억지로 내리시지만 이런 식의 편향된 사례 늘어놓기는 아무 짝에 쓸데가 없습니다.
클라우제비츠도 때문에 전쟁론에서 사례 서로 들이밀기 게임 같이 부질없는 게 없다고 말했던 거고요. 님은 늘 그렇듯 콤네누스 왕조에 대한 변호가 지나친 나머지 그 전 테마 시기에 대한 지나친 폄하로 일관하시는 데, 이런 주장은 콤네누스들이 테마 제도를 실행할 수 없었던 정황에 대한 방어적인 논증에나 효과가 있지 실제로 이슬람을 막는 데 효과를 발휘한 게 입증되는 그 전 시기와는 별 무관합니다. 같은 식으로 하면 어디 콤네누스조의 쪽팔린 사례는 없을까요?
마누엘 사후에서 1204년 함락 때까지 사례를 들어 콤네누스조의 군대가 영 제기능도 발휘하지 못했고 제국이 그때처럼 약탈을 심하게 당한 데다가 군인들 전투력도 바실리우스 2세만 못했다.....라고 누가 말한다면?
그리고 그도 "마누엘 사후의 시기는 콤네누스조의 군사 제도가 완성되어 있는 시기며
투르크의 다양한 전략과 한계, 그에 대한 제국의 구체적 대응을 살펴볼 수 있는 시기입니다.
본문의 시대에 지방군이 침략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대응했는지 알 수 없다면 뒷시대의 유사한 사례를 근거로한 평가를 할 수 있으며...."라고 말한다면?
미리오케팔론 전투의 예로 알렉시우스 1세의 로마군까지 저평가한다면? 솔직히 제가 쓰면서도 어처구니가 없지만 님도 곰곰히 생각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콤네노스빠>
테마군대가 구사하여 큰 효과를 냈다는 '그림자 전법'은 10세기에 운용된 것으로 통일된 거대 이슬람 제국의 정복전쟁을 전제로 한 것이 아니라 중소세력인 함단조의 중,소규모의 약탈전쟁에 대한 대비책이었으며, 해당 전법을 정리한 저자(니케포로스2세와 그의 동생 레온 포카스와 군생활을 같이 했던 장교로 추정됨)도 약탈원정과 대규모 침략전쟁을 구별하여 후자의 경우에는 똑같이 맞받아 치도록 적고 있습니다.
따라서 해당 전략을 그대로 과거 이슬람 제국의 대규모 정복활동에 연관시키기에는 어려움이 있으며, 설령 이 전법이 효과가 있었다 하더라도 이러한 전략운용은 테마군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하드리아노폴리스 패전 이후 로마군의 전략이 그러했으며, 11세기 중반 페체네그 전쟁시에도 로마군은 이를 택한 바 있습니다. '그림자 전법'의 운용은 군의 배치와 운용방법을 변경함으로써 얼마든지 구사할 수 있는 것으로서 테마군만의 특질이라 보기는 어렵습니다.
또한 테마군의 비상비군적 성격과 지역적 분산으로 인하여 일정규모 이상의 침공에 대해서는 지휘관의 속임수와 임기응변이 요구되었습니다.
그리고 테오필로스의 시기는 테마의 발전단계에서 후기에 위치하고(완성되던, 이란 말은 이런 맥락에서 썼습니다..), 정국이 안정되어 국력이 지난 시기보다는 강해졌지만 칼리프국에 비해서는 여전히 현저히 열세에 놓여있던 시기로 기본적 정황은 비슷한데 무엇이 문제라는 것입니까.
따라서 이 현상은 테마제의 도입이 아닌 아나톨리아의 물과 식량부족, 그리고 혹독한 기후에 기인하였다 보아야 합니다.
제가 제시한 사례들이 편향되어 의미가 없다고 하시는데, 로마군이 잘 싸운 경우는 뒤통수치기, 기습, 콘스탄티노폴리스 삼중성벽과 그리스의 불을 이용한 승리 정도에 국한되며, 보통은 칼리프가 대군을 이끌고 진군하면 강화조약 체결에 급급하였고 이것이 이시대 양국 군사관계의 기본양태입니다.
그리고 제가 언제 테마제가 있을 때만 국경선이 뚫렸다고 했습니까? 단지 테마군이 침략군을 격퇴하는데 효과적이지 않다는 겁니다.
지금까지 한 얘기가 그 얘기구요. 테마제 도입이 이슬람군의 침략저지에 핵심역할을 했다는 점에 대한 근거로서 '시간적 일치나 연관성'만으로는 너무나 부족하며 테마제의 작용과 이슬람 진격의 저지간의구체적 관계의 제시가 필요합니다. 이 부분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이 주장은 의미가 없습니다.
마법의활>
님처럼 극도로 편향적인 자료 취사 선택을 하면,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 패배의 결과로 그 백 년 전의 게르만족을 성공적으로 막았던 프로부스나 페르시아를 성공적으로 막았던 카루스-디오클레티아누스 군대를 폄하하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물론 당연히 이런 소리는 헛소리죠.
로마군 군제는 그 시기를 거쳐서도 계속 변했고 "정황"도 달랐으며, 테마 제도도 마찬가지 때문입니다. 편파적으로 자료 취사 선택하는 운운을 넘어서, 님은 이렇게 분명한 인과 관계도 제대로 파악하질 못합니다.
또한 "적국의 군대가 제국의 영토를 제집 드나들듯하며 약탈하며 이에 대응하지 못하는 현상은 전 시대에는 찾기 어려우며" 라고 분명히 말씀하시면서 유독 테마의 패배 사례만을 강조하며 테마의 실패만 거론하셨는데 무슨 말돌리기를 그렇게 하십니까?
"테마제가 침략군을 격퇴하는 데 효과적이지 않았으면"국경선은 이미 7~10세기 중에 붕괴되었어야 합니다. 근데 그렇지 않았죠.
이렇게 분명한 현상이 있는 데 무슨 "구체적 관계 제시"만 되뇌입니까?
"1. 야전에서 이건 거만 사례다 2. 날씨 때문 3. 걍 칼리프가 의사가 없어서
= 축구 감독 "1. 안방에서 진 거 아니다 2. 날씨 때문에 3. 상대 감독이 크게 이길 맘 없어서"
쯧쯧....그리고 "아나톨리아의 물, 식량 부족, 혹독한 기후에 기인하였다 보아야"?? 기발하군요.
공화정기 로마군이나 페르시아군 혹은
알렉산드로스 군대 때는 안 그랬다가 갑자기 테마제가 도입된 시기부터 삼백 년 동안 물이 독해지고 식량이 없어지며 기후가 혹독해졌던 것일까요?
아무래도 선행되어야 하는 건 "테마제 도입과 날씨 변화와의 구체적 관계"같습니다.
흠, 마누엘 때의 로마군도 "정국이 안정되어 국력이 지난 시기보다는 강해졌지만" 미리오케팔론에서 대거 깨졌죠. 그나마도 기본적 정황이 비슷한 정도가 아니라 "투르크 토후들"에 대해 "여전히 현저히 열세에 놓여있던 시기"조차도 아니었고 도리어 우세했었죠?
근데 우찌 저런 일이? 이걸 볼 때는 마누엘이 어지간히 멍청했던가 아니면 그 자랑의 콤네누스 군대가 거꾸로 테마제 군대만도 훨씬 못해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만?
똑같이 발전했는데 왜 테마제 군대는 강해지고 콤네누스 군대는 약해질까요. 모를 일입니다.
"고구려군이 잘 싸운 경우는 뒤통수치기, 기습, 평양성 성벽을 이용한 승리 정도에 국한되며, 보통은 중국 황제가 대군을 이끌고 진군하면 강화조약 체결에 급급하였고 이것이 이시대 양국 군사관계의 기본양태입니다."
"불가리아군이 잘 싸운 경우는 뒤통수치기, 기습, 산기슭을 이용한 승리 정도에 국한되며,
보통은 동로마 황제가 대군을 이끌고 진군하면 강화조약 체결에 급급하였고 이것이 이시대 양국 군사관계의 기본양태입니다."
근데, 적군을 "뒤통수치기, 기습, 천험 이용한 우세 활용"으로 막는 게 좋은 병법 아닌가? 누구 보기 좋으라고 무조건 야전에서만 이겨야 하는가?
이것 보세요. 전쟁은 UFC나 K-1이 아닙니다.
그리고 여전히 어처구니가 없는 부분. "테마제의 작용과 이슬람 진격의 저지간의 구체적 관계의 제시" ?????
이건 본문에서도, 저번 본문에서도 이뤄지고 있습니다. 님은 야전 승리 사례만 주루룩 이어져야 납득할 것 같은데 이따위건 저 자랑의 징기스칸 몽골군한테도 불가능합니다. 싸우기만 하면 이기는 무적의 군제가 도데체 어디 있나?
이러고 또 사례들기 게임. 이런 소모적인 믿음의 대결은, 인터넷 게시판이 아니라 종교 시설이나 병원에서 할 것입니다.
그리고 님 주장에는 또한 "테마제의 도입과 날씨 변화와의 구체적 관계"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아무 의미 없습"니다.
님 특유의 1. 편파적인 자료 취사 선택 - 테마가 진 사례만 나열하기. 다른 시기들은 이런 해석에서 결코 예외,
2. 분명한 FACT를 고의로 무시하는 엉터리 인과 관계 해석 - 날씨 탓이다, 적국에 그런 의사가 없어서, 야전 승리만 OK
3. 나중 시기의 패배 사례를 놓고 아주 전 시기 일까지 단정하는 타임 워프적 해석 - 백 년 후 군제가 완성되어서? 그럼 아예 강릉 무장공비 가지고 6.25도 논하시죠.
콤네노스빠>
말씀드린 아나톨리아 고원지대의 기후문제는 Haldon교수가 그의 저서 'Byzantine Wars'에서 제시한 부분이며, 칼리프 무타심이나, 훗날의 콤네노스 황제들도 이러한 환경 탓에 군사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은 바 있고, 마누엘의 마지막 이코니온을 표적으로 한 군사작전에서 나타난 문제가 대표적 예가 됩니다.
그리고 Kaegi교수는 그의 저서 'Heraclius, Emperor of Byzantium'에서 페르시아군이 아나톨리아를 점령하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이며, 서부와 중부 아나톨리아에는 페르시아군이 없었고, 코카서스 지방이나 킬리키아의 관문 남쪽에 주둔했으리라 적고 있습니다.
이란의 어떤 교과서인지는 모르겠지만 학자간의 의견충돌이 있으면 해당 분야 전문가의 의견에 따름이 맞습니다.
마법의활>
풉...."이란의 어떤 교과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사산 제국 정치제도사란 책에서 페르시아사의 대가 자린쿠 교수가 하는 말입니다.
"학자간의 의견 충돌이 있으면 전문가의 의견에 따름이 맞"으므로 이 부분은 님께서 따라야 합니다.
콤네노스빠>
같은 현상은 반복하지만 테마가 없던 시기에도 나타났으며 지형, 기후 보정을 받지 못한 킬리키아 지역은 유스티니아노스 2세의 시대에영구적으로 정복당하기 시작합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키려는 시도는 레온3세 치세에 한번 더 이루어지는데, 이 때에도 이슬람군의 최종목표는 황도의 함락이었으며, 이후 아바스조가 정권을 잡고, 수도를 다마스커스에서 바그다드로 옮기면서 이슬람 세력의 공세는 정도나 빈도의 측면에서 줄어들게 됩니다.
이것이 테마군의 비효율성에도 불구하고 방어선이 붕괴되지 않은 또다른 요인입니다.
제가 테오필로스의 패배를 예로 든 이유는 이 전쟁에서 테마군의 현저히 낮은 기강과 사기, 전술능력 등이 대표적으로 나타났고, 그것이 패배의 원인이 되었기 때문이지 단순히 패배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 시기의 제국이 100년전의 제국보다 재정적으로 풍족하고, 군사적으로 보다 강했으며, 동일한 방어원리를 채택했다고 봄에 무리가 없고, 그렇다면 이슬람 제국의 유사한 침공에 대해 대응한 결과를 과거의 사례에 적용함이 부당하지 않은 것입니다.
말씀하신 하드리아노폴리스나 미리오케팔론 전투에서의 패배는 지휘관의 판단미스에 기인하였기 때문에 이를 군사제도를 비판함에 쓸 수 없는 것이구요.
그리고 책을 읽다보니 Haldon교수도 11세기 투르크인이 서부아나톨리아 농촌에 악영향을 미친 사례를 근거로 7-8세기의 전쟁의 영향을 논하던데, 이 사람도 '인과관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사람입니까? 이상을 종합해 보면 테마군이 이슬람 침공 저지에 핵심역할을 수행했다고 평가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이 10세기의 '그림자 전법' 같은 전략에 능했다고 보기도 어려운 것이.. 무타심의 침공 때, 자국영토를 대놓고 행군하는 수만명의 적군의 위치도 파악하지 못했던 것이 당시 정보체계의 실상입니다. 그런데 이보다 고차원적인 탐지능력과 통신체계를 요하는 그런 전략을 구사할 수 있었으리라 볼 수 없지요. 정보전달 방법에 대한 개혁이 이 패배 이후에 이루어졌음은 잘 아실겁니다.
마법의활> 님의 3대 문제는 이번에도 여전하군요.
1. 편파적인 자료 취사 선택 - 테마가 진 사례만 나열하기. 다른 시기들은 이런 해석에서 결코 예외.
"하드리아노폴리스나 미리오케팔론 전투에서의 패배는 지휘관의 판단미스에 기인하였기 때문에"
?? 그렇다면 왜 테오필루스 패배는 "지휘관의 판단 미스"가 안 되는 것이죠?
테마 제도 하에서의 패배는 군제 자체의 미비나 병사 개개인의 전투력이 이유인데 콤네노스조에서의 패배는 "지휘관의 판단 미스" ?
할말을 잃습니다. 이런거면 아드리아노플 전투에서 로마군이 드럽게 못싸워 졌다는
시오노 나나미 말이 더 그럴듯 하네요.
"발렌스의 패배를 예로 든 이유는 이 전쟁에서 디오-콘스 로마군의 현저히 낮은 기강과 사기, 전술능력 등이 대표적으로 나타났고, 그것이 패배의 원인이 되었기 때문이지 단순히 패배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
이런 비슷한 소리는 시오노 나나미도 할 수 있고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죠.
뭐, 님이 이거 안하는 이유는 이게 비합리적이어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콤네누스조 시기를 미화하는 데 저게 별로 도움이 안되서 안하는 것일 뿐.
어차피 엉터리 해석 Logic은 똑같다.
분명한 FACT를 고의로 무시하는 엉터리 인과 관계 해석 - 날씨 탓이다, 적국에 그런 의사가 없어서, 야전 승리만 OK
콤네노스빠>
또한, 해당 전법의 목표는 약탈군에게 카운터를 먹여 피해를 줌과 동시에 약탈당한 재물을 되찾음에 있습니다. 하지만 콘스탄스2세 치세에 무아위야는 아나톨리아에서 막대한 양의 재물을 털어 다마스커스로 개선하여 영웅대접을 받았다고 하며, 과거의 피해에서 복구된 유스티니아노스2세의 시대에도 피해를 보는 측은 로마 제국이었습니다. 이 때 테마군은 무엇을 한 걸까요?
정리하면, 테마군의 기강과 전투력은 낮았으며(유스티니아노스2세의 전쟁에서도 확실히 나타남 ;(슬라브 병사들의 배신 등.)) 이슬람 제국은 아나톨리아 정복의 의사가 없었습니다. 또한 아나톨리아에 이르러 전선이 고착화된 현상은 과거 페르시아 전쟁 때에도 나타납니다.
그렇다고해서 10세기의 그림자 전법에 능했다고 보기도 어렵죠.
그럼에도 테마군이 이슬람 침공 저지에 핵심 역할을 하였다고 주장하려면 저지의 구체적 방법이 제시되어야 합니다.
굳이 구체적 사례를 들지 않아도 됩니다. 추상적으로 원리를 제시해도 문제 없습니다.
마법의활>
님은 아예 인과 관계 해석에서 결과 자체를 멋대로 원인으로 해석하는 중입니다.
"콘스탄스2세의 시대에 이슬람 군대는 아나톨리아를 영구적으로 정복하고자하는 시도를 하지 않은 건" 그런 시도가 효과가 없었음이 그 전 시기에 이미 검증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나톨리아를 이슬람이 괜히 건드리지 않아 허접한 테마군이 무사해서가 아니라, 테마군 때문에
이슬람이 아나톨리아 정복을 포기한 것입니다.
아시겠습니까? 님은 또 이러니까 "날씨 때문이다"라고 드립하는데, 아나톨리아 고원 지대의 기후 문제가 왜 이슬람 제국의 진공이 테마제 도입 이후로 늦춰진 시기에만 유독 효과를 발휘했냐는 겁니다.
테마제가 도입되니까 이슬람 진격이 늦춰진 것을 순전히 "날씨"탓으로만 돌리는 님 주장은 별반 설득력이 없고, 또한 그 "날씨"에도 불구하고 테마제 때는 그 지역을 유지했는데 콤네누스들은 그렇게 못한 건 순전히 콤네누스조 때의 어떤 문제점으로 풀이됩니다.
"콘스탄티노스4세의 치세에도 이슬람 군대의 아나톨리아에서의 작전목표는 로마 제국의 군사력을 약화에 있었으며, 최종목표는 어디까지나 콘스탄티노폴리스였습니다."
여기서 나올 수 있는 합리적 추론이란, 어디까지나 테마 군대 때문에 아나톨리아 방면에서의 진공이 불가능해졌다라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님은 처음에는 "그냥 안했다"고 뻣대다가
"그럼 귀찮아서 안 했냐?"하니 "그런 말 안 한적 없다"라고 하시면서 "날씨 드립"하시는 중입니다만,
왜 하필 날씨가 테마제가 활용될 때에만 < 로마의 적들한테만 불리하게> 난리를 피우죠? 이상합니다.
신기하게도 테마제가 없어지니까 이놈의 날씨는 콤네누스들 편을 들지 않네요? 신묘합니다.
기상 관계하고 테마제하고의 관계가 선행되지 않으면, 님 주장은 할든이든 누구든 어설프게 이해도 못하는 자료 베껴와서 들어봐야 아무 소용 없습니다.
<아바스조가 정권을 잡고, 수도를 다마스커스에서 바그다드로 옮기면서 이슬람 세력의 공세는 정도나 빈도의 측면에서 줄어들게 됩니다.>
이건 맞습니다만, "정도나 빈도의 측면에서 더 강력하고 잦았던 시기"에서도, 말따나마 "100년전의 제국보다 재정적으로 풍족하지 않고, 군사적으로 보다 약했으며, 동일한 방어원리를 채택했는데도" 이슬람 제국은 방위선을 무너뜨리지 못했다...
여기서 님은 말하겠죠. "그거 날씨 때문이다."
......
패배한 사례만 주욱 놓고 말하면 이따위 갖다대기는 아무 때나 합니다.
미리오케팔론 때의 콤네누스 제국은 "100년전의 제국보다 재정적으로 풍족하고, 군사적으로 보다 강했으며, 동일한 방어원리를 채택했다고 봄에 무리가 없고, 그렇다면 투르크 제국의 유사한 침공에 대해 대응한 결과를 과거의 사례에 적용함이 부당하지 않은 것입니다. 고로 알렉시우스 1세의 로마군은 엄청나게 취약했으며 그들 자체의 방위력은 제국 방어에 별반 도움이 되지 않았던 게 분명합니다."
이거나 제대로 답변하시기 바랍니다.
아, 또 이건 "지휘관의 실수다???" 두번째 웃습니다.
항상 반복되는 문제는 여전합니다.
1. 편파적인 자료 선택 - 테마가 진 사례만 나열하기. 다른 시기들은 이런 해석에서 결코 예외.
지적이 들어오면? "그건 지휘관 잘못이다."
2. 분명한 FACT를 고의로 무시하는 엉터리 인과 관계 해석 - 날씨 탓이다, 적국에 그런 의사가 없어서, 야전 승리만 OK
그나마 이번엔 발전이? 야전 드립은 인제 안하시네요. 다만 테마제가 도입될 때에만 로마군에 유리하게 작용하던 그 이상한 날씨의 조화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숙제입니다.
3. 나중 시기 패배 사례를 놓고 아주 전 시기 일까지 단정하는 타임 워프적 해석 - 백 년 후 군제가 완성되어서?
흠, 이것도 "그건 그냥 지휘관 잘못"-_-ㅋ
그리고 "추상적 원리????"
죄송하지만 님한테는 추상적인 원리를 들어봐야 아무 쓸데가 없기에 안 하렵니다.
테마 제도의 패배는 어떤 때든 그 전체 군제나 군인의 문제가 되었다가 콤네노스조 때는 늘 지휘관의 삽질로만 귀결되는 거.
테마제가 도입된 후에 이슬람 진공이 늦춰진 건 또 전부 날씨 타령 하는 이거.
이것 모두가 어쨌든 그냥 님이 콤네노스조를 극심히 애호하고 싶었던 나머지 되도 않는 테마제 폄하에만 맞춰 해석되기에, 헛수고가 될 게 뻔하기 때문입니다.
님 자체가 추상적인 논리 전개가 안되는데 어떻게 추상적 원리 이해란 게 바로 설 수 있겠습니까?
해서, 간단히 쉬운 얘기로 들어가보죠. 사실 지금 오가는 얘기는 구태여 "추상적 원리"도 필요하지가 않습니다. "상식선"의 사고가 필요할 뿐이죠.
제가 님 집을 털지 못하는 건 님 집 열쇠가 저한테 없거나 그런 짓 하면 님이 저를 경찰에 신고하거나가 이유인데, 제가 갑자기 콤네노스님한테 따지기 시작합니다.
"내가 당신 집 안터는 거에 대해 당신은 나한테 사례해야 한다."
"???"
"내가 그냥 안 털겠다고 한 게 이유거나, 혹은 그 시간에 내 일보느라고 혹은 <날씨>때문에 안 털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신 집 열쇠든 경찰이든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임이 분명해졌다. 사례비 얼마 줄거냐?"
콤네노스빠>
시대, 장소를 불문하고 결과에 따라 패배한 전투는 다 똑같아지는군요.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뭐라고 드릴 말씀이 없네요.
고원지대 환경의 버프를 받지 못한 킬리키아가 유스티니아노스2세의 시대부터 이슬람군에게 영구적으로 정복당한 사실, 칼리프 알 마문이 아나톨리아를 차근차근 정복하고자 했을 때,
테마군이 별다른 저항을 하지 못한 사실 등을 이미 그 반증으로 제시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님은 이거 다 제가 편파적으로 취사선택한 사례라 적당한 근거가 되지 못한다 하겠죠? 그때 있었던 일을 전부 다 뽑아서 나열이라도 해야합니까?
그건 불가능하고, 대표성이 없다는 점은 님이 증명할 부분입니다.
소아시아는 크게 서부와 북부의 평야지대, 중부의 고원지대, 그리고 양자사이에 위치한 산악지대로 구성되는데, 콤네노스 시대에 이 셋 중 중부의 고원지대와 산악지대는 투르크인들에게 넘어간 상태로, 이곳을 탈환하려는 콤네노스 제국에게 과거 제국이 가진 방어적 이점이
반대로 작용됨은 당연한 일로 전혀 신묘하지 않습니다. 이런것까지 설명을 해야 합니까?
이슬람 군대의 진격을 저지한 핵심 요소가 테마제가 아닌 자연환경과 칼리프국의 정복의사 없음에 있다는 점을 주장하고 이에 포커스를 맞추는 것일 뿐, 오직 날씨 때문에 막혔다고 주장한 적은 전혀 없는데요?
게다가 님이 말한 상식을 적용하면 제 주장도 말이 안될거 없고, 모든 역사문제가 발굴, 연구할 필요도 없이 막 풀리겠군요.
아무 증거 없이, 사실 하나만 가지고 오직 님의 그 '상식'만으로 님의 주장이 옳다는 기본도 안 된 주장을 하시는데,. 무슨 말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님 주장과 논거는 지금까지 달린 수십개의 댓글에도 불구하고, 오직 '테마제가 도입된 시기와 이슬람 제국의 침공이 저지된 시점이 일치한다,
고로 테마제가 다른 현상들에도 불구하고 - 그건 다 편파적인 사례라 타당성이 없다. 그 이유는? 그게 상식적으로 맞다. -
침공 저지에 핵심 역할을 한 것이 맞다. 그 이유는 또한 그게 상식적이기 때문이다. ' 라는 초등학생도 쓰지 않을 구조를 가집니다.
인과관계의 조건은 시간관계 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요소들이 포함되고 이를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판단해야 하고, 그게 안되는 님 주장은 억지일 뿐입니다. 그리고 사실, 님이 팩트라 주장하는 것 - 테마제도입과 이슬람 침공지연의 일치 - 엄밀히 말하면 이미 헤라클레이오스때 이슬람군이 시리아, 아르메니아 정복하고 아나톨리아에 이르렀을때부터 정복이 지연된거라 큰 의미는 없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는다면 이 토론은 더이상 의미가 없을 것 같습니다. 잘 생각해 보시길.
마법의활>
생산성이라든가 동일 환경에서 벌어진 일은 시대가 달라도 어느 정도 비교가 가능하니, 그걸 토대로
설명드리죠.
예컨데 바실리우스 2세 때의 비잔틴 제국과 메메드 2세의 투르크 제국은 거의 영역과 힘이 일치했는데, 이를 들어 바실리우스 2세 이후로 제국이 내부 문제를 11세기의 혼란 없이 해결했다면 어떻게 향후 전개가 되었을지는
예측 가능합니다. -> 이건 내 말이 아니고 어떤 교수 얘긴데, 안 가르쳐드리겠습니다. 님 같은 분은 좀 스스로 자료를 찾아보고 공부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같은 예로 아바스조는 네오 사사니즘 체제를 구축했다고 평가되면서 사산조와 비교가 가능하고
그 사파비조 페르시아도 주변 나라와의 쟁패 양상이 예전 로마-사산조 혹은 사산조-에프탈의 그것과 양상이 거의 비슷합니다.
하지만 님처럼, 군제도 상황도 다른 동일 국가의 군대를 놓고 특정 시기 패배를 핑계 삼아 그 백 년 전 제도도 달랐을 때하고
비교하는 짓은 누구도 안 합니다. 그리고 허...
1. 어떤 패배는 군제 자체의 미비나 병사 개개인의 전투력이 이유인데 또 어떤 패배는 "지휘관의 판단 미스"라고 주장하는 오류를 지적했더니,
이걸 시대, 장소를 불문하고 결과에 따라 패배한 전투는 다 똑같아진다고 알아듣네요? 좋아요. 근데 왜 유독 테마 제도 때의 패배만 달라질까? 님 여기에 대해 여전히 말이 없군요.
저는 답을 알죠. 님 좋아하는 콤네노스조를 편파적으로 옹호하려면 테마제를 폄하해야 맥락이 맞기 때문입니다. 디오-콘스 로마군에 대해서 님이 테마제보다는 너그러운 것도 결국은 이 맥락입니다.
근데....꼭 그렇게 해야 콤네노스조가 옹호될까요?
이러면, 앞서 말했듯 똑같은 시기가 지나면 테마제는 강해지는 데 콤네노스조만 열화되는 바보 같은 군대가 될 뿐입니다.
2. 콘스탄스2세의 시대에 이슬람이 아나톨리아를 영구적으로 정복하고자하는 시도를 하지 않은 건 그런 시도가 효과가 없었음이 그 전 시기에 이미 검증되었기 때문입니다. 테마군 때문에 이슬람이 아나톨리아 정복을 포기한 것인데, 님은 이에 대해 주장합니다.
<콘스탄스 2세의 시대에 테마제의 기초가 형성되었으므로 그전에는 아예 테마제가 없었다>
푸흐흐...이미 헤라클리우스 시대부터 뭐랄까 테마 제도 비슷한 건 있었고, 마우리키우스 때도 일부 지역이 군관구제 비슷하게 돌아가고 있었습니다만?
제도가 무슨 MMORPG 아이템인 줄 아십니까? 완성되면 장착 착탈하는 거? 오락가락도 정도껏 해야지 이건.... 참 답이 안나오는 분이네요.
구태여 말하자면 "기초가 형성"된 게 아니라 "틀이 잡힌 거죠."
하긴 또 님은 이러면 "완성된 건 테오필루스 때다" ??완성 같은 소리 좋아하십니다.
그때그때 시대에 맞게 변용되는 제도만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테마제 없었을 때도 페르시아군의 진격이 저지된 사실? 테마제 없었어도 아나톨리아에서 페르시아를 막았다? 웃기지 마십시다.
고원 지대 환경의 버프를 받지 못한 킬리키아가 정복된 거? 이건 맞습니다만, 하지만 테마제가 그렇게 형편없었으면 아나톨리아가 죄다 털렸어야
되는데 그러지 않았죠.
님은 시간적 배경 운운하는데 이삼백 년 동안 틀린 전략으로 침공을 막는다는 게 말이 됩니까?
정확히는 테마제의 경우 그 지역 환경에 맞는 방어 체제였다는 게 되는데 님은 콤네노스빠인 나머지 이건 그냥 무시할려고 애를 쓰죠.
또한, 칼리프 알 마문이 아나톨리아를 차근차근 정복하고자 했을 때, 테마군이 별다른 저항을 하지 못한 사실 등을 이미 그 반증으로 제시한 바 있습니다. ---> 이따위 사례 놀음은 필요가 없습니다. 반대 사례를 들어볼까요?
그보다 한참 시기 전에 테마군이 타르소스를 점령해서 보복전 펼쳤을 때 이슬람측 또한 거의 저항을 못했었죠? 테오필루스가 호람디난들 가지고 장난칠 때 이슬람측이 여러 차례 엿먹었죠?
그 유스티니아누스 2세도 생각 이상으로 역공이 성공했죠? 콘스탄티누스 5세가 군제 개편한 후 이슬람 영토로의 진공 성공해서 님이 그렇게도 좋아하는 UFC 야전에서 이겼죠?
근데 내가 이렇게 사례 내놓으면 납득할 수 있나요? 당연히 안되죠.
"편파적으로 취사선택한 사례"니까. 그때 있었던 일을 전부 다 뽑아서 나열하면 님이 편파적으로 취사 선택하니까 말이 안되는 거죠.
고로 대표성이 있다 없다는 님이 증명할 부분입니다. <-- <<어차피 증명이 안되니까 남한테나 떠미는 거지만>>
말하자면, "증명이 안 됩니다." 사례들기 게임에선 일반적 법칙을 도출하기란 불가능하니까요.
음, 그리고 계속 궁색하니 그냥 답변을 회피하는데, 그냥 내 질문은 간단합니다.
테마제가 이긴 건 죄다 날씨고 지휘관 탓인데 디오-콘스 시절하고 콤네노스조는 그게 아니라는 거냐고 묻거늘, 왜 거기에 대해서는 여적까지 답변이 없습니까?
테오필루스 패전은 지휘관 탓이 아니고 병사들이 허접해서인데, 왜 발렌스하고 갈레리우스, 알렉시우스, 마누엘은 예외냐는 겁니다.
곤란한 질문은 그저 계속 회피하는데 소용없습니다. 하는 쪽은 답이 나올때까지 계속 힐문하면 그만이니까요.
또. 님 논리 고대로 따라 붙여서 콤네노스조에 대해 적용해본 거에 대해선 여전히 답변이 없네요?
"미리오케팔론 때의 콤네누스 제국은 "100년전의 제국보다 재정적으로 풍족하고, 군사적으로 보다 강했으며, 동일한 방어원리를 채택했다고 봄에 무리가 없고,
그렇다면 투르크 제국의 유사한 침공에 대해 대응한 결과를 과거의 사례에 적용함이 부당하지 않은 것입니다. 고로 알렉시우스 1세의 로마군은 엄청나게
취약했으며 그들 자체의 방위력은 제국 방어에 별반 도움이 되지 않았던 게 분명합니다."
했더니, 답변.
"어떤 답을 기대하시는지는 알겠는데, 뭐라고 답하건 지금 논제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관계가 있습니다. 님의 그 편향적인 기준이 왜 콤네노스조에 대해서는,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디오-콘스 체제에 대해서는 예외냐고 묻는 거니까. <아마 끝까지 답변 못하겠죠.>
그리고 아..이쯤되면 처절한 걸 넘어 너절하네요.
" 테마제가 아닌 자연환경과 칼리프국의 정복의사 없음에 있다는 점을 주장하고"
님. "자연 환경"은 날씨가 아닙니까? "아나톨리아의 물, 식량 부족, 혹독한 기후에 기인" 이거 날씨 아닙니까?
아아, 나는 "날씨"가 아니라 "자연 환경"이라 주장했다고요?
그거나 이거나 마찬가지죠.
축구 감독 "자연 환경이 안 좋아서 졌다."
어떤 콤네노스빠 "콤네노스조 군대들은 자연 환경이 안 좋아서 졌다."
'테마제가 도입된 시기와 이슬람 제국의 침공이 저지된 시점이 일치한다, 고로 테마제가 다른 현상
들에도 불구하고 ->> 음, 도입된 시기와 침공이 저지된 시점이 일치하고 그 이후로도 이삼백 년 동안 그 전선에서 이슬람의 정복이 둔화되었다, 입니다. 아시겠습니까?
그리고 사실 이건 "도입"이라기보다는 "제대로 된 정착" 그리고 "지형에 맞는 방어 체제의 확립"이 됩니다.
그리고 님이 드는 편향적 사례는 테마제 군대가 패배한 사례만 주욱 늘어놓고 긍정적인 건 죄다
"지형 환경" 탓으로 돌리기에 그 이유가 입증됩니다.
또한 님 좋아하는 콤네노스조의 실패 사례에 대해서는 같은 논리가 적용되지 않고 "지휘관"탓이 되니까 안된다는 거. 이유는 설명했는데 왜 또 물어봅니까?
"침공 저지에 핵심 역할을 한 것이 맞다. 그 이유는 또한 그게 상식적이기 때문이다. "
아닌데? 예를 들어 님 PC를 내가 들어가서 부순 후부터 님 PC가 안 됩니다. 그럼 원인은 나한테 있지
애꿎은 님 PC한테 있지 않지요? 근데 님은 이게 상식 아니라고 합니다.
PC가 안 돌아가는 건 PC 주변의 자연 환경 탓 그리고 PC를 제대로 운용하지 않은 나 콤네노스 탓이다.
님 지금 이거 상식이라 주장하는 중입니다.
디오-콘스 시기를 예로 들자면, 콘스탄티누스 아버지 콘스탄티우스도 매번 야만족 격퇴에 성공했냐면 그게 아니고 그 자랑의 디오클레티아누스 코미타텐시스들도 수도에서 술계집치기나 하다가 전쟁터 나가면 삽질하는 쓰레기들이 없던 게 아니었습니다.
아...그리고 좋은 말 하시네요. 흔쾌히 동의해드리겠습니다.
"인과관계의 조건은 시간관계 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요소들이 포함되고 이를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판단해야 하고, 그게 안되는 주장은 억지일 뿐입니다."
바로 그렇습니다. 고로 콤네노스조 마누엘 군대의 패배는 자연환경 탓이고 지휘관 탓이며 디오-콘스 시절 군대의 패배도 지휘관 탓인데, 테오필루스 패배만 유독 테마제 군인들이 허접해서라는 님 해석은 그냥 억지입니다.
항상 반복되는 문제는 여전합니다.<Ver. 3.0 >
1. 편파적인 자료 선택 - 테마가 진 사례만 나열하기. 다른 시기들은 이런 해석에서 결코 예외.
지적이 들어오면? "니가 기대하는 게 뭔지 아니까 답변 안 한다." ....그래도 지휘관, 날씨 드립질보단 그나마 이게 낫네요.
2. 분명한 FACT를 고의로 무시하는 엉터리 인과 관계 해석 - 자연 환경 탓이다, 적국에 그런 의사가 없어서, 야전 승리만 OK
그나마 이번에도 발전이? 야전 드립은 안하다가, 날씨에 대해선 한다는 말이 "날씨가 아니라 자연 환경"이다.
"아나톨리아의 물, 식량 부족, 혹독한 기후에 기인" 님. 근데 이거 "날씨"아닙니까?
"날씨"는 자연 환경 아닙니까?
나중 시기 패배 사례를 놓고 아주 전 시기 일까지 단정하는 타임 워프적 해석 - 백 년 후 군제가 완성되어서? 테마제가 전 시기 내내 똑같았다고 생각하는 망상, 테마제란 표딱지 붙이면 다 같은 줄 아는 망상부터 해결하세요.
그런 해석들은 사회-경제적 해석으로 퉁칠 수 있을진 몰라도 다른 군제나 다른 상황에 적용되는 건 아닙니다.
ps. 이후에도 되도 않는 응답이 오갔습니다만 기본 골자는 계속 반복되었으므로 생략.
하여튼 참, 심각하다는 걸 느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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