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윤기의 역사기행 일본속의 한류를 찾아서] ⑪ 교토의 명찰 '고류지' 세운 진하승 장관 | ||
신라공예 극치 미륵불 봉안… '日국보 1호' 우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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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에서 바다를
건너 왜로 온 진씨 가문의 발자취는 오늘의 교토땅과 밀착되어 있다. 그 상징적인 명소가 교토의 고류지(廣隆寺)이다. 사찰 고류지는
교토시의 서부 지역 우스마사(太秦) 거리에 있다. 교토역 앞의 종합버스터미널에서 완행버스로 30분 거리에 위치해 찾아가기도
쉽다. 고류지에는 신라 적송으로 만들어진 일본 국보 제1호 ‘보관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 있고, 역시 국보(지정번호는 없음)인 백제
녹나무로 만든 ‘보계(상투)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 있어 매우 유명하다. 보관 미륵불상은 서기 616년 신라 왕실이 왜나라 왕실로 보내준 불상(‘부상략기’)이다. 이 신라 불상은 1951년 6월9일 일본문화재위원회에서 일본 국보 제1호로 지정됐다.(廣隆寺, 1970년 발행)
왜곡된 시각은 또 있다. 한국에서 일본어를 가르치는 노히라 슌스이가 쓴 책 ‘日本人はビックリ!韓國人の日本僞史’(일본인은 깜짝 놀람! 한국인의 일본 거짓역사)에도 “보관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일본 국보 제1호가 아니다. 꼭 닮은 한국 국보 제83호(서울 용산 국립박물관 소장)와 비교해 우월감을 누리기 위한 한국인들의 주장으로 ‘일본 국보 제1호’라는 것이 ‘정설’로 오늘에까지 알려지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오늘날 일본이 세계에 자랑삼는 이 신라 미륵불상이 유독 일본 국보 제1호로 지정된 배경이 있다. 그것은 매우 귀중한 문화재들이 소실되는 화재가 잇따라 발생했기 때문이다. 1949년 1월26일 나라땅 호류지(법륭사)의 금당벽화(7세기 초 고구려 담징 스님 제작)가 원인 불명의 화재로 소실됐다. 이듬해인 1950년 7월2일 교토의 긴가쿠지(금각사)도 방화 사건으로 불타 버렸다.(‘일본사연표’ 일본역사학연구회편, 1968) 이에 당황한 일본문화재위원회는 서둘러 보관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을 일본 국보 제1호로 지정, 철저한 보호 대책을 세우게 됐다. 현재까지 다른 일본 국보에 대해서는 지정번호가 매겨져 있지 않다. 보관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 일본 최고의 대접을 받게 된 것이다. 또 95년 1월17일 일본 고베 지역에서 큰 지진이 발생하자 일본 문화재 당국은 국보 제1호의 안전을 위해 불상 아래쪽 바닥에 지진 피해 예방대책으로 이른바 ‘내진대(耐震臺)’를 설치했다.
규슈대 불교사학과 다무라 엔초(田村圓澄) 교수가 대표적이다. 그는 “고류지의 두 국보 목조 미륵불상은 모두 신라에서 보내준 것”이라고 단정했다. 그런데 백제 미륵불상은 백제 왕실에서 녹나무를 가지고 조각한 것으로, 미륵불상의 정수리에 큼직하게 상투를 튼 모습의 ‘보계’가 이색적이다. 603년 창건 당시 사찰은 호코지(蜂岡寺)로 불렸으나 뒷날 고류지로 개칭됐다. 진하승 장관이 신라인 호족들의 본거지였던 교토땅 우스마사에 사찰을 세운 과정은 다음과 같다. “쇼토쿠 태자는 만조백관에게 ‘우리의 존귀한 불상을 누가 모셔 가겠소’라고 했을 때, 진하승 장관이 ‘신이 모셔가겠나이다’라고 진언해 불상을 모셔다 호코지를 세웠다”(‘부상략기’). 처음 명칭이 호코지였던 지금의 고류지에 전하는 ‘고류지연기’(緣起)에는 불상은 “미륵상이로다”라고 전한다. 이 미륵상은 현재 고류지에 봉안돼 있는 또 하나의 일본 국보로 백제 미륵상인 보계(상투)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며 애칭은 ‘우는 미륵상’이다. 백제 유래라는 가장 오래된 근거는 15세기 문헌([山城州葛野郡楓野大堰鄕廣隆寺由來記])이다.
똑같은 해 같은 달의 ‘부상략기’는 ‘일본서기’와 사뭇 다른 내용을 보여준다. “스이코여왕 24년(서기 616년) 5월3일 여왕이 병환으로 누우니, 태자는 여왕의 쾌유를 서원하여 조정의 고관들에게 제 고장마다 절과 탑을 세우라고 명했다. 7월 신라왕이 높이 2척의 금불상을 보내 기증하자 이 불상을 호코지(고류지)에 안치하였다. 이 불상은 때때로 빛을 번쩍번쩍 발광하는 이적을 보였다.”(‘부상략기’). 또 다른 주목할 자료도 있다. “스이코여왕 24년 5월3일 여왕이 쓰러지자 쇼토쿠 태자는 여러 곳에 가람을 세우도록 서원하였으며, 성체(聖體)와 똑같은 불상을 소원하자 7월 신라왕이 금불상을 보내주었다. 높이 2척이며 호코지에 안치했다.”(今上皇帝 ‘一代要記’ 1278∼1287) ‘일대요기’의 저술자 금상황제는 일본 제91대 고우다왕(1274∼1287 재위)이다. 현대 일본의 사학자들도 이구동성으로 국보 제1호 보관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신라로부터 전해왔다(水澤澄夫 ‘廣隆寺’ 등)고 말한다.
보관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오랜 세월 탓에 몸체에 도금됐던 금빛이 퇴화 박락하여 지금은 붉은 적송의 빛깔이다. 진평왕의 큰 따님은 슬기로웠다는 덕만공주로, 뒷날 신라 최초의 여왕이 된 제27대 선덕여왕(632∼647 재위)이다. 이웃 왜나라의 첫 여왕인 스이코여왕의 신병을 불력으로 치유토록 돕느라 미륵불상을 보내준 진평왕은 신라 역사상 최초의 여왕 왕위 승계를 고려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선덕여왕은 스이코여왕이 서거한 지 4년 뒤 옥좌에 앉았다. 고대 교토에 고류지를 세운 진하승은 당시 이 고장 최고의 부호이며 호족 진씨 가문의 지도자였다. 막강한 재력으로 스이코여왕(592∼628 재위) 왕실 재정을 돕는 장경(藏卿)인 재무장관도 지냈다. 쇼토쿠 태자 역시 진하승 장관을 존중하며 서로 절친했기 때문에 진평왕이 친히 보내준 보관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을 고류지에 봉안하게 해주었다. 그러므로 서기 603년 최초로 백제의 보계(상투)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을 모시고 고류지가 건립됐고, 이어 서기 616년 신라 진평왕이 보내준 보관 미륵보살반가사유상도 사찰에 봉안됐다고 정리하는 것이 옳다. 이런 과정을 거쳐 오늘의 고류지에 백제의 녹나무 ‘상투 미륵상’과 신라의 적송 ‘보관 미륵상’이 쌍벽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현재 고류지 경내에 세워져 있는 사찰 연혁 비석(1971년 건립)에는 ‘신라 미륵상’이라는 표시가 전혀 없다. 이 사찰 발행의 유래 책자 등도 신라 미륵상임을 밝히고 있지 않다. 더구나 연혁비는 “진하승은 진시황제의 후손이다”며 터무니없게도 중국인설을 내세우고 있다. 진시황제(秦始皇帝)의 성씨는 진씨(秦氏)가 아니고 영씨(瀛氏)이며 이름은 정(政)이다. 진씨 가문 연구의 권위인 이노우에 미쓰오 교수는 “진씨는 신라에서 도래한 사람들이다”(井上滿郞 ‘渡來人’)고 단정했다. 비석도, 유래책자도 바로잡아야 한다. 홍윤기 한국외대 교수 senshyu@yahoo.co.kr (다음주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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