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rch This Blog

Saturday, February 7, 2015

백제와 일본의 관계 일본은 고구려 후손이다



 

  인우(2008-11-05 19:44:22, Hit : 2813, Vote : 29
 http://www.coo2.net/bbs/zboard.php?id=con_4&page=1&sn1=&divpage=4&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22242
 정성일님 박혁거세가 고구려후손입니까?

도절 (都切 ?~1)

BC 6년(유리왕 14) 부여왕(扶餘王) 대소(帶素)가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양국이 볼모를 교환하고 수교(修交)할 것을 제의하였다. 유리왕이 이를 받아들여 도절을 인질로 부여에 보내려고 하였으나 두려워 가지 않았다. 그 보복으로 그 해 겨울에 대소 휘하의 5만에 달하는 부여군이 고구려를 공격하였으나, 대설(大雪)로 인해 후퇴하였다. 도절은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일찍 죽었다.

정성일 (2008-11-05 14:24:37)

일본에서 발견 된 유물들이 백제보다는 신라와 가야를 닮았다는 말도 맞는 말이고, 일왕의 계통이 백제에서 오지 않았다는 말도 모두 맞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백제의 멸망시 일본(왜)는 1천여척의 전선을 만들어 멸망한 백제의 부흥운동을 돕기 위해 왔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아무도 대답하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면 일본(왜)는 백제를 자신의 종실로 받아 들였기 때문입니다.
혈통적으로도 백제의 계통이 아니라고 하면서 백제가 자신의 종실이 되느냐, 괘변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일본을 이해하려면 일본 고서기 또는 일본서기를 이해하여야 합니다.
일본의 초대천황은 진무(신무)천황이지만, 일본인들은 자신의 조상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진무(신무)는 고천원을 파괴한 원흉이지요.
일본의 역사는 열도에서 시작한 것이 아니라 고구려에서 태동을 하고 있습니다.
고천원에는 최초 세명의 신이 존재합니다.
그 세분은 우태, 소서노, 추모임금입니다.
그 세분이 부부신을 낳습니다.
그 부부신은 유리(광명)왕과 아이후(도절태자의 어머니) 입니다.
도절태자는 추모임금때 후계자로 지정되어 있었습니다.
부여의 대소왕이 고구려 유리왕에게 도절을 볼모로 보내주기를 청합니다.
대소왕은 자신의 딸을 도절에게 시집보내어 도절의 다음 왕위를 잇게 함으로써 고구려와 결속관계를 맺으려는 것입니다.
유리왕의 어머니 예씨부인은 금와왕의 딸, 즉 유리왕은 금와왕의 외손자이기도 하였습니다.
금와왕이 생존하고 추모왕이 살아있을 때 동부여와 고구려의 사이는 매우 좋았습니다.
동부여와 고구려의 사이를 이간질 한 것은 고구려의 건국공신 협부였습니다.
삼국사기에는 협부가 남한으로, 한단고기 태백일사 고구려본기에는 다파라국으로 갔다고 합니다.
이 분이 바로 일본(왜)의 시조인 진무천황입니다.
그래서 진무천황은 일본의 시조이면서도 배척받는 분이죠.
이 분의 후손중에서 다시 본래의 살던 곳으로 돌아온 분이 있으니, 자충이라는 분입니다.
삼국사기에서는 남해와 자충을 동일한 분으로 보고 있으나, 권등성경은 자신의 책에서 두분으로 달리 보고 있습니다.
자충이라는 분은 신라의 왕녀와 결혼하여 사이에서 자식을 낳고 다시 다파라로 돌아가는데, 이 때 남겨진 분이 탈해이사금입니다.
파사이사금 시기에 가면 다파라군이 사망하고, 다파라의 왕비가 신라의 왕자를 남편으로 섬기기를 청합니다.
이분은 아혜(남해차차웅의 딸, 유리이사금의 여동생, 파사이사금의 처)의 아들 후복입니다.
이 분은 수인천황 또는 선대 쯤으로 추정합니다.
그리고 아달라 이사금시기에 영오랑(연오랑)이라는 분이 도해하여 왜로 가게 됩니다.
비미호라는 왜 여왕이 아달라이사금에게 교역을 청하고, 신라와의 무역소 설치를 통해 중국에도 사신을 보냅니다.
비미호를 신공왕후로 보아서는 안되고, 신공왕후는 근초고왕의 시기의 사람입니다.
비미호와 아달라이사금시기에는 신라와 왜는 같은 종실의 사람의 인식했습니다.
적어도 왕실끼리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아달라이사금을 기점으로 신라는 박씨에서 석씨로, 왜는 석씨에서 박씨로 세대교체가 반대로 되고 있는 것입니다.
왜의 신공황후와 백제의 근초고왕때까지 서로가 존재를 모르고 있습니다.
두 나라가 처음으로 국교를 맺으면서 두 나라가 같은 핏줄임을 인식하게 됩니다.
제말을 여태 읽어도 이부분만큼은 동의하지 못하겠다고 할 것입니다.

백제의 왕들은 본래 추모의 피도 섞여 있습니다.
추모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고구려를 미워하는 것이죠.
본래 추모와 소서노와 우태는 서로 머리를 묶어 후사를 이어나기로 하였으나, 유리왕과 대무신왕을 거치면서 철저히 배제되고 버려졌으며, 백제의 모국인 동부여를 멸망시켰죠.
유리명왕의 적자인 도절은 동부여에서 고구려로 돌아오지 못하였습니다.
고구려에서는 도절이 동부여에서 병들어 죽은 것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고구려는 난데없이 국내성으로 천도를 합니다.
화가 난 유리명왕은 속을 끓이며, 사냥을 하며 머리를 식히고 있는데, 협부가 유리가 한가로이 사냥을 다닌다고 질책을 합니다.
유리는 여태 협부가 자신을 왕위를 잇게 한 공로가 있으므로 차마 죽이지는 않고 내치게 됩니다.

일찍 요절한 것으로 알고 있는 도절은 동부여 공주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습니다.
이분이 신라의 시조인 혁거세 임금입니다.
신라의 임금은 세세대로 마한인으로 하여 잇는다는 중국의 사서는 바로 신라의 임금이 백제를 따른다는 것입니다.
신라와 백제의 충돌이 최초로 발생한 것은 탈해이사금입니다.
백제가 탈해를 보면 원수의 핏줄입니다.

지금은 저의 이야기가 모두 소설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장수왕 당시에 문주왕이 신라 자비왕에게 원군을 요청합니다.
고구려는 신라에게 백제땅을 절반 떼어줄테니 백제의 백성을 돌려달라고 합니다.
신라는 오히려 병사 1만을 일으켜 백제땅을 회복시켜 줍니다.
아이러니 할 것입니다.
문주왕은 눌지의 딸의 아들, 눌지왕의 외손자가 됩니다.
신라의 왕녀로 백제왕의 후궁이 된자도 많고, 그 후손이 후계자가 되어 왕위에 오른자가 많습니다.
전씨(길선의 딸) - 초고왕(자), 고이왕(자)
아이(백발의 딸) - 침류(자)
주씨(눌지의 딸) - 문주(자)
남당 유고에 나오는 분들만 정리하였습니다.
추가로 더 있을 듯 하지만 명문이 없는 분들은 모두 제외하였습니다




정성일 (2008-11-05 20:43:49) 
인우님/
한꺼번에 쓰기가 복잡합니다.
남당 유고 신라사초는 박혁거세의 기사가 없고, 참고가 될 만한 위화진경초를 보면 앞부분이 신선 같은 이야기만 지속됩니다. 어찌하여 시조의 이야기를 적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을 추측하기까지 여러 사서를 참조하여 혁거세가 추모의 자손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삼국사기의 기년을 기대로 인용해서는 도무지 찾을 수 없는 내용입니다.
오히려 추모보다 혁거세의 나이가 많기 때문입니다.
신라가 성립한 것은 삼국유사 일연이 보았을 고본에서 시작합니다.
일연이 본 고본에서는 신라가 건호(건무의 잘못) 원년, 건원 3년에 건국하였다고 합니다.
이를 후한의 기년으로 산정하면 서기25년이 됩니다.
혁거세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버지가 없는 유복자로 알고 있습니다.
상장돈장에는 천신으로 위장되어 있으나, 남해차차웅의 처인 운제부인도 천신의 딸입니다.
천신이라고 위장된 사람이 꽤 오래 살았다는 것입니다.
남당유고 백제왕기에 보면 추모 이전에 소서노는 우태(금와의 아들)에게 시집을 가서 비류와 온조를 낳고, 유복녀로 아이(뒤에 유리와의 사이에 도절을 낳음)를 낳고, 추모를 받아들여 고구려를 세웁니다.
고구려사초에는 이 부분이 빠져 있는데, 이는 고구려와 백제의 시조논쟁과 관련이 있는 듯 합니다.
도절은 송양의 딸과 낳은 자식이 아닙니다.
추모가 소서노에 오기전에 예씨(금와의 딸)와의 사이에 유리를 낳습니다.
유리는 아버지 추모에게 가기를 원하여 고구려로 오지만, 추모가 반기지를 않습니다.
유리가 숙부와 주변의 도움으로 나라안에 선정을 베풀어 소문이 추모와 소서노에게도 들어갑니다.
소서노가 핏줄인데, 어찌 그럴 수 있냐며 궁안으로 받아들입니다.
유리를 본 아이가 사랑에 빠지고, 임신을 합니다.
이전에 유리는 아버지에게 의탁하고 있는 동안 송양의 딸과 사랑에 빠져있었습니다.
추모는 소서노의 도움을 많이 받았고, 비류와 온조의 사실상 아버지로 살았습니다.
그리하여 기른정이 더 있었던지, 우태의 자식으로 후계자를 삼을 것인지, 자신의 아들로 후사를 삼을 것인지 고민을 합니다.
결국엔 신하들과 의논하여 유리를 후계자로 삼습니다.
이 당시 유리를 후계자로 삼고자 했던 사람이 협부입니다.
협부가 유리와 아이의 자손으로 후계자를 삼으면 나라의 제사를 받을 수 있으니, 그야 말로 좋은 일이 아니냐고 설득합니다.
소서노는 전 남편과 현재의 남편 모두에게 좋은 일이라고 이를 허락합니다.
그리고 갑자기 추모가 죽어버립니다.
문제의 갈등은 이제부터가 시작입니다.
아이가 도절을 낳는 날인데도, 유리는 송양의 딸과 바람을 피웁니다.
고대에 아버지가 아기를 씻기는 것은 자신의 후사로 인정하는 매우 중요한 일인데 바람 피우느라 오지 아니하므로 소서노가 유리를 심하게 꾸짖습니다.
그러자 유리가 영웅호색이라고 하지요.
분개한 소서노는 온조와 상의하여 남하할 결심을 합니다.
그 이전에 추모가 유리를 믿지 못하여, 서남은 온조에게, 동남은 비류에게 다스리라고 유언을 남깁니다.
소서노의 행동은 그 정도하면 유리가 반성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유리는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이유가 소서노에게 있다고 생각하여 소서노를 배척합니다.
당시에는 소서노의 힘이 조정내에 막강하여 소서노에게 때로는 정성을 다하는 척하기도 합니다.
소서노가 죽기전까지는 온조의 세력이 완전히 분립한 상태가 아닙니다.

다음 문제는 동부여의 대소왕이 고구려의 후계자인 도절을 인질로 보내라고 합니다.
이 부분만큼은 유리가 반대하며 보내려 하지 않지만 신하들의 적극적인 권유로 인질로 보냅니다.
그렇게 되자 소서노가 도절이 동부여로 인질로 가는 길을 막고 나섭니다.
이때 미추홀에 뜬금없이 호랑이 다섯마리가 나타나 난동을 부리고 가버립니다.
= 미추홀을 초토화시킨 장본인은 본래 소서노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협보의 짓이 유력합니다. 협보는 소서노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추모경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추모경의 해석은 다른 분들에 의해 진행중입니다.
고구려에서는 미추홀을 초토화시킨 것이 동부여의 짓이라고 의심합니다.
동부여는 펄쩍 뛰지만, 고구려와 동부여의 사이만 나빠집니다.
그해 겨울에 동부여가 고구려를 쳐들어오지만 동사자만 남기고 퇴각합니다.

이제 다시 중요한 사건이 터집니다.
동부여의 대소왕의 딸과 사이에서 자식을 얻은 도절이 고구려로 돌아오게 됩니다.
몇 년동안 잘 있었던 도절이 돌아오는 도중에, 혹은 고구려에서 죽게 되는 사건입니다.
이 일이 터지고 또 다시 고구려의 태보 비류가 죽습니다.
도절이 죽었다고 되어 있지, 죽지 않았다는 기록은 물론 없습니다.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고 하필 이 시기에 도절의 외숙인 비류가 왜 죽는지 이유가 없습니다.
또 본기신편열전에는 도절이 동부여 공주사이에 아들을 한명 낳았다고 하는데, 어디에도 어디로 갔는지 내용이 없습니다.
한단본기 태백일사 고구려본기에는 부여공주 파소가 아들을 낳았다고 하는데, 이 당시에 파소가 아들을 낳았다면 서기25년은 24-5세가 됩니다.

도절이 죽었다는 시기에 유리는 이유없이 국내성으로 천도를 합니다.
수도를 옮기는 이유치고는 궁색합니다.
국내성에 천도를 하고, 유리는 사냥으로 마음을 달랩니다.
이래 저래 풀리지 않는 것은 협보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유리는 협보가 잔소리하는 것을 구실삼아 내쫓아 버립니다. 협보를 내쫓음으로 인하여 동부여와의 전쟁을 피해보자는 생각이었죠.

이것을 사서를 인용하면 내용이 꽤 길어집니다.
그리고 조각조각 여기저기에 있는 것을 붙인 것이라, 저에게 잘못된 부분도 있을 것입니다.
사서마다 달리 이야기하고 있는 부분도 있습니다.
제가 취사선택한 부분이 모두 맞다고 할 수는 없겠죠.
정성일 (2008-11-06 13:37:41) 
위의 글에 참고가 될 만한 사료를 올려드리오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本紀新編列傳(p48)
太子列傳
都切太子母阿爾后 召西奴生 優台女也 類利太子娶之 生都切及女五人 而十三年崩 十四年 扶餘請都切爲質 王以其無母不肯之 群臣力請遣之 中途得疾不發 扶余怒 發兵來侵而掠 都切去帶素 以其女妻之 生一子 于扶余 而歸 辛酉正月薨
도절(都切)태자의 모는 아이(阿爾)후인데 소서노(召西奴)가 낳은 우태(優台)의 딸이다. 유리(類利)태자가 장가들어 도절과 딸 다섯을 낳았으며, (유리왕) 13년(B.C.7)에 죽었다. (유리왕) 14년(B.C.6) (동)부여가 도절을 볼모로 주기를 청하였다. 왕이 그 어머니가 없음을 들어 옳게 여기지 않았다. 군신들이 힘써 청하여 보냈는데, 가는 도중에 병을 얻어 보내지 못했다. (동)부여가 화를 내며 병사를 보내어 침략하고 약탈했다. 도절이 대소(帶素)에게 가서 대소의 딸에게 장가들어, (동)부여에서 아들 한명을 낳고 돌아왔다. 신유(辛酉, A.D.1)년 1월 (도절태자가) 죽었다.
《견해》 이 기사가 중요한 이유는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온조왕 13년 2월의 기사를 이해하는 단초가 되기 때문이다. 즉 부여가 1월에 고구려의 도절태자를 볼모로 요청했고, 도절은 병이 나거나 또는 어떤 이유로 지체가 되어 가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다. 본인은 또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다고 본다. 그것은 도절의 외할머니 소서노의 만류이다. 소서노는 도절을 지키기 위해, 미추홀의 병사를 데리고 도절을 호위하였고, 미추홀이 빈틈에 호랑이를 이용한 모략이 있었던 것 같다. 만약에 무리의 병사가 갔다면 누구의 모략인지 들통이 나겠지만, 호랑이가 말을 할 수는 없지 않았겠는가? 호랑이가 미추홀에 들이쳤다는 소식에 소서노는 다시 병사들을 이끌고 미추홀로 돌아와, 호랑이 문제는 처리 하였지만 나라의 꼴이 말이 아닌지라 나라 안의 병사를 이끌고 나간 것을 자책하며 죽었을 것이다.
미추홀에 호랑이를 풀어 혼란을 일으킨 사람은 누구일까?
첫째, 미추홀이 병사가 떠난 빈 성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자 일 것이다.
둘째, 소서노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는 자 일 것이다.
셋째, 지략에 매우 밝은 자이다.
답은 여러분들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참고문 고구려사략 유리명왕 14년 기사
十四年 乙卯 正月 都切如柵城 娶帶素女 七月 溫祚立柵 于漢山 以再思公主妻之 十月 帶素引五萬軍 入寇(通江) 大雪 七日 凍死者十九 悔不聽解素之諫
14년(B.C.6) 을묘 정월, 도절(都切)이 책성(柵城)으로 가서 대소(帶素)의 딸에게 장가를 들었다.
7월, 온조(溫祚)가 한산(漢山)에 목책을 세웠다. 재사(再思)공주를 (온조에게) 시집보냈다.
10월, 대소가 병사 5만을 끌고 와서 도적질을 하였는데, 큰 눈이 7일간이나 내려 얼어 죽은 이가 열에 아홉이나 되니, (대소는) 해소(解素)가 간언하는 것을 듣지 않는 것을 후회하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13년 기사
十三年 春二月 王都老嫗化爲男 五虎入城 王母薨 年六十一歲 夏五月 王謂臣下曰 國家東有樂浪 北有靺鞨 侵疆境 少有寧日 況今妖祥屢見 國母棄養 勢不自安 必將遷國 予昨出巡 觀漢水之南 土壤膏 宜都於彼 以圖久安之計 秋七月 就漢山下 立柵 移慰禮城民戶 八月 遣使馬韓 告遷都 遂定疆 北至浿河 南限熊川 西窮大海 東極走壤 九月 立城闕 
13년(A.D.6) 봄 2월에 왕도(王都)에서 늙은 할멈(老嫗)이 남자로 변하였고, 다섯 마리의 범이 성안으로 들어왔다. 왕의 어머니가 죽었는데 나이가 61세였다.
여름 5월에 왕이 신하에게 말하였다. “우리 나라의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 영토를 침략하므로 편안한 날이 적다. 하물며 이즈음 요망한 징조가 자주 나타나고 국모(國母)가 돌아가시니 형세가 스스로 편안할 수 없도다. 장차 꼭 도읍을 옮겨야 하겠다. 내가 어제 순행을 나가 한수(漢水) 남쪽을 보니 땅이 기름지므로 마땅히 그곳에 도읍을 정하여 길이 편안할 수 있는 계책을 도모하여야 하겠다.”
가을 7월에 한산(漢山) 아래로 나아가 목책을 세우고 위례성의 민가들을 옮겼다.
8월에 사신을 마한에 보내 도읍을 옮긴 것을 알리고 마침내 강역을 구획하여 정하였는데 북쪽으로는 패하(浿河)에 이르렀고, 남쪽으로는 웅천(熊川)을 경계로 하였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막혔고, 동쪽으로는 주양(走壤)에 이르렀다.
9월에 궁성과 대궐을 세웠다.

http://www.coo21.rgro.net/bbs/zboard.php?id=con_4&page=727&sn1=&divpage=4&sn=off&ss=on&sc=on&select_arrange=reg_date&desc=asc&no=22245

No comments:

Post a Comment

Blog Archi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