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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일님 박혁거세가 고구려후손입니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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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우님/ 한꺼번에 쓰기가 복잡합니다. 남당 유고 신라사초는 박혁거세의 기사가 없고, 참고가 될 만한 위화진경초를 보면 앞부분이 신선 같은 이야기만 지속됩니다. 어찌하여 시조의 이야기를 적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을 추측하기까지 여러 사서를 참조하여 혁거세가 추모의 자손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삼국사기의 기년을 기대로 인용해서는 도무지 찾을 수 없는 내용입니다. 오히려 추모보다 혁거세의 나이가 많기 때문입니다. 신라가 성립한 것은 삼국유사 일연이 보았을 고본에서 시작합니다. 일연이 본 고본에서는 신라가 건호(건무의 잘못) 원년, 건원 3년에 건국하였다고 합니다. 이를 후한의 기년으로 산정하면 서기25년이 됩니다. 혁거세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버지가 없는 유복자로 알고 있습니다. 상장돈장에는 천신으로 위장되어 있으나, 남해차차웅의 처인 운제부인도 천신의 딸입니다. 천신이라고 위장된 사람이 꽤 오래 살았다는 것입니다. 남당유고 백제왕기에 보면 추모 이전에 소서노는 우태(금와의 아들)에게 시집을 가서 비류와 온조를 낳고, 유복녀로 아이(뒤에 유리와의 사이에 도절을 낳음)를 낳고, 추모를 받아들여 고구려를 세웁니다. 고구려사초에는 이 부분이 빠져 있는데, 이는 고구려와 백제의 시조논쟁과 관련이 있는 듯 합니다. 도절은 송양의 딸과 낳은 자식이 아닙니다. 추모가 소서노에 오기전에 예씨(금와의 딸)와의 사이에 유리를 낳습니다. 유리는 아버지 추모에게 가기를 원하여 고구려로 오지만, 추모가 반기지를 않습니다. 유리가 숙부와 주변의 도움으로 나라안에 선정을 베풀어 소문이 추모와 소서노에게도 들어갑니다. 소서노가 핏줄인데, 어찌 그럴 수 있냐며 궁안으로 받아들입니다. 유리를 본 아이가 사랑에 빠지고, 임신을 합니다. 이전에 유리는 아버지에게 의탁하고 있는 동안 송양의 딸과 사랑에 빠져있었습니다. 추모는 소서노의 도움을 많이 받았고, 비류와 온조의 사실상 아버지로 살았습니다. 그리하여 기른정이 더 있었던지, 우태의 자식으로 후계자를 삼을 것인지, 자신의 아들로 후사를 삼을 것인지 고민을 합니다. 결국엔 신하들과 의논하여 유리를 후계자로 삼습니다. 이 당시 유리를 후계자로 삼고자 했던 사람이 협부입니다. 협부가 유리와 아이의 자손으로 후계자를 삼으면 나라의 제사를 받을 수 있으니, 그야 말로 좋은 일이 아니냐고 설득합니다. 소서노는 전 남편과 현재의 남편 모두에게 좋은 일이라고 이를 허락합니다. 그리고 갑자기 추모가 죽어버립니다. 문제의 갈등은 이제부터가 시작입니다. 아이가 도절을 낳는 날인데도, 유리는 송양의 딸과 바람을 피웁니다. 고대에 아버지가 아기를 씻기는 것은 자신의 후사로 인정하는 매우 중요한 일인데 바람 피우느라 오지 아니하므로 소서노가 유리를 심하게 꾸짖습니다. 그러자 유리가 영웅호색이라고 하지요. 분개한 소서노는 온조와 상의하여 남하할 결심을 합니다. 그 이전에 추모가 유리를 믿지 못하여, 서남은 온조에게, 동남은 비류에게 다스리라고 유언을 남깁니다. 소서노의 행동은 그 정도하면 유리가 반성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유리는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이유가 소서노에게 있다고 생각하여 소서노를 배척합니다. 당시에는 소서노의 힘이 조정내에 막강하여 소서노에게 때로는 정성을 다하는 척하기도 합니다. 소서노가 죽기전까지는 온조의 세력이 완전히 분립한 상태가 아닙니다. 다음 문제는 동부여의 대소왕이 고구려의 후계자인 도절을 인질로 보내라고 합니다. 이 부분만큼은 유리가 반대하며 보내려 하지 않지만 신하들의 적극적인 권유로 인질로 보냅니다. 그렇게 되자 소서노가 도절이 동부여로 인질로 가는 길을 막고 나섭니다. 이때 미추홀에 뜬금없이 호랑이 다섯마리가 나타나 난동을 부리고 가버립니다. = 미추홀을 초토화시킨 장본인은 본래 소서노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협보의 짓이 유력합니다. 협보는 소서노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추모경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추모경의 해석은 다른 분들에 의해 진행중입니다. 고구려에서는 미추홀을 초토화시킨 것이 동부여의 짓이라고 의심합니다. 동부여는 펄쩍 뛰지만, 고구려와 동부여의 사이만 나빠집니다. 그해 겨울에 동부여가 고구려를 쳐들어오지만 동사자만 남기고 퇴각합니다. 이제 다시 중요한 사건이 터집니다. 동부여의 대소왕의 딸과 사이에서 자식을 얻은 도절이 고구려로 돌아오게 됩니다. 몇 년동안 잘 있었던 도절이 돌아오는 도중에, 혹은 고구려에서 죽게 되는 사건입니다. 이 일이 터지고 또 다시 고구려의 태보 비류가 죽습니다. 도절이 죽었다고 되어 있지, 죽지 않았다는 기록은 물론 없습니다.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고 하필 이 시기에 도절의 외숙인 비류가 왜 죽는지 이유가 없습니다. 또 본기신편열전에는 도절이 동부여 공주사이에 아들을 한명 낳았다고 하는데, 어디에도 어디로 갔는지 내용이 없습니다. 한단본기 태백일사 고구려본기에는 부여공주 파소가 아들을 낳았다고 하는데, 이 당시에 파소가 아들을 낳았다면 서기25년은 24-5세가 됩니다. 도절이 죽었다는 시기에 유리는 이유없이 국내성으로 천도를 합니다. 수도를 옮기는 이유치고는 궁색합니다. 국내성에 천도를 하고, 유리는 사냥으로 마음을 달랩니다. 이래 저래 풀리지 않는 것은 협보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유리는 협보가 잔소리하는 것을 구실삼아 내쫓아 버립니다. 협보를 내쫓음으로 인하여 동부여와의 전쟁을 피해보자는 생각이었죠. 이것을 사서를 인용하면 내용이 꽤 길어집니다. 그리고 조각조각 여기저기에 있는 것을 붙인 것이라, 저에게 잘못된 부분도 있을 것입니다. 사서마다 달리 이야기하고 있는 부분도 있습니다. 제가 취사선택한 부분이 모두 맞다고 할 수는 없겠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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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글에 참고가 될 만한 사료를 올려드리오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本紀新編列傳(p48) 太子列傳 都切太子母阿爾后 召西奴生 優台女也 類利太子娶之 生都切及女五人 而十三年崩 十四年 扶餘請都切爲質 王以其無母不肯之 群臣力請遣之 中途得疾不發 扶余怒 發兵來侵而掠 都切去帶素 以其女妻之 生一子 于扶余 而歸 辛酉正月薨 도절(都切)태자의 모는 아이(阿爾)후인데 소서노(召西奴)가 낳은 우태(優台)의 딸이다. 유리(類利)태자가 장가들어 도절과 딸 다섯을 낳았으며, (유리왕) 13년(B.C.7)에 죽었다. (유리왕) 14년(B.C.6) (동)부여가 도절을 볼모로 주기를 청하였다. 왕이 그 어머니가 없음을 들어 옳게 여기지 않았다. 군신들이 힘써 청하여 보냈는데, 가는 도중에 병을 얻어 보내지 못했다. (동)부여가 화를 내며 병사를 보내어 침략하고 약탈했다. 도절이 대소(帶素)에게 가서 대소의 딸에게 장가들어, (동)부여에서 아들 한명을 낳고 돌아왔다. 신유(辛酉, A.D.1)년 1월 (도절태자가) 죽었다. 《견해》 이 기사가 중요한 이유는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온조왕 13년 2월의 기사를 이해하는 단초가 되기 때문이다. 즉 부여가 1월에 고구려의 도절태자를 볼모로 요청했고, 도절은 병이 나거나 또는 어떤 이유로 지체가 되어 가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다. 본인은 또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다고 본다. 그것은 도절의 외할머니 소서노의 만류이다. 소서노는 도절을 지키기 위해, 미추홀의 병사를 데리고 도절을 호위하였고, 미추홀이 빈틈에 호랑이를 이용한 모략이 있었던 것 같다. 만약에 무리의 병사가 갔다면 누구의 모략인지 들통이 나겠지만, 호랑이가 말을 할 수는 없지 않았겠는가? 호랑이가 미추홀에 들이쳤다는 소식에 소서노는 다시 병사들을 이끌고 미추홀로 돌아와, 호랑이 문제는 처리 하였지만 나라의 꼴이 말이 아닌지라 나라 안의 병사를 이끌고 나간 것을 자책하며 죽었을 것이다. 미추홀에 호랑이를 풀어 혼란을 일으킨 사람은 누구일까? 첫째, 미추홀이 병사가 떠난 빈 성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자 일 것이다. 둘째, 소서노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는 자 일 것이다. 셋째, 지략에 매우 밝은 자이다. 답은 여러분들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참고문 고구려사략 유리명왕 14년 기사 十四年 乙卯 正月 都切如柵城 娶帶素女 七月 溫祚立柵 于漢山 以再思公主妻之 十月 帶素引五萬軍 入寇(通江) 大雪 七日 凍死者十九 悔不聽解素之諫 14년(B.C.6) 을묘 정월, 도절(都切)이 책성(柵城)으로 가서 대소(帶素)의 딸에게 장가를 들었다. 7월, 온조(溫祚)가 한산(漢山)에 목책을 세웠다. 재사(再思)공주를 (온조에게) 시집보냈다. 10월, 대소가 병사 5만을 끌고 와서 도적질을 하였는데, 큰 눈이 7일간이나 내려 얼어 죽은 이가 열에 아홉이나 되니, (대소는) 해소(解素)가 간언하는 것을 듣지 않는 것을 후회하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13년 기사 十三年 春二月 王都老嫗化爲男 五虎入城 王母薨 年六十一歲 夏五月 王謂臣下曰 國家東有樂浪 北有靺鞨 侵疆境 少有寧日 況今妖祥屢見 國母棄養 勢不自安 必將遷國 予昨出巡 觀漢水之南 土壤膏 宜都於彼 以圖久安之計 秋七月 就漢山下 立柵 移慰禮城民戶 八月 遣使馬韓 告遷都 遂定疆 北至浿河 南限熊川 西窮大海 東極走壤 九月 立城闕 13년(A.D.6) 봄 2월에 왕도(王都)에서 늙은 할멈(老嫗)이 남자로 변하였고, 다섯 마리의 범이 성안으로 들어왔다. 왕의 어머니가 죽었는데 나이가 61세였다. 여름 5월에 왕이 신하에게 말하였다. “우리 나라의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 영토를 침략하므로 편안한 날이 적다. 하물며 이즈음 요망한 징조가 자주 나타나고 국모(國母)가 돌아가시니 형세가 스스로 편안할 수 없도다. 장차 꼭 도읍을 옮겨야 하겠다. 내가 어제 순행을 나가 한수(漢水) 남쪽을 보니 땅이 기름지므로 마땅히 그곳에 도읍을 정하여 길이 편안할 수 있는 계책을 도모하여야 하겠다.” 가을 7월에 한산(漢山) 아래로 나아가 목책을 세우고 위례성의 민가들을 옮겼다. 8월에 사신을 마한에 보내 도읍을 옮긴 것을 알리고 마침내 강역을 구획하여 정하였는데 북쪽으로는 패하(浿河)에 이르렀고, 남쪽으로는 웅천(熊川)을 경계로 하였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막혔고, 동쪽으로는 주양(走壤)에 이르렀다. 9월에 궁성과 대궐을 세웠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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