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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urday, November 22, 2014

로마 vs 한나라 전쟁하면 로마가 이긴다

답변
님의 답변
03.09.19 19:15
답변공감
답변 내용
고대 로마군은 전적으로 보병 위주였고 기병이나 궁수는
보조 부대에 불과했습니다. 그 이유는 기술적 문제였지요.
기병은 발을 딛는 등자가 없어 양 다리로 말 배를 꽉 잡고
타야 했으니 말 위에서 전투를 벌인다는건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활 역시 동양의 활처럼 대가 중간에서 한번 꺾인 강궁이 아니라
자기 키보다 크고 밋밋한 활 대에 시위를 맨 것 이상 개발이
안되었습니다. 요새 척도로 한 오십미터 나가는게 고작이었죠.
나중에 카르타고의 한니발 부대에 시달린 뒤로 기병 전술이
발달하긴 했습니다만..
주력은 경무장 보병으로 무기는 짧은 칼과 방패가 전부였습니다.
근접해서 방패로 상대방 칼을 막고 배를 푹 쑤시는 기술이
유일한 전투 방법이었습니다.
이에 반해 중국은 일찍부터 도, 검, 창, 극, 모, 부월 등
각종 병장기가 발달했고 그것을 다루는 기술이 대단했습니다.
지휘관은 마상에서 전투를 했고, 기병 하나가 보병 열을 당해낼 정도였습니다.
활은 두말 할 필요도 없이 주력 병기 중 하나였구요.
전투만 놓고 보면 절대 유리했을거라 볼 수 있지요.
하지만 국지전이 아닌 대규모 전쟁이라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전쟁의 승패는 보급이 좌우하는데 당대의 로마는 이점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습니다. 로마군이 진출한 곳에는 어김 없이 길이 닦여졌답니다.
보급이 대단히 원활했다는 얘기입니다. 게다가 로마군은
전투나 행군 등 모든 전술 행위 매뉴얼이 있었습니다. 매뉴얼대로 행동하기에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었습니다. 매우 무자비한데다 약탈도 매뉴얼에 따라
조직적으로 행해져서 만일 보급이 끊긴다 해도 현지 조달이 가능했지요.
그러한 고로
아마 로마군이 초반의 열세를 딛고 승리를 거두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리스 과학의 보관창고였던 이슬람과학

이슬람 세계의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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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함마드에 의하여 아라비아에서 시작된 새로운 종교인 이슬람교는 불과 100여 년 사이에 세력을 확장하여 서쪽으로는 스페인 및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동쪽으로는 페르시아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장악하였다. 이에 따라 헬레니즘 문명권의 여러 지식들이 이슬람권으로 유입되게 되었다. 특히, 그리스의 자연 철학 내용을 담은 서적들이 7세기에서 11세기 사이에 아랍어로 번역되었다. 이들의 번역에는 정교하고 긴 주석이 덧붙여지게 되어, 독특한 색체를 띤 이슬람 과학의 내용으로 발전하였다. 이븐 알하이삼의 생리학적인 광학이나 연금술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리스 과학의 보관창고였던 이슬람과학[편집]

이슬람 세력은 무함마드 등장 이후 스페인에서 페르시아 지역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100여 년이라는 빠른 시일에 점령하였다. 이에 따라 헬레니즘 문명권의 수많은 지식들이 이슬람권으로 유입되었다. 특히, 그리스의 의학 및 자연철학 내용들이 집중적으로 유입되었다. 9세기 초반 이슬람 왕조의 군주 알 마문은 당시 수도였던 바그다드에 ‘지혜의 집’이라 불리는 학문연구소를 세웠고 수많은 학자들이 이 곳에서 방대한 양의 그리스 서적을 아랍어로 번역하였다.
이슬람 세력이 팽창하여 그 문명이 절정에 달하게 되는 7세기에서 11세기 사이의 500여년간은 서구 문명권의 위상이 가장 위축되어 있던 시기였다. 서방 세계의 과학 활동이 미약했던 이 시기에 많은 그리스의 고전들이 아랍어로 번역된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번역 과정에서 정교하고 긴 주석이 덧붙여지게 되어, 독특한 색체를 띤 아랍 과학의 내용으로 발전되기도 했다. 이븐 알하이삼의 생리학적인 광학이나 물리적 실체를 엄격히 논하는 아랍 세계의 천문학적 경향 같은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또한, 고대 그리스 세계의 수학이란 기하학을 의미하는 것이었지만, 아랍 세계에서는 대수학 분야가 형성되며, 연금술 전통이 이론적인 구도를 갖추면서 강한 전통으로 확립되어 후대 과학의 성격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13세기에 들어서면서 유럽대학이 설립될 무렵, 그리스의 과학 및 의학 저술들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커지게 되었다. 서방 세계 대부분의 지역에서 그리스의 책들은 이미 망실되었고, 서방의 학자들은 아랍어로 번역된 고대 그리스 서적들을 라틴어로 번역하였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아랍의 과학은 그리스의 과학 저술들을 보관해 두었다가 서양에 다시 전달하는 일을 했다고 표현한다[1].

이슬람의 광학[편집]

이븐 알하이삼의 고전적 노작인 《광학의 서》
이슬람 문명권에서는 사막 지대에 신기루를 비롯한 여러 광학현상이 나타났으며, 사막의 강한 바람으로 많은 사람들이 눈병에 걸려 이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눈과 시각 현상에 대한 많은 지식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광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이슬람의 광학은 기하학적 전통을 계승한 알킨디(Al-Kindi), 해부학적 전통을 계승한 후나인 이븐 이샤크(Hunain Ibn Ishaq), 그리고 경험에 의해 얻어진 형상이 뇌에 전달된다고 주장한 전통을 계승한 이븐 시나 등 세 사람이 계승한 전통에 의해 이어져 왔다. 당시 수학적ㆍ해부학적 전통에서는 눈에서 나오는 고아선이 물체에 닿을 경우 중간의 공기가 압축되어 그 영향이 눈의 수정체 액에 전달되어 물체가 인지된다고 생각했었다.
서유럽 학자들은 이븐 알하이삼아리스토텔레스적 전통과 수학적ㆍ해부학적 전통을 결합시켜 체계화한 이론을 받아들였다. 이븐 알하이삼은 빛과 색이 눈과는 독립적으로 물체에서 모든 방향으로 직선으로 방출된다고 생각했으며, 점광원에서 나오는 빛이 눈에서 굴절되면서 물체와 눈 사이에 일대일 대응이 생긴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물체로부터 눈으로 들어오는 상을 그대로 인간이 인지하는 것이 아니며, 경험에 입각한 추론에 의해서 물체를 인지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는 근대적인 시각 이론의 형성을 위한 중요한 발견이었다. 이븐 알하이삼은 시각 현상 외에도 무지개, 후광, 거울 등 광학에 대한 광범위한 연구를 수행했는데, 이러한 연구들은 케플러와 같은 서구의 광학 이론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연금술의 발전[편집]

이슬람 세계의 연금술에 대한 문건
서양의 연금술은 고대 이집트에서 기원했으며, 헬레니즘 시대에 들어와서는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본격적인 연금술사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연금술은 영지주의를 위시한 신비주의 사상과 결합되면서 광범위하게 전파되었다. 이런 신비주의적 전통을 지닌 연금술은 이슬람으로 건너오면서 역시 이슬람 신비주의인 수피즘(Sufism)과 결합되어 발전하게 되었다. 연금술이라는 어휘 자체가 아랍어의 기원을 갖고 있으며, 그 외 알칼리, 알코올, 나프타, 나트륨 등 연금술을 통해서 발견된 수많은 화학물질의 명칭이 아랍어에서 기원했다.
한편, 연금술의 이론적 근거는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소 이론에 바탕을 두고 있다. 모든 물질은 4원소들의 배합이기 때문에 그 비율을 바꾸면 다른 물질이 된다는 생각은 연금술사들에게 물질이 변환될 수 있다는 믿음을 주었다. 9세기에 와서 이슬람 연금술의 아버지인 자비르 이븐 하이얀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물질 이론을 더욱 발전시켜 새로운 황-수은설을 제창했다. 그의 황-수은 설은 이슬람과 유럽 연금술의 기본 원리로 발전했으며, 18세기를 풍미했던 플로지스톤 이론에 이르기까지 오랫동안 화학의 중요한 이론적 배경으로 남아 있었다.
연금술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물질 이론이나 황-수은설을 이용하는 한편, 물리ㆍ화학적 조작을 가하기도 했으며, 기도 혹은 주술도 활용하는 등 헬레니즘 시대 이래로 강하게 남아 있었던 신비적 자연관이 그 바탕에 깔려 있었다.
또한, 연금술사들은 점성술사들처럼 대우주와 소우주가 서로 연결되었다고 여겼기 때문에 자신들이 다루고 있는 중요한 물질들을 각각의 별자리와 연관시켰다.
연금술은 이와 같은 신비주의적이고 비합리주의적인 분위기 속에서 발전했지만 이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과학사(科學史)상 많은 공헌을 이루어졌다. 즉, 연금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천칭이나 시약이 사용되었으며, 화학적 조작이 활용되면서 새로운 화학 물질도 많이 발견되었다. 연금술이 과학사에서 한 역할은 베이컨의 평가에서 비유적으로 잘 나타난다.
연금술은 아마도 아들에게 자신의 포도 밭 어딘가에 금을 묻어 두었노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에 비유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들은 땅을 파서 금을 발견하지는 못했지만, 포도 뿌리를 덮고 있던 흙무더기를 헤쳐놓아 풍성한 포도 수확을 거둘 수 있었던 것입니다. 금을 만들고자 노력했던 사람들은 여러가지 유용한 발명과 유익한 실험들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http://ko.wikipedia.org/wiki/%EC%9D%B4%EC%8A%AC%EB%9E%8C_%EC%84%B8%EA%B3%84%EC%9D%98_%EA%B3%BC%ED%95%99

Friday, November 21, 2014

o2a는 인도 드라비다족이고, o2b와 갈렸다?

한국인의 유전자 계통

http://blog.donga.com/nambukstory/archives/41735
"다시 생각해보는 민족론 "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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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장된 민족주의 공동체의 구성원을 이루는 서브 종족의 정체성을 어떻게 보아야 할지요. 시간이 흐르면 피가 섞입니다. 피가 섞이면 증오는 묽어지지요. 남미인은 스페인 선조를 증오하지 않습니다. 일본인이 야요이와 죠몽을 똑같이 기리듯이. 탐라인이 한국인임을 자랑스러워 하는 것이 슬픈 일인지요. 동아시아 언어학의 주류는 제주어를 한국어와 별도의 언어로 봅니다. 일본인은 일본어와 전혀 다른 류큐어를 “오키나와벤(사투리)”이라 부르지요. 프랑스는 알제리인에 대한 출입국관리를 하였으나, 일제는 조선인이든 류큐인이든 출입국관리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조선족을 변절이라 쉽게 말할 수 있을지요.
물론 성별차는 있습니다. 대체로 고대와 그 이전을 보면, 정복민족이 들어올 때, 피지배 남성의 대는 대부분 끊겼고, 피지배 여성의 혈통은 지배계급과 혼화되어 계승되었습니다. 한국인도 그렇듯이, 대부분 민족체의 유전자 풀에서 부계 Y염색체 구성은 매우 단순하나, 모계 마이토콘드리아 염색체 구성은 대단히 복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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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색체의 경우 Y염색체 DNA는 부계로만 전승되고, 마이토콘드리아의 mtDNA는 모계로만 전승됩니다. 한국인의 경우 Y염색체 Haplogroup의 경우 O2b (한인/예족/말갈족), O3 (화하족/상족), C (맥족)가 3대 염색체이고 D (고아시아인=아이누=읍루, 혹은 임나/변한/침미다례의 왜족), N/K(훈누 스키타이 계열)도 일부 나오나 소수입니다. 잘 아실 것으로 생각되나 O2b는 도작문명을 가지고 북상한 남방계이며 한국인의 지표 유전자로서 나오는 민족은 현재 4개밖에 없습니다(한국인, 만주족, 일본인, 류큐인). 일부 양자강 베트남에서도 나오는데 이것은 O2b가 O2a (인도 드라비다족)와 인도 인더스강 유역에서 갈라져서 올라오다가 남은 흔적입니다. 실제 한국어의 농업 관련 단어들은 드라비다어 계열이 많습니다. 제주 탐라인은 약간 달라서 O2b 비율이 적고 N 비율이 높습니다.
한국인의 mtDNA의 경우 Y염색체에 비해 훨씬 복잡하고, 비율적으로도 북방 퉁구스 계열이 가장 많이 나옵니다. 고아시아인(아이누/퉁구스계)이 양자강 유역에서 산동, 요서를 통해 북상한 O2b에게 정복당한 흔적이라 볼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O2b가 C와 D의 땅에 들어와 남자는 노예로 부리다 죽이고 여자만 취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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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donga.com/nambukstory/archives/43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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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연말에 너무 정신이 없어 아주 가끔에야 들어오는 수준이라 제대로 된 토론에 참가할 수 없는 형국이고 답변조차 못드리는 무례를 범하고 있는데, 미천한 글을 인용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기본적으로 성씨의 문제는 다수 분들이 지적해 주신대로 왕족 귀족을 제외하면 오랜 역사에서 일반 민중들이 성을 갖게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현재 김/이/박 중 진짜배기는 일부에 불과하고 대부분 임란 이후 가져다 붙인 성씨들이 많습니다. 따라서 이하에서는 왕족 귀족 성씨에 대해서만 논의하겠습니다.
잘 아시듯이 고(구)려/백제 성씨는 거의 소멸된 상태입니다(이들이 모두 사라졌다기보다는 신라 지배 하에서 살아남기 위해 성을 바꿨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 남아 있는 고려/백제계 맥족(고마족) 성씨는 한국의 부여 서씨, 전씨 등등 정도이고, 오히려 일본에 도요타(중간에 이름이 바뀜), 하야시, 마쓰다, 나가노 등 다수가 남아 있을 뿐입니다.
그리하여 현재의 성씨의 메이저는 단연 신라계로서, 왕족(박, 경주김씨)+ 수로왕 후손 김유신 계열(김해김씨)+사로 육촌에 뿌리를 둔 성씨들(이, 최, 정, 손, 배, 설)이며, 희성은 대부분 중국 귀화성씨가 많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이 위 김, 박, 이, 최 하는 것들이 실은 원래 그런 한자로 되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본래 우리 고유어로 되어 있다가 법흥왕 대를 전후하여 소급적으로 한화시켰을 가능성이 많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경주김씨의 경우 울진봉평비나 양서[김원종(법흥왕) 이름이 모진으로 나옴]에 따르면 모씨였을 가능성이 높고, 박씨 또한 박제상 관련 일본서기/삼국사기의 기재(본명이 모말(모마리)로 나옴)에 따르면 본래 모씨였을 가능성이 있으며, 김해김씨의 경우 최치원 석리장전에 따르면 김수로왕의 본래 이름이 뇌실청예로 추정되어 본래 뇌실씨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 양서에 나오는 법흥왕의 본래 이름(募秦): http://www.history.go.kr/url.jsp?ID=NIKH.DB-jo_008_001b_0040_0020
* 울진봉평비에 나오는 법흥왕의 본래 이름(牟卽智매금왕):
http://www.history.go.kr/url.jsp?ID=NIKH.DB-gs_kr_008_0010_0020_0030
* 울주천전리서석에는 법흥왕 본래 이름이 另卽知태왕으로 나옵니다.
* 일본서기에 나오는 박제상(김제상)의 원래 이름 = 毛麻利질지 (질지는 관직명)
http://www.history.go.kr/url.jsp?ID=NIKH.DB-jm_001r_0050_0060
* 혁거세 후손 박제상의 원래 이름 = 毛末
http://www.history.go.kr/url.jsp?ID=NIKH.DB-sg_045r_0080_0010
정리하자면, 중국 성을 갖다 쓴 것이 아니라, “한화된 신라계성”을 갖다 쓴 것이 오늘날 성씨의 주류가 되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한화된 신라계성인 김, 박 등은 화하족에는 없는 성씨이므로, 이를 중국성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특히 김씨의 경우 신라계, 훈누계(김일제 후손), 만주족계(아이신쥐러가 신해혁명 이후 김씨로 바꿈) 등 동이족 뿐이고, 화하족은 김씨가 없습니다.

twile
정확히는 16세기 이후 “중국 성”을 사용했던 것은 아니고, “한화된 신라계 성”을 공명첩, 납속 등으로 앞다퉈 가져와 사용했던 것이지요. 그들이 계속 고려, 조선에까지 잘 나갔으니까요. 중국계 귀화성씨는 대부분 희성들이 많습니다. 성씨의 한화는 법흥왕(모진) 이후 경덕왕 때까지 진행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http://botw.egloos.com/viewer/10968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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