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을, 韓을 모셔 오노라'… 백제의 神을 모시다
◇‘가스가대사’ 본전 입구.
도쿄대학 건축사학과 오타 히로타로(太田博太郞) 교수는 “이 가스가대사 사당은 후지와라노 가마타리(藤原鎌足·614∼649)의 부인(鏡女王·가가미노 히메미코)이 남편의 제사를 지내려고 710년쯤에 세웠다. 부인은 나라땅에다 남편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 직접 불교 사찰 고후쿠지(興福寺, 奈良市登大路町)도 세웠다. 가스가대사 사당은 본래 춘추 두 번의 큰 제사(春日祭, 가스가 마쓰리) 때문에 크게 번창해 왔다”(‘국보중요문화재’ 1963)고 한다.
예전까지 가스가대사에서는 음력 2월의 상신일(上申日, 첫 원숭이날)과 음력 11월의 상신일, 두 번의 춘추 제사를 거행했기 때문에 ‘원숭이 마쓰리’라고도 통칭했었다. 그러나 1886년부터는 해마다 3월13일에 가스가 마쓰리 제사를 지내게 됐다. “이 제사는 후지와라 가문의 큰 제사여서 성대하게 거행하며, 반드시 일본 왕실의 조정에서 칙사(勅使)로서 가스가사(春日使)를 제사지내는 사당에 보내 신주에게 폐(幣)를 바쳤다.(奉幣)”(東京堂版 ‘연중행사사전’ 등)
그런데 가스가 마쓰리 제사의 형식과 내용은 지금도 일본 왕실(도쿄 황거의 궁중 삼전)에서 해마다 11월23일 초저녁에 거행하는 왕실 제사인 ‘니나메사이’(新嘗祭, 鎭魂の儀)와 똑같기에 주목된다. 왕실의 니나메사이에는 일왕이 직접 제주로서 왕실의 궁중 삼전(賢所皇靈殿神殿)의 제사 전당에 참석하며, 여기서 백제신 신주(神主)를 모셔오는 축문인 ‘가라카미’(韓神)를 낭창한다.
‘미시마(三島) 무명 어깨에 걸치고 나 한신(韓神)은 한(韓)을 모셔 오노라, 한(韓)을, 한(韓)을 모셔 오노라’는 것이 축문의 첫머리 부분이다. “궁중의 니나메사이 제사 때의 제사 집행관으로는 조정의 좌우 두 대신(大臣)이 차례로 목청을 돋우며 ‘한신 축문’을 노래 형식으로 길게 낭창했다.”(臼田甚五郞 ‘神樂歌’ 1992)
교토대학 사학과 우에다 마사아키(上田正昭) 교수는 “일본 왕실 궁중 제사에서 모시는 한신(韓神)은 ‘백제신’이다”(‘神樂の命脈’ 1969)고 일찍이 밝혔다. 우에다 교수는 또 “미시마(三島) 무명이란 백제신의 신주를 모신 사당 터전에서 짠 신성한 무명이며, 조상신에게 귀중한 폐(幣)로서 제사상에 무명천을 바치는 폐백(幣帛)이다”고 지난 4월13일 필자에게 말했다. 현재 오사카(다카쓰키)에는 고대(5C)에 일본 왕실로 건너온 ‘백제신’을 신주로 모신 사당인 ‘미시마카모신사’가 있다.(연재 제57회 참조)
◇가스가대사의 왕족들.
여기서 더욱 주목할 만한 사실을 밝혀둔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일본 왕실 제사인 ‘니나메사이’와 백제왕족 후지와라 가문의 가스가 마쓰리와 더불어 삼위일체를 이루는 일본 왕실의 궁중 제사는 한신제(韓神祭, 가라카미노 마쓰리)라는 점이다.
한신제는 백제계의 제50대 간무천황(桓武·781∼806 재위)이 794년 헤이안경(지금의 교토시 터전)을 창설하면서 왕궁 북쪽에다 세운 백제신의 사당 한신사(韓神社)에서 거행하던 백제신 제사이다.(‘延喜式’ 927) 이상의 3가지 제사의 연관성에 관해 고쿠가쿠인대학 니시쓰노이 마사요시(西角井正慶) 교수는 이렇게 밝혔다.
“가라카미노 마쓰리는 고대부터 왕실(궁내성)에 모셨던 가라카미(韓神) 사당의 제사이다. 이 제사는 가스가 마쓰리 뒤인 2월(음력) 축일(소날)과 니나메사이 전인 11월(음력) 축일(소날)에 지냈다.”(‘韓神祭’ 1958)
일본 고대사에 등장하는 대정객 후지와라노 가마타리를 모르고는 일본 역사를 논할 수 없다. 후지와라노 가마타리는 큰 인물이기에 그가 백제인 왕족이라는 사실을 일본 사학자 대부분이 쉬쉬해 온 것 같다. 저명한 사학자 오와 이와오(大和岩雄)는 “후지와라노 가마타리는 백제인이다”(‘古事記天武天皇’ 1980)고 밝혀서 주목받았다.
◇부적을 사서 행운을 점치는 사람들.
오와 이와오는 후지와라노 가마타리의 아들 후지와라노 후히토(藤原不比等)는 백제계 귀화인에게 주어진 왕실 고관 벼슬인 ‘후히토’(史) 그룹과 관계가 있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백제인 계통의 후히토(史)라는 벼슬아치들을 들자면 다나베노 후히토(田史)를 비롯해 후미노 오비토(書首), 후네노 후히토(船史) 등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 후히토 그룹의 일원으로 성장한 뒤, 당시 정계 최대 권력자가 됐던 후지와라노 후히토는 후히토라는 벼슬아치의 명칭을 후히토(不比等)라고 그 글자 자체를 바꾸었다. 후지와라노 후히토는 어려서 백제인 고관 다나베노 후히토 가문에서 양육받았다.”(‘新羅蕃國視について’ 1978).
또 구리사키 미쓰호(栗崎瑞雄)는 “백제인들의 후히토(史) 그룹이란 어린 날의 후히토(不比等)를 길러준 다나베노 후히토 오스미를 중심으로 하는 그룹으로, 다나베노 후히토 오스미는 백제 귀화인 그룹의 리더였다”(‘本人麻呂’ 1981)고 했다.
◇경내에 이르는 연도에 줄지은 크고 작은 석등들.
마쓰모토 세이초(松本淸張)는 후지와라노 가마타리는 조선 귀화인이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후지와라노 가마타리는 본래 성명은 나카토미노 가마코(中臣鎌子)였던 것을 후지와라노 가마타리로 성씨와 이름까지 바꿨다. 그것을 보더라도 나는 그가 귀화인 계통의 관료였다고 본다. 이름에 ‘타리’(足)가 붙는 것은 조선 도래인 계통에서 많이 볼 수 있다. 7세기경의 ‘일본서기’에 나타나는 인명들을 보면 거의 다 귀화인 계통의 인물이다.” 나카토미노 가마코가 후지와라노 가마타리로 개성명한 것은 백제 멸망 당시 2만7000의 백제 원군을 일본 규슈에서 백제땅으로 보냈던 일본 제38대 덴치천황(661∼671 재위) 8년(668년) 10월의 일이었다. 그때 후지와라노 가마다리는 “조정의 최고 대신으로 임명받았다.”(‘新皇正統記’)
그렇다면 가스가대사 사당의 최고 신주(神主)인 후지와라노 가마타리는 구체적으로 백제계의 어떤 인물인가. 815년에 일본왕실에서 편찬한 왕실 족보인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에 보면 일본 왕족들(左京皇別) 중 제18번째 인물로 후지와라노 가마타리 가문의 가스가노 마히토(春日眞人)가 등장하고 있다.
이 가스가노 마히토는 일본 제30대 “비다쓰(敏達)천황의 황자(皇子)인 가스가왕(春日王)의 후손이노라”고 한다. 즉 후지와라노 가마타리는 다름 아닌 “백제 왕족 출신의 비다쓰천황”(‘신찬성씨록’)의 후손이다. 그는 백제왕족인 동시에 고대 일본 왕족이다. 그와 같은 사실을 입증해 주는 것은 가스가대사의 제사 양식이 일본 왕실 제사(신상제)며 헤이안경 왕궁의 가라카미(한신) 제사와 동일한 것뿐에서만은 아니다.
일본 교토에 있는 백제 제26대 성왕(聖王)의 일본왕실 사당 ‘히라노신사’(神社)에서 거행하는 제사(‘延喜式’)인 ‘히라노 마쓰리(平野祭)와도 공통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도 주목된다. 백제 성왕의 일본 왕실 사당 히라노신사에서는 근년에 새롭게 제작한 ‘히라노황대신’(平野皇大神)이라는 편액을 정문(도리이)에다 드높이 내걸었다. ‘황대신’이란 일본왕 큰 신령이라는 뜻이다. 즉 성왕은 일본 왕실의 큰 신주라는 것을 밝힌 셈이다.
◇본전에 이르는 장중한 회랑.
“백제 제26대 성왕은 일본 제29대 긴메이천황(欽明天皇)을 겸임했다”(小林惠子 ‘百濟王, 聖王は欽明天皇だつた’ 1991)는 것과 맞물려 백제 성왕(긴메이천황)의 제2왕자였던 일본의 비다쓰천황(572∼585 재위)을 뒤잇는 백제인 왕족이 다름 아닌 후지와라노 가마타리임을 살피게 해준다. 성왕(긴메이천황)의 제1왕자는 백제 제27대 위덕왕(威德王·554∼598 재위)이다. 그래서인지 가스가대사의 엄청난 사당 규모의 크기와 더불어 경내로 이르는 연도에 줄지은 크고 작은 석등들은 자그마치 1200여개에 이른다.
여기에 덧붙여 오사카부(히라카타시)의 백제 왕족 삼송가(三松家)의 사당인 ‘백제왕신사’(百濟王神社)와도 후지와라노 가마타리의 신주를 모신 가스가대사가 직접 연관되어 있어서 백제인 왕족들이 고대 일본에서 ‘백제계 일본 왕실’을 구성하며 활약한 백제인 왕족들의 종횡으로 면밀한 연결고리도 주목할 만하다.
그런 구체적인 실례는 삼송가의 사당이 있는 히라카타시의 “백제왕신사의 본전 건물은 본래 나라땅 가스가대사의 구전(옛신전) 건물을 옮겨온 것”(井上正雄 ‘大阪府全志’ 1922)이라는 것으로도 살피게 한다. 그러므로 삼송가하고 후지와라 가문도 서로가 똑같은 백제 왕족의 핏줄이라는 것을 여기서도 말해주고 있다.
No comments:
Post a Comment